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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18. 2023

사임 사디크, <조이랜드>

불법으로 찾은 나의 진실

사임 사디크(Saim Sadiq), <조이랜드>(Joyland) - 불법으로 찾은 나의 진실

*짧은 글을 읽고 싶으시면 코아르 링크를, 이보다 긴 글을 읽고 싶으시면 본 글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https://www.ccoart.com/news/articleView.html?idxno=4447

과거 이슬람 사회는 기독교 사회보다 여성 인권이 높았다. 여성을 우대하던 근대 초기에는 동성애 또한 사회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역사는 이슬람 문화권이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국가 안보를 서구에 위협당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했다. 이슬람 국가들은 서구의 침략과 식민화로 풍전등화에 놓였고, 유연한 관용은 경직된 군사화로 퇴보하였다. 군사화 과정에서 남성성을 숭상하며 가부장제를 강화하였기에 자연스레 여성성은 격하되었다. 이에 여성은 사회적으로 설 자리를 잃었으며, 동성인 남성은 무찔러야 할 적이거나 전우였지 결코 연인이 될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서구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슬람 사회는 남과 여에게 오직 하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부여하는데, 이는 인도와의 국경 분쟁 속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파키스탄에서 극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임 사디크는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성 지향성을 <조이랜드>에서 탐구한다.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이슬람 사회는 사람들을 어떻게 옥죄고 있으며, 이런 와중에 타자들은 사회에 어떤 균열을 일으킬까?      


1991년 라호르 태생의 사임 사디크는 파키스탄의 영화감독이다. 보수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획일화된 종교성에 반감을 느낀 그는 반항적이고도 자유로운 영화를 연출한다. 자국의 라호르 대학교에서는 인류학을 전공했으나, 이후 콜롬비아 대학교로 유학을 가서 영화를 전공한 그는 뉴욕에서 다수의 단편을 찍었고, 이후 본 장편 데뷔작 <조이랜드>의 원류가 되는 단편 <달링>을 파키스탄에서 연출한다. 

일단 뉴욕에서의 두 단편, <굿모닝>과 <나이스 토킹 투 유>에서 그는 ‘언어’를 탐구한다. <굿모닝>에서는 약을 복용하고 싶지 않은 숏컷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잡지에 여성 모델의 얼굴을 모조리 지운다. 긴 머리카락, 속옷 등 ‘여성성’만 남긴다. 이렇게 여성성만 남기는 사회에서 숏컷의 여인은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로 강제 전락한 것이랴, 본래의 그녀는 지워진 채. 이윽고 더는 그녀에게 약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의 얼굴을 따라 하며 손가락을 맞대는 등 타인의 다름을 수용한다. <나이스 토킹 투 유>에서는 청각장애인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를 청각장애인으로 오인한 올리, 자이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에게 영 익숙지 않은 수어를 사용할 때, 이들은 더 적절한 단어, 표현을 신중하게 선택하며, 세밀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를 이해했다. 그러나 서로가 청각장애인이 아님을 확인하고 익숙하게 사용하는 영어로 대화를 재개하자,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거나 이해해서 오해를 빚는다. 수어는 마땅히 그렇지 않기에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반면, 영어는 마땅하기에 접근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자이브는 뉴욕에 잠시 머무는 레바논 출신의 여성으로, 아랍어로 어머니와 대화하는 그녀는 어머니의 중매결혼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이들은 일반적인 언어, 문화, 관습을 따라야 하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잊히는 세계로 돌아간다. 본 단편들에서 사디크는 무성 영화의 감수성을 연출에 반영하며, 언어나 라벨링에 의해 감춰진 본연의 존재 회복을 촉구한다. 

