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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04. 2023

마크 젠킨, <에니스 맨>

희귀종은 보호가 아니라 자생을 꿈꾼다

마크 젠킨(Mark Jenkin), <에니스 맨>(Enys Men) 

- 희귀종은 보호가 아니라 자생을 꿈꾼다     

“자유는 형식을 해체해도 좋다는 허용이다. 도덕의 형식을 위시해서 모든 형식을 해체해도 좋다는 허용인 것이다. 자유란 말살이다. 모든 투쟁의 근거를 뿌리 뽑기 위해서 모든 신앙, 갖가지 종류의 신앙을 절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는 포기이다. 모든 인습적인 견해, 모든 인습적인 상황, 즉 국가, 교회, 조직, 권력 수단, 금전, 무기 교육을 포기하는 것이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꽃은 아름답다. 시각적, 후각적, 미각적으로 황홀한 꽃은 아름다움을 내어주는 대가로 우리에게 번식을 부탁한다. 하지만 몇몇 식충 식물의 사례처럼 꽃의 아름다움은 덫이자 미끼다. 아름다움으로 인류를 꿰어내는 꽃을 '불일치선언'으로 유명한 시네아스트 베르트랑 만디코가 상상한 적이 있다.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무인도에서는 곤충이 아니라 포유동물과 인간을 현혹하는 꽃이 있지 않을까 공상하며, 꽃에 의해 소년들이 소녀로 성 전환되는 기이한 이야기를 그려보았다.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이길 바라지만, 그 의식은 거세되지 않은 동물적 본능, 곧 성욕에 의해 이따금 정복된다. 그 성욕을 갖가지 체위로 자극하며 오르가즘을 선사하는 꽃이 있고, 그 기묘한 꽃은 남근을 가졌기에 이를 누리는 대가로 소년들은 남근을 포기하고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아름다움을 누리는 대가로 번식을 도울 것이냐, 먹이가 될 것이냐, 성 정체성을 포기할 것이냐, 꽃이 인간에게 굳이 ‘아름다운’ 이유를 찾는 상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크 젠킨은 신작 <에니스 맨>에서 희귀한 꽃을 탐구하며 악몽에 젖어드는 기묘한 포크 호러를 선보이며 아름다운 꽃의 비밀을 탐구한다. 1976년 뉴린 태생의 마크 젠킨은 영국 내 콘월 영화감독이다. 그가 콘월계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콘월계 영화감독임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영국 영화감독이라고 그를 통칭할 수 없다. 젠킨은 무수한 단편 작업을 이어오다가 2019년 <미끼>로 장편 데뷔하였다. 지금까지의 단편에서도 실험적인 연출과 영상미를 탐구한 그는 장편 <미끼>에서 파격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미끼>는 내지인과 외지인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다. 젠킨이 콘월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영국 내 소수민족의 독자적인 삶을 방해하는 외지인의 침입, '덫'을 다룬 알레고리로 해석할 수 있다. 여하튼 그 덫은 그레인이 자글거리는 조악한 16mm 흑백 필름에 담긴다. 이에 영화의 공간은 영국의 어느 한 해변이라는 것만 추상적으로 유추 가능하고, 시간적 배경은 더더욱 추측하기 까다롭다.      


