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Dec 27. 2023

에스티발리스 우레솔라 솔라구렌, <2만 종의 벌>

성별의 제약이 없을 때 실현되는 자유

에스티발리스 우레솔라 솔라구렌(Estibaliz Urresola Solaguren), <2만 종의 벌> 

(20,000 Species of Bees) - 성별의 제약이 없을 때 실현되는 자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성별과 계급·국적을 부여받음에, 후천적 삶은 태생적 불가항력을 자신의 선택으로 극복하고자 투쟁한다. 그중 계급과 국가도 그러하지만, 성별 또한 우리에게 큰 제약을 가한다. 본래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의 제약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분명 신체적인 차이를 배제할 순 없지만, 생물학적 성별보다도 더 큰 장벽으로 개개인에게 엄습하는 것은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다. 젠더는 신체의 특징과 무관한, 성별에 따른 용모와 사회적 역할을 강제한다. 이는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궤변이자 제약이기에, 개개인은 부조리함을 느낀다. “나는 이성 젠더의 특징이 본성이라 여기는데, 또 이분법적인 젠더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추구하는데, 이런 생각을 가진 나는 잘못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갖는 이들은 시도한다, 다른 젠더를 갖기 위해서 그 젠더에 해당하는 신체로 성형해보고, 주디스 버틀러의 주장처럼 이분법적 젠더의 모순과 한계, 역설을 증명하여 그야말로 무한한, '2만종'을 넘는 젠더의 시대로 나아가고자 투쟁한다. 전근대의 이분법적 젠더가 한계에 봉착한 오늘날, 이를 번뇌하는 한 어린 존재를 에스티발리스 우레솔라 솔라구렌이 장편 데뷔작, <2만 종의 벌>에서 비춘다.     


1984년 알바오 태생의 에스티발리스 우레솔라 솔라구렌은 스페인의 영화감독이다. 지금까지 무수한 단편을 연출한 그녀는, 본 장편 <2만 종의 벌>로 장편 데뷔한다. <2만 종의 벌>에서 확장될 그녀의 단편 색채를, 현재 vimeo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품 <아드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솔라구렌은 남성에 의해서 여성 젠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분석한다. 주인공 아드리는 수영 선수다. 그녀 스스로도 수영 선수이기를 선택한 모양이요, 그 직업을 원하는 의중이지만, 그녀 자신이 원하는 수영 선수이기보다는 남성 코치와 아버지, 곧 '가장'들에 의해서 정체성이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드리의 '육체'가 그들의 기대와 욕망에 부응하지 못한다. 그녀 자신의 육체와 그들이 기대하는 아드리 사이의 '간극'이 커다랗게 벌어진다. 이러한 와중에 아드리의 친구는 그녀가 어떠하든, 아드리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즉 솔라구렌은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 왜곡, 반면 존재를 있는 그대로 품어서 탄생시키는 여성성을 대비하며, 여성은 그녀 자신에 의해, 또 후자의 포용력으로 인해서 완성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아드리>에서 나타난 가장, 곧 가부장제라는 이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존재가 <2만 종의 벌>에서 이어진다.      


그 존재는 부모가 붙인 이름 '아이토르'라 불리고, 별명 '코코'라고도 칭하며, 자신이 붙인 이름 '루시아'로도 호명된다. 그 중 존재 자신은 루시아라는 이름을 제일 선호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작명한 이름으로서 주체성을 오롯이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토르, 코코라 불리게 되는 그는 도입부에서 일어나기 싫어한다. 엄마 아네와 아빠 고르카가 아이에게 일어나라고 다그친다. 하지만 아이는 어둠 속에 파묻혀있기를 선호한다. 아마도 잠든 상태에선 꿈꿀 수 있고, 꿈나라에선 원하는 이름으로 불리며 정체성을 가꿔나갈 수 있기 때문이랴. 솔라구렌은 본 작품에서 ‘어둠과 빛’을 극적으로 대비하는데, 잠과 꿈에 상응하는 어둠 속에 있을 때 아이의 행동은 가장 자유롭다. 루시아라는 이름을 작명하지 않은 초반부에, 아이토르보다 선호하는 이름 코코를 또래 아이들에게 어스름 속에서 소개했고, 자는 동안엔 용변 실수를 한다. 물론 용변 실수는 루시아가 원치 않는 것이긴 하지만, 낮과 달리 감정과 본능에 솔직할 수 있는 어둠과 밤의 증거다. 뿐만 아니라 형제 에네코와 불을 피워서 소원을 빌기도 하는 등 어둠 속에서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다한다.