이후 파키스탄에서 연출한 <달링>은 <나이스 토킹 투 유>에서 간략히 드러났던 이슬람 문화권의 젠더 문제가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데, <조이랜드>에서 비바를 연기하는 알리나 칸이 <달링>에서는 알리나로 등장하고, 그녀는 댄서를 꿈꾸는 트랜스젠더다. 남성이었다가 여성으로 성을 전환하고, 여성성을 모방하는 알리나,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남성으로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여성이 된 이후에는 남성에 의해 '승인'되어야만 하는 수동성을 경험한다. 또 알리나가 모방하는 여성성은 '댄서' 여성으로, 댄서는 남성에게 거대한 환상을 불어넣는 팜므파탈으로, 남성의 검열을 통과한 여성만이 '거대한 패널'로 등장할 수 있다. 승인되지 못한 알리나는 여성 댄서의 백댄서로 전락하며, 알리나를 흠모하는 샤니 또한, 동료 남성들이 그와 알리나의 관계를 규정하고 평가함에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다. 이렇듯 개인이 여성임을 지향하더라도 사회에 의해 정체성이 불발되는 폐쇄적인 파키스탄 사회를 드러낸다. 이러한 폐쇄성의 원인은 '유럽 스타일'에 대한 반감, 즉 서구와의 악연이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과연 <조이랜드>에서 파키스탄의 사회와 젠더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이러한 폐쇄성은 <조이랜드>의 형식으로 이어진다. 사디크는 파키스탄 사회를 ‘4:3 화면비’ 안에 담는다. 4:3 화면비는 영화의 보편적인 몇몇 화면비(1.88:1, 2.39:1)와 비교해서 양 옆이 가장 좁아 폐쇄적이다. 이 숨 막히는 화면비에 공간 또한 출구 없이 갑갑하게 담아내고, 여기에 개개인의 얼굴을 프레임 가득 클로즈업한다. 이렇게 담겨진 영화의 주인공 하이더르(알리 준조)는 마음이 유약한 남자다. 가부장적인 이슬람 사회는 영화 속 살림(소하일 사미르)이나 아버지(살만 파르자다)처럼 남성이 경제권을 쥐고 식구들을 강하게 호령하라고 주문하지만, 하이더르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뭄타즈(라스티 파루프)에게 결혼 이후에도 커리어를 이어 나가도 좋다며 청혼할 정도다. 그러나 결혼 이후 아버지는 하이더르의 취업을 닦달하고 뭄타즈를 전업주부로 주저앉힌다. 둘은 ‘가장 남성’ 및 ‘전업주부 여성’이라는 성 역할에서 달아날 수 없고, 좁은 화면을 빽빽이 채우는 클로즈업의 미감이 이를 가시화한다. 젠더를 수행하는 얼굴 외의 것은 프레임에 담길 수 없고, 좁다란 화면비에 사실상 ‘가둬진다.’ 영화 초반부의 염소가 프레임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한 채, 도축 및 촬영이라는 목적으로 붙잡히듯, 하이더르도 아버지가 부여한 남성성이라는 프레임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4:3 화면비, 클로즈업에 더해 카메라까지 ‘고정’된다. 물론 항상 카메라가 정박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성 관행이나 역할을 강요받을 때 영화의 카메라는 대체로 멈춘다. 젠더는 내가 원하는 내재성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요하는 규범이기에, 이로써 젠더를 수행하는 나는 외부에 종속되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뭄타즈가 화장실에서 임신, 곧 가부장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조카들이 시끄럽게 보채며 빨리 나오라 닦달하듯, 타인을 위한 나로 전락한다.      


사회가 개인에게 주문하는 젠더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이더르는 남근이 항문에 박히기를 원하고 사회가 여성성이라 규정한 성정을 갖추고 태어난 남성으로서, 즉 그의 정체성은 양성구유적이다. 그러나 사회는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와 사회문화적 성별인 젠더의 일치를 강요한다. 한 몸에 남성성과 여성성 둘 다 지닐 수 없고, 둘 중 하나는 타자화되어야 하기에 하이더르는 괴로워한다. 만약 둘 다 지닌다면 무용단의 남성 백댄서들이 하이더르를 괴롭히는 것처럼 끔찍한 처우가 뒤따른다. 

이렇게 젠더는 남녀 모두를 구속하지만, 이 중에서도 가부장제에 속한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극심한 답답함을 느낀다. 사회가 규정한 남성 젠더는 일을 하기 위해 바깥을 나도는 것이 허용되고, 심지어 야외 자위행위까지 눈감아주기에, 살림은 집을 자주 비우고 하이더르는 산책을 나가 비바를 만난다. 남성들의 배경에는 항상 출구나 틈이 있다. 반면 여성에게는 출구가 허용되지 않고, 사방이 꽉 가로막힌 집만 허용된다. 누치와 뭄타즈가 선풍기를 가지고 내려올 때 그녀들이 갇힌 좁은 집의 폐쇄성이 도드라진다. 살림은 누치가 딸을 낳았음을 확인하고 자유롭게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지만, 딸을 낳고 실망한 누치는 프레임 내에서 흡사 죄인처럼 무표정하게 널브러진다. 이러한 집이나 폐쇄적인 프레임에서 여성은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다. 침실은 조카들이 접수했고, 화장실조차 살림이 감시하니 말이다. 이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짐을 싸는 뭄타즈지만 여성이 도망칠 곳,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성의 외출이나 특정 공간 방문엔 남성의 승인이 필요하기에, 몰래 빠져나와도 결국 돌아가야 한다. 여성에게 가능한 선택은 노예로서 버티느냐, 아니면 죽느냐 오직 둘 뿐이다.     