필름에 더해 1.33:1의 화면비, 거친 후시녹음을 선호하는 젠킨은 영화가 재료로 삼는 '현재의 현실'을 어지럽게 교란하며 혼란스러운 고유의 이미지를 창출한다. 그런데 영화는 미장센만 불명확하지 않다. 영화의 편집도 단언하기 어렵다. 젠킨의 편집은 유사성을 바탕으로 이어지는 매치컷을 적극 활용하고, 이를 매우 빠르게 자르고 이어낸다. 해당 편집으로 한 개인에게서 발원한 숏이 마을 전체에 거쳐 유사성을 띠는, 폐쇄적으로 연결된 소규모 공동체의 특징을 가시화한다. 매치컷되는 것은 주로 포획한 물고기, 개인의 소유물들, 그런데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소유되는지 알 길이 없다. 개인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어 사유재산은 침해당한다. 매치컷은 단순히 사물들 간의 유사성에 그치지 않고, 무수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기억 및 심리로도 이어져 영화의 비선형적인 구성은 폐쇄적인 공동체 속에서 개인 상실을 가시화한다. 내용 또한 무단침입, 절도, 무단취식 등이 발생한다. 이에 하나의 사물엔 한 개인의 의식, 기억만 있지 않다. 무수한 사람들의 기억이 덧씌워지고, 또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추측도 매치컷으로 연결된다. 개인은 전체가, 현재는 기억이, 사실은 의심이 덧씌워짐에 판단을 거두고 길을 잃은 사람들은 '미끼'를 덥석 물고 '덫'에 걸린다. 젠킨은 미끼와 덫을 연출로 가시화하는 훌륭한 미적 승화를 장편 데뷔작에서 선사한다. 이러한 덫에 붙잡힌 고립된 각계각층은 현실이 아니라 허구의 표상에 갇혀있다. 어획물을 잃어버린 마크는 청년세대를 의심한다. 영화 속 절도를 의심받는 대상은 청년들과 부르주아인데, 전자는 껍질을 남겼고, 후자는 이를 숨겼다. 그리고 마크는 자신이 착취하는 약자 청년세대를 너무나 손쉽게 의심하고 문책했으며, 음흉하게 콘월의 부를 착취 및 절도하는 외지인 부르주아와는 대립하지 않는다. 젠킨은 부르주아가 대변하는 콘월 바깥의 잉글랜드인의 착취를 비판하면서도, 콘월 내에서의 단절과 고립, 특히 세대갈등에 의해서 외세에 맞서지 못하는 상황을 비판한다. 개인의 진실이 허구와 뒤섞이는 비선형적인 편집이, 진실이라는 선형적 연결로 회복될 수 있길 희망한다.      


이렇게 자글거리는 그레인, 깜빡거리는 플리커, 비선형적인 편집 등의 실험적 형식으로 콘월의 삶을 가시화한 젠킨은 이번에도 콘월을 대상으로 한 영화를 연출한다. 1973년의 콘월 지방의 어느 한 무인도를 배경으로 한 호러 영화 <에니스 맨>을 말이다. 일단 서두에서 언급한 '꽃'이 본 작품에서 어떻게 등장하는지부터 살펴보자. <에니스 맨>은 항상 '빨간 옷'을 챙겨 입는 중년의 '자원봉사자'가 휘귀종·보호종으로 일컬어지는 '새하얀 화초'를 관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당 꽃이 위치한 곳은 영화의 제목인 'Enys men'으로 이를 콘월어로 번역할 시, 콘월 지역의 지리적 특성인 '바위 많은 섬'을 가리킨다. 즉 해당 꽃은 콘월 지역에 피어있다. 새하얀 꽃은 콘월의 자생종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새하얀 꽃은 섬 전체를 가득 채우지 못한다. 자원봉사자에게 보급품을 전해주러 온 남자의 얘기를 따르면 "함부로 꺾어선 안 되는 꽃", "위치를 옮겨선 안 되는 꽃"이다. 하지만 꽃의 생각은 다르다. 자원봉사자가 꺾기도 전에, 해당 꽃은 섬의 광부들을 추모하는 '위령비' 주변으로 옮겨간다. 또 자원봉사자의 배에는 젊은 날 자살 기도의 여파로 남은 큰 흉터가 그어져 있는데, 하얀 꽃은 거기에 뿌리를 내려 번식한다. 즉 꽃은 섬 이곳저곳으로 이동하여 번성하고 싶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잉글랜드다. 꽃은 하얗다. ‘하양’은 콘월의 상징적인 색채로서, 젠킨이 <미끼>에서 외세에 영향 받지 않는 콘월의 주권을 되찾으려 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콘월을 상징하는 새하얀 꽃은 영국의 관리·감독에서 벗어난 주권 회복을 갈망한다. 콘월은 한때 자치권을 가졌지만, 광산 산업의 쇠퇴로 잉글랜드에 복속되며 사실상 잉글랜드가 규정한 소수민족, 곧 '보호종'으로 전락한 셈이다. 그 새하얀 콘월을 영국의 상징색인 '빨간' 바람막이를 입은 자원봉사자가 날마다 관리한다. 꽃은 항상 "No Change"로 관찰일지에 기록된다. 하지만 꽃은 보호받으며 가만히 머물고 싶지 않다. ‘Change’하며 잉글랜드의 그늘에서 벗어나 번식을 시작한다.      