그러나 낮은 다르다. 자유롭게 상상하며 꿈꾸는 추상적인 어둠 및 밤과 달리, 일어나는 순간 온갖 구체적인 사실과 제약이 눈에 펼쳐져있다. 그 사실은 존재가 부모한테서 자유롭지 못한 자식이자 아이라는 것, 특히 가장의 독단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을 때, 타인을 '검열'하는 시선은 약화된다. 그래서 감시받지 않는 아이들은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낮은 너무나도 잘 보인다. 검열하는 시선이 그야말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며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시선은 영화 속에서 '정상성', '일반성', '보편적으로 보고 싶은 것'에 대상이 들어맞는지 확인한다. 이에 남근을 달고 여성성을 모방하는 루시아는 젠더와 섹스의 일치를 요구하는 이성애적이고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일반적이지 않기에, 또래들의 시선이 제 남근에 닿지 않도록 옷으로 온몸을 꽁꽁 싸맨다. 여성 젠더를 추구하는 루시아이기에, 섹스가 남성인 것을 노출하지 않고자 말이다. 후반부,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에서도 사이가 냉랭한 고르카와 이네는 화목한 척, 부부의 모범에 부합하는 양 연기를 하고, 이에 동조하고 싶지 않은 루시아는 아예 자리를 이탈한다. 플래시를 터뜨리는 카메라는 존재가 아이토르이기를 요구하기에, 루시아로서는 사진에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낮은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 이질적인 타자들의 존재 여부를 검증하고 결정하는데, 그 여파는 개개인의 '운동'에도 미친다. 영화 초반부터 이동이 눈에 띈다. 가장 먼저 깨어나기 싫어하는 루시아는 침대에 가만히 머무르고 싶어 하는 반면, 이동하고 싶어 하는 부모는 아이를 자신들의 행선지에 동참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그 중에서도 고르카는 아네 및 아이들과 동참하지 않으며 원하는 곳에 머무는 반면, 어머니이자 아내, 가정주부인 아네는 남편이 책임져야 할 이동의 몫까지 떠안는다. 그렇게 원치 않는 공간으로 강제 이동하게 된 식구들은 짜증이 치민다. 이러한 내용이 촬영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영화의 카메라는 아예 가만히 머물러 있진 않지만, 이동 반경이 그리 크지는 않다. 갑갑한 연출과 상황 속에서 식구들은 '다리'를 흥미롭게 관찰한다. 자유롭게 어디론가 이동하고 싶은 욕구가 시선에 투영되는 것이다. 이는 간접적으로나마 남성의 영향이 사실상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 이네의 고향에서 성취된다.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축제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자유롭게 발걸음을 뗀다.      


그렇다면 루시아는 어디로 이동하고 싶어 하는가? 바로 원치 않는 이름에서 원하는 이름으로, 또 원치 않는 성별에서 원하는 성별로 자리를 옮기고 싶다. 영화 내내 루시아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인 아네를 선망하며 따라한다. 루시아는 에네코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을 꺼려하는데, 그 이유는 아네가 고르카와 동침하지 않기 때문, 즉 여성은 남성과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아네는 고르카에 대한 감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으며, 이는 아버지에 의해 원치 않는 곳으로 옮겨지는 루시아도 동일하다. 이런 고르카는 루시아에게 '남성 젠더'를 대표한다. 영화 내내 고르카를 제외하면 루시아가 본받거나 영향을 받을 만한 남성이 전무한데, 하필 유일한 남성 아버지는 루시아에게 부정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에 루시아는 남성의 빈자리를 채우는, 주변을 가득 둘러싼 여성을 대신 모방한다. 숫자가 많은 만큼 남성보다 다양하고, 또 항상 금지하는 아버지와 달리 여성들, 특히 이모할머니 루르드는 관용적이다. 

이에 소년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성의 미용 관습으로 인식된 복장을 착용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차성징이 오지 않은 루시아는 겉만 보기엔 여성으로 혼동되기 쉽지만, 아직 남근이 달려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루시아가 속한 가부장적 세계는 남근이 달린 존재는 머리를 치렁치렁 길게 늘어뜨려선 안 되고, 하늘하늘한 치마 또한 입어서는 안 된다. 이에 루시아는 소녀라고 오인되기도 하지만,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적인 복장에 집착하고, 앉아서 소변을 누는 이상한 존재로 여겨져 사회에서 서서히 배태된다. 또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많은 부조리에 처한다. 단적으로 아네는 선생이 되고 싶지만,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주체적인 경력을 쌓아나가기에 발목이 잡혀있다. 즉 루시아가 아네를 모방해도 제 꿈을 오롯이 펼칠 수 없을 것이기에, 그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루시아라는 작명을 하기 전까지, 그는 아이토르와 코코 두 이름 모두 싫어했다. 아이토르는 대놓고 싫어하는 반면, 코코의 경우 자신이 또래에게 소개할 때는 떳떳한 반면, 식구들이 호칭할 땐 싫어한다. 아마도 남성으로서의 이름 아이토르는 고르카를 닮아서 싫은 반면, 코코라는 이름 역시 여성 젠더의 부조리함과 이에 더해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떳떳할 수 없는 애매한 존재성이 반영된 이름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 애매한 루시아는 서서 소변을 싸기도 하고, 다시금 앉아서 용변을 보기도 하는, 하나로 굳지 않은 젠더를 왔다 갔다 한다.