사회는 남성에겐 여성성을, 반대로 여성에겐 남성성을 적대시하게 만들지만, 양성구유적 성질을 천성으로 지니고 태어난 인간에게 타자화는 곧 ‘자기 부정’이다. 사디크는 타자화 이전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줌인'으로 가시화한다. 뭄타즈는 거울을 보고 화장하며 출근 준비를 한다. 그 옆에서 하이더르도 함께 거울을 보고 머리를 단장한다. 부부는 사회가 각 젠더에게 허용하지 않은 여성의 노동, 남성의 치장을 열망한다. 그 모습을 줌인한다. 앞서 언급한 클로즈업은 빠져나갈 수 없는 맥락에서 사용되어 폐쇄적인 의미가 짙었다. 이와 달리 줌인은 자신의 욕구를 확인하는 맥락에 위치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정체성에서 멀어져 비로소 자아에 다가서는 느낌을 준다. 줌인 외에 하이더르가 비바를 쳐다볼 때의 클로즈업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자아를 찾아가는 이들은 ‘거울’을 본다. 누치는 꽉 끼는 옷을 선호하지만, 뭄타즈는 헐렁한 옷을 좋아한다. 사회활동에 불편한 의상 대신, 뭄타즈가 일하기 편한 의상을 거울이 '객관적으로 반영한다.' 즉 나 자신의 솔직한 정체성엔 가까워야 하고, 왜곡 없이 정확하게 비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인물들은 자아를 줄곧 잃어버리기에, 사디크는 ‘술래잡기’라는 상징을 반복 사용한다. 하이더르가 조카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 그는 흰 천을 뒤집어쓴다. 그의 성별이나 나이 등이 모조리 말소된 술래잡기 현장은 ‘줌아웃’된다. 그는 자신의 본래 모습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렇게 멀어진 자신을 찾아 헤맨다. 또 특정한 젠더가 뒤따라오는 자신의 생물학적 성별을 은폐하였기에, 젠더에 구애받지 않고 아이처럼 뛰어노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랴. 이후 뭄타즈가 술래잡기를 할 때, 아버지는 축사로 비로소 뭄타즈가 가문의 저주를 이겨내고 아들을 가졌다며 칭송한다. 그러나 그녀는 가문의 아들을 낳기 위해 희생하는 여성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뱃속의 태아는 잊어버리고 어린 아이처럼 뛰어논다. 그렇게 숨바꼭질하는 그녀는 누구를 찾는 것일까, 아마도 전업주부이자 어머니로 전락하며 잃어버린 맹랑한 그녀 자신일 것이다. 일을 할 수 있는 여성, 자위를 하는 여성을 말이다. 이렇게 조카들과 뛰어놀거나, 하이더르가 춤을 추고 비바와 에로틱한 관계를 맺는 장면에서 영화의 카메라는 ‘달리 숏’으로 움직이고, 생동감 넘치게 박동하고 뛰어다니는 ‘핸드 헬드’가 동반된다. 핸드 헬드는 카메라를 쥐고 있는 촬영자의 육체를 환기한다. 인간을 은폐하는 기계적인 스테디캠이나 덩그러니 멈춰선 카메라에 비해 인간의 감각이 느껴지는 형식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맹목적으로 제 육체를 따라 움직일 때 이들은 핸드헬드로 포착되는 것이다.    

  

또 영화에선 두 차례의 정전이 발생한다. 한 번은 뭄타즈가 일할 때, 다른 한 번은 비바가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갑자기 어두워진다. 이로써 일하는 여성, 무대에 오른 트랜스젠더 여성은 보일 수 없게 된다. 정전뿐만 아니라, 비바가 공연을 하려 할 때 음향 사고가 발생한달지, 세트장 준비가 안 되는 등, 직장의 상급자들은 여성의 노동 및 남성 하이더르가 여성 비바에게 임금을 받는 관계를 승인하지 않는다. 이는 집안의 우두머리 아버지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 또한 아들이 가져온 비바의 간판이 부끄러운 듯 천으로 숨기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빛을 비춰 자신을 드러낸다. 뭄타즈는 불이 꺼졌을 때 동료들의 손전등을 빌려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한다. 비바를 돕는 하이더르 역시 관객들에게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달라고 요구하여 무대를 비추고 공연을 성공적으로 재개한다. 이때 영화의 카메라는 처음으로 현란하고도 유려하게 변한다. 이렇게 정전을 극복하는 과정이 어린 아이의 태도와 같다. 직접적으로는 장난감 총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형형색색의 레이저를 발사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의 발광은 어린 아이의 천진함과 순수한 자유로의 되돌아감이다. 