잉글랜드의 영향력 약화는 영화의 ‘1973년’이란 배경에서 유추할 수 있다. 1973년 잉글랜드는 격동을 맞았다. EU에 가입했고, 제 1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즉 1973년 잉글랜드는 경제 침체를 겪었는데 그것이 영화 내 콘월 지배력 약화로 이어졌음을 유추할 수 있고, 젠킨은 이를 연출에 반영한다. 일단 영화 속 자원봉사자로만 불리는 여성, 그 외의 다른 이름도 없고, 식물을 관찰하는 것 이외의 삶이나 기원 등 모든 것이 다 불분명한 그녀는 '말이 없다'. 그녀는 항상 ‘침묵’한다. 영화 내 청각은 그녀 입에서 발생하지 아니하고, 섬의 바람·파도 소리, 발전기가 모터를 작동시키는 굉음, 섬 바깥에서 그녀에게 질문해오는 라디오 등이 근원이다. 그 중에서도 라디오에 의해서 자원봉사자는 입을 연다. 라디오의 질문에 따라 수동적으로 답변할 뿐이며, 현재 보급품이 떨어져가는 와중임에도 라디오의 '기다려라'는 지시에 잠자코 머무른다. 즉 외부에서 화초 관찰을 지시하고 보급품을 전달하며 섬에서의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영어를 사용하는 '잉글랜드'가 자원봉사자를 좌우한다. 그런데 그 영향력이 차츰 약화되어 가는데, 보급품이 늦기 때문이다. 그것이 ‘편집’에 영향을 미친다. 영화 초반, 자원봉사자가 관찰일지에 ‘No Change’라고 반복 기입할 때 카메라는 그녀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프레임의 상하에 그녀의 얼굴 일부가 잘려나가리만큼, 변화 없는 섬을 완고하게 판단하고 규정하는 그녀의 '동공'을 크게 부각하였다. 또 바위로 가득한 섬을 이곳저곳 누빌 수 있게 해주는 '산악화'도 마찬가지로 클로즈업한다. 클로즈업으로 가까이서 확대하는 화초 관찰과 발걸음이 곧 콘월 바깥에서 전해주는 보급품의 결과다. 보급품의 결과는 시각적으로 ‘확실’하다. 그런데 섬에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잉글랜드의 목소리만 있지 않다. 섬 내부의 바람이나 파도 소리도 있다. 영화 속 바다는 산 자를 죽게 만들고, 또 콘월에 머무는 그녀를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구조대원’으로 변신시킨다. 

    