이러한 루시아의 입지가 영화의 형식을 좌우한다. 바로 '핸드 헬드'라는 촬영법으로서 말이다. 본 작품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연상되는 작품이 있다. 카를라 시몬의 <프리다의 그해 여름>과 <알카라스의 여름>이다. 본 작품과 카를라 시몬의 영화는 여러 방면에서 유사하다. 소녀가 주인공이라는 점, 여성이 연출했다는 점, 스페인 영화라는 점, 그리고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는 점이 말이다. 카를라 시몬뿐만 아니라, 동향의 신예 여성 영화감독 엘레나 로페즈 리에라 또한 <워터>에서 유사한 연출과 태도를 지향한 것을 생각하면, 이베리아 반도의 여성 영화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정신이라 하겠고, 이 세 사람 모두를 관통하는 핸드 헬드는 그 정신의 육화다. 이런 점에서 핸드 헬드를 공통된 지역에 속한 다수의 영화인을 관통하는 리얼리즘의 가시화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형식은 뿐만 아니라 영화의 상황과도 조응한다. 아이토르로도 코코로도,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오롯이 머물 수 없는, 부모와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좌우되는 루시아의 불안정한 정체성이 마구마구 흔들리는 핸드 헬드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성별을 혐오하게 된 이들은 신체를 변형하려 한다. 루시아는 자신이 아네의 뱃속에서 잘못 태어난 것이라 믿는다. 여성 젠더를 지향하는데 생물학적 성별은 남성이니, 육체와 정신이 잘못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루시아 뿐만 아니라 아네 역시 고르카는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반면, 자신은 아이들에게 발이 묶인 상황이 난처하다. 당장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게 바뀌지만, 이들을 따라가야 하는 이네의 다리는 또다시 무거워지니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성별을 결정하는 신체가 불만족스럽기에, 또 신체를 가만히 놔두고 젠더만 바꾸는 것도 불완전하기에, 육체를 변형하고자 한다. 이에 영화에선 여러 상징이 동원된다. 가장 먼저 '밀랍'이다. 밀랍은 굳어서 딱딱한 형태로 등장한다. 하지만 굳어도 말랑말랑하고 유연해서 모양을 꽤 자유자재로 변형할 수 있다. 이네는 밀랍을 가지고 자아를 반영한 조각을 만든다. 그 조각을 토대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하여 교사직을 지원할 것이다. 즉 신체를 변형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건립하기 위함이다.

루시아 또한 밀랍 및 조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신체를 분절하여 자유자재로 조합할 수 있는 '인형'을 쥐고 논다. 더불어 이네의 고향에 막 도착했을 때 만난 소녀는 루시아에게 도마뱀을 잡아서 보여준다. 도마뱀은 '꼬리'만 잘라 남겨두고 소녀의 손아귀에서 후다닥 도주한다. 루시아는 도마뱀의 ‘툭 튀어나온 기관’이 잘려져서 덩그러니 방치된 것을 확인한다. 그것이 루시아의 욕망이다. 그는 하반신의 툭 튀어나온 기관은 잘라내고 싶다. 대신 에네코와 거품 목욕을 할 때 보여주듯, 하나의 덩어리를 두 개로 나눠서 상반신에 붙여내고 싶다. 그래야만 신체로도 정신으로도 온전히 여성이 되어 자신이 지향하는 존재, 더불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하나님이 보기 좋은 모습으로 완전하게 피조물을 창조했다고 언급되듯, 여성으로서의 완벽함, 남성으로서의 완전함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의 완벽함이 무제한적인 방종이자 독단이라면, 또 여성의 이상이 무제한적인 인내와 희생이라면, 이를 바라지 않는 존재들에게 이성 젠더의 가능성과 이를 초월한 자유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남성에게서의 포용력과 꾸밈 가능성, 여성의 이동 가능성과 주체성은 누군가가 '보기 좋은 이상'을 위해서 영영 좌초되어야만 하는가? 그래서 솔라구렌은 다양성을 긍정한다. 영화의 제목으로도 언급되는 '벌'을 통해서 말이다. 영화 속 벌은 선조의 무수한 후손들을 칭하는 상징적인 단어다. 그렇기에 루시아 또한 벌이다. 문자 그대로의 벌, 상징적인 벌 모두 다 루르드가 양봉한다. 루르드는 그 벌들을 다양하게 활용한다. 벌침을 활용한 의술에서부터 밀랍, 꿀까지 말이다. 즉 벌은 우리에게 다양한 선물을 안겨다주는데, 그 무한함을 안겨다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벌이 '2만 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2만 종의 벌들은 설화에서 루시아의 존재가 어떠하든 그저 긍정해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 벌들이 미국에서 유입된 전염병으로 인해서 멸종되어 가고 있다. 이에 따라서 신체로는 남성이지만 젠더로는 여성을 지향하는 루시아도, 2만 종의 벌이 가져다줄 풍요도 모두 사라져갈 지다. 솔라구렌은 2만종의 벌과 전염병을 존재와 젠더, 그리고 그들의 위기에 빗대기에, 전염병은 이분법적인 젠더 구도와 같으며, 결국엔 이분법적으로 고착화된 젠더의 틀을 깨야한다고 역설한다.

그 다양성은 '물'로써 실현된다. 본래 루시아는 물과 분리된 존재였다. 소녀나 손녀로 불리는 제 몸에 남근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수영장에 들어가지 않았고, 항상 가운으로 온 몸을 꽁꽁 싸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변형 가능성, 양자가 뒤섞인 가능성을 철저히 은닉 해야만 했다. 이에 루시아는 물의 유연함과 거리가 있는, 완고하고 딱딱한 대지에 묶였었다. 드레스를 입었다가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어른들의 고집에 의해 다시 남성적인 TPO로 교체하듯 말이다. 그러나 루르드는 루시아가 옷을 벗고 수영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 넣는다. 남근을 숨기고 여성으로 위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남근을 달고서도 여성성을 가질 수 있다고 독려한다. 이후 루시아는 자신감을 얻어 친구에게 제 몸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루시아의 입장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옷가게에서, 비가 내리는 바깥으로 자식을 빼내는 이네의 태도도 물의 속성과 연관해서 눈여겨 볼 법 하다. 

즉 존재는 하나의 생물학적 성별을 타고나긴 하지만, 이에 따른 하나의 젠더에 갇혀선 안 된다. 하나의 섹스에는 무한한 젠더가, 그야말로 2만 종 이상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이는 물처럼 흐르고 변할 수 있다. 그 이어짐을 솔라구렌은 편집에 반영한다. 영화 결말에서 식구들은 사진 촬영 도중 실종된 루시아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식구들은 루시아라고 작명한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남근을 달고 태어났기에 붙여준 이름 아이토르를 줄곧 외쳐댄다. 그 와중에 에네코와 아네가 루시아라는 이름을 교차하는데, 솔라구렌은 남성 아이토르가 아닌 고유한 젠더이자 정체성 그 자체인 루시아가 외쳐졌을 때, 그가 담긴 숏을 이어내며 찾고 싶은 존재를 비춘다. 그렇게 원하는 이름과 정체성으로 훤한 낮에도 호명된 아이는 이제 더는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일어나서 아네와 인사하고, 차창 밖으로 목을 내밀며 당당하게 자신으로서 세상 속에 뛰어든다.     


이렇게 솔레구렌은 2만 종, 그 이상의 무한한 젠더와 정체성을 긍정한다. 다만 이 주제 의식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선 생물학적 성별이 남성이지만, 여기에 할당되는 남성 젠더를 거부하고 이분법적인 젠더에 해당하지 않는 정체성을 택하는 과정을 부각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루시아의 시야에선 볼 수 있는 젠더에 한계가 있다. 이분법적인 젠더를 만들어낸 결혼 제도 내에 루시아가 속해있으니, 부부 관계가 이어지는 이상 이분법적으로 고착화된 젠더만을 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남성과 여성, 각각에게만 가능한 것을 지향하고자 신체 변형을 꿈꾸면 결국 현행 젠더를 또다시 고착화한다. 이네가 충분히 진보적인 캐릭터로 설정이 되어 있고, 루시아의 각성에 큰 계기를 주는 루르드 또한 자애로운 조력자로 등장하는 만큼, 해당 등장인물들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영화의 관점을 세밀히 조정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임 사디크, <조이랜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