바람 또한 마찬가지로 희귀한 꽃이 담겨 있는 물병을 떨어트려, 확실한 것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불확실성이 클로즈업과 교차되는 ‘롱숏’에 담긴 섬의 풍경이나,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이미지’로 가시화된다. 더욱이 잉글랜드에 의한 변화 없는 '고정된 카메라'와 콘월 내부의 변화에 따른 '핸드 헬드', 카메라 워킹도 대비된다. 하지만 아직까진 롱숏이나 이동하는 카메라가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모든 것은 보급품에 의해서 좌우된다. <미끼>에서 도드라진 젠킨의 '매치 컷'이나 '축약적인 연결'은 본 작품에서도 도드라진다. 그리고 양 편집 모두 다 '사물'에 의해서 이어진다는 점을 주목할 법하다. 그녀는 손으로 사물들을 '쥔다.' 또 손이나 발로 수도꼭지나 따개를 '돌린다.' 쥐고 돌리고, 사물에 의해서 그녀의 육체가 ‘특정 행동’을 하게 되며, ‘구체적인 형상’으로 뒤바뀐다. '사물에 의한 그녀의 특정한 동작'이 영화에서 매치 컷되며 이어진다. 축약적인 연출도 마찬가지로, 분명 관찰 하는 주체는 자원봉사자다. 그러나 영화는 자원봉사자가 관찰하러 가는 ‘발걸음’을 과감하게 잘라버린다. 영화는 그녀의 발걸음이나 의식으로 이동하지 아니하고, 앞서 언급한 ‘사물에 의한 그녀’가 연속되는 매치 컷이나, ‘사물들에 의한 연결’으로 옮겨 다닌다. 밤이 되었다. 그녀는 촛불을 끈다. 촛불이 꺼지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촛불의 부재’가 ‘잠들지 않은 그녀’보다 더 우선한다는 듯, 촛불이 꺼지자 더는 자원봉사자의 침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바로 그 다음날 아침으로, 아주 새하얀 하늘로 'jump'한다. 즉 자원봉사자는 잉글랜드가 보급한 물품들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섬에는 잉글랜드의 보급품만 있지 않다. 섬에 세워진 광산과 연결된 바위탑, 광산 밑의 나락, 교회, 위령비, 책자 등이 있고, 보급품은 물리적으로 연결했다면 해당 사물들은 비물리적인, 초자연적인 '유령'들을 그녀 눈앞에 이어낸다.      


이윽고 현재 실존하지 않는 콘월의 ‘사멸된 과거’의 영향이 점차 커지기 시작한다. 잉글랜드의 경제 약화로 보급품이 늦기 때문이다. 본래 자원봉사자에겐 '빨간 옷'을 입었다는 사실, 잉글랜드의 보급품에 의한 '결과'가 확연했다. 그런데 보급품이 늦자 변화가 생긴다. 꽃잎에 새로운 싹이 나기 시작하고, 그녀 몸에도 꽃의 새싹들이 피어난다. 그녀 눈에 유령들은 더 많이 나타난다. 현재를 가능케 한 과거가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한다. 섬의 위령비는 광산에서 사망한 콘월 광부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해당 광부들이 그녀 집에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한다. 또 이름 모를 젊은 여성 또한 그녀와 동거하는데, 영화 말미에서 그녀는 자원봉사자의 젊은 시절임이 밝혀진다. 젊은 여자 유령은 지붕에서 떨어져 자살 기도했고, 이후 자원봉사자와 똑같은 상처가 났다. 잉글랜드의 보급이 약화되자 자원봉사자가 스스로를 타자화하여 잊고 지낸 콘월의 '하얀 과거'가 떠오른다. 이로써 그녀 몸이 양극화된다. 하나의 몸은 빨간 옷을 입고 있고, 다른 하나의 몸은 하얀 옷을 입는다. 잉글랜드의 보급품이 콘월이기를 망각시킨다면, 그 보급품을 자아내는 경제가 약화되자 현재를 규정하는 또 다른 요소, 콘월의 '역사'가 부상한다. 이제 자원봉사자는 라디오에서 울려 퍼지는 '메이데이'나, 그녀를 향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무시하고 제 할일을 한다. 잉글랜드가 보급한 완전한 것들 사이에 둘러 싸여 확고부동하게 살아가던 그녀가 이젠 콘월의 '난파된 것들'에 주목한다. 난파로 그녀와 섹스하던 '우비를 입은 남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원봉사자는 잉글랜드의 보급품을 받으며 본 사실을 망각했었다면, 보급품이 약화되자 '바위 틈' 사이에서 난파된 파편을 힘겹게 꺼내어 보존한다. 물론 둘로 나뉜 정신은 방황한다. 야밤에 위령비에서 흘러나온 아이 유령들이 노래를 부른다. 자원봉사자는 "누구세요?"라고 외치며 이들을 쫓아내려 하지만, 되레 그녀를 압도하는 것은 위령비, 곧 콘월의 역사다.      


한편 빨간 옷을 입은 자원봉사자가, 콘월어로 노래를 부르는 소녀 유령들 사이에 둘러싸인 하얀 옷을 입은 자신을 목도하고, 이후 눈을 감아 하얀 자신을 사라지게 만든다. 하얀 것은 빨간 것을, 빨간 것은 하얀 것을 서로 부정하며, 어느 쪽이 그녀 자신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섬에 발이 묶인 그녀, 구급대원이 되어 저 바다로 떠나는 그녀 중 누가 진짜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젠킨은 <미끼>에서도 사용한, 조악한 16mm 필름으로 혼란을 가시화한다. 화질이 낮아서 흐리고 부정확하다. 피사체가 내가 판단한 것이 맞는지 확신하기 어렵다. 더욱이 내가 보고 있는 저 '점들'이나 '불그죽죽한 광휘'가 매체의 '그레인'이나 '손상'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영화 내 이미지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포착한 것'과 포착한 것을 담아낸 '매체가 발생하는 시각'이 공존하며, 양자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영화의 미장센이 콘월도, 그렇다고 잉글랜드도 아닌,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그녀를 가시화한다. 하지만 서서히 콘월로서 자신을 긍정한다. 이젠 콘월에 의해서 편집이 좌우된다. 그녀는 밤마다 책을 읽고, 그 책은 옛날에 콘월에서 살던 신부 유령을 불러온다. 이후 그 유령을 직접 보기 위해 교회로 향한다. 항상 밤에 촛불을 끄던 그녀가 촛불을 피우고 그간 카메라에 포착되지 않던 밤의 망령들을 담아낸다. 꽃-광산 입구-집만 오가던 그녀가 부두로 나가서 자신과 친했던 남성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간 변화 없이 반복되던 것이 보급품이 좌우한 삶이라면, 이제 반복되는 삶은 유령들이 '메아리'치고 '공명'하는 콘월의 역사다. 자원봉사자는 그 소리를 막기 위해서 광산 입구 아래로 커다란 돌을 떨어트리려 하지만, 이내 곧 포기한다. 외부에서 늦게나마 보급품이 도착했고, 헬리콥터가 날아왔으며, 이후 위령비도 사라진다. 한때 콘월은 광산법원이 있어 자치권을 가졌지만 경쟁력 약화로 폐지되어 잉글랜드에 복속되었고, 1973년은 독립의 기회였지만 잉글랜드는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이다. 자치권을 위한 광산 아래서 흘러나오는 메아리,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잉글랜드의 라디오도 모두 '반복'되며 공명한다.      


두 가지 메아리 사이에서 자원봉사자는 처음에는 라디오에 연락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이후 희귀한 꽃을 꺾어다가 위령비 앞에다 놓고 영화는 끝이 난다. 그녀가 꽃을 꺾음으로써 아낙네 유령들이 발을 구르며 발생시키던 청각도 차단된다. 유령들의 청각은 모두 콘월이라는 역사가 그녀의 기원을 복기하는 목소리라 말할 수 있으리. 그녀 자신에게 있던 것이지만, 타자화되어 외부로 추방된 유령들이 그녀에게 되돌아가길 촉구하고 있었다. 이젠 외부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그녀 내부에서 콘월로서 행동을 자각했으므로, 이제 콘월로서 자신에 따라 행동하므로. 잉글랜드를 무시하고 꺾은 꽃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심을 때, 클로즈업에는 보급품도, 유령도 아닌 다른 것이 담기기 시작한다. 바로 현재 섬에서 번성하고 피어나는 동식물들이 포착된다. 지배에서 벗어날 때, 원주민과 자생종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이렇게 젠킨은 한 개인을 좌우하는 '환경'을 탐구한다. 식민화 및 물신적인 환경/역사적인 환경의 대립, 이러한 가운데서 자생하는 후자를 선택할 때 비로소 주권을 되찾아 삶은 독립한다. 본 작품 속 희귀하고도 아름다운 꽃은 신비로움으로 사람을 꿰어내어 '자생'과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코로나 펜데믹 동안 불과 21일 만에 촬영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작품, 자생을 위한 저탄소 운동에 몸소 동참하여 친환경적인 제작을 실천한 작품으로, 젠킨은 그의 두 번째 장편에서도 콘월로서의 정체성과 개성적인 영화 미학을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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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704 집에서 (BFI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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