이러한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그러나 국가, 그것을 구성하는 가장들은 모두를 위한 생산을 바라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이 일을 하지 못할 때 경제력을 보충하는 ‘도구’에 그치고, 대체론 휠체어를 타고 용변실수를 하는 가장 뒤치다꺼리를 맡아야 한다. 즉 소수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공공의 이익을 괄시한다. 그 소수의 이익조차 부조리하다. 일을 할 수 있는 여성이 강제로 일을 그만두게 되고, 그 자리를 남성이 갈취한다. 염소 도축은 뭄타즈가 하지만 정작 하이더르의 공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또 휠체어를 타거나 용변 실수를 하는 유약한 남성은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높은 고지에 서며, 오히려 그의 뒤치다꺼리를 멀쩡하게 해줄 수 있는 옆집 미망인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에게 의존하며 생존을 위해 열등성을 수긍한다. 뭄타즈가 전업주부로 눌러앉고 하이더르가 일할 수 있도록 배려 아닌 배려를 해준 이유도 그가 '에어컨'을 사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즉 여성에게 불리하도록 조작된 경제에 의해 여성은 결혼을 할 수밖에 없고, 또 남성의 특권을 영영 남겨두고자 에어컨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규칙을 만들어내는 직장의 상사, 가장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는 '불법'이다. 이에 어둠 속에 숨은 것을 찾거나 발광하는 행위는 불완전하고 간헐적이다. 하이더르는 일하는 내막이 아버지에게 탄로 나면 명예를 실추했기 때문에 험한 꼴을 당할 거라 벌벌 떤다. 그러한 법이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비바는 남성과 여성 어느 좌석에도 앉지 못하고, 뱃속의 남아를 지키지 못하고 음독자살한 뭄타즈는 죽어서까지 모욕을 당한다. 즉 법을 따르면 생존하거나 머물 수 있는 반면, 법을 어기면 그 어디에도 머물 수 없게 배태되거나 처벌당한다. 이에 사디크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숏이라 말할 수 있는, 흐르는 염소 피 위에 저 하늘의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숏을 만들어낸다. 죽어야만 비행할 수 있는 삶, 죽음 속에서 날아다니는 삶, 그것이 사회에서 핍박받는 타자들의 운명이다.      


이로써 다수의 인류는 공허하여, 영화에선 헤드룸이 크게 벌어진다. 미망인은 절박하다. 분명 여성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있지만, 외로워서 하이더르의 아버지와 외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미망인의 아들은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며 어미를 비난하고 다시는 하이더르의 집에 발을 붙이지 말라며 엄포를 놓는다. 또 그 전날 밤 하이더르는 비바와 밀회를 즐겼고, 뭄타즈는 살림에게 자위를 들켰으나, 그 모든 사실은 은폐된다. 그래서 진실은 소외되고, 이렇게 비워진 빈자리를 무의미한 공허와 어색한 거짓이 가득 채운다. 

이에 부부는 교차편집으로 이어진다. 영화로는 이어지되, 영화 내에서는 이어지지 않는다. 부부의 교차편집은 ‘매치 컷’으로, 즉 서로의 행동이 닮아있다. 정전 발생, 술래잡기, 하이더르가 패널을 옮기고 뭄타즈가 누치와 선풍기를 옮기는 행위 등이 유사하다. 그러나 하이더르가 능동적으로 원해서 옮기는 것을, 뭄타즈는 전업주부로 주저앉혀져서 억지로 옮겨야 한다. 또 서로는 자유롭고자 하는 마음이 닮아 있지만, 이는 각자 멀리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이더르가 뭄타즈를 속이고 집을 나서서 비바를 만나야 솔직하다.  

    

이런 타자들은 해방되어야 한다. 사디크는 자유롭기 위한 개인의 ‘태도’와 타자가 위치한 ‘공간’을 탐구하며, 자유를 위한 여건을 고찰한다. 영화 속 자유를 두고 타협하지 않는 존재는 비바다. 그녀의 생물학적인 성별은 남성이지만, 선천적인 불가항력을 마다하고 여성으로 능동적으로 성을 전환한다. 그 과정에서 피를 철철 흘리더라도 투쟁을 마다하지 않고, 치장이 가능하고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여성 젠더를 열망한다. 물론 여성 젠더를 모방하는 과정에서 남성에게 여성성을 검열당하고, 또 경제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기존 여성 젠더의 한계와 부조리 역시 닮아야 한다. 비바가 위치한 무대는 남성적인 공간이다. 남성은 출입이 자유롭지만, 여성은 남성과 동행하거나, 눈만 덩그러니 보이는 '니캅'을 입어야만 관객이 될 수 있다. 무대 위의 여성 또한 남성에 의해 승인되기는 매한가지로, 그들의 시선이 여성 여부를 판가름하고, 이들의 환호성은 여성의 수익을 보장한다. 여성 젠더를 선택한 비바는 남성으로서 누렸던 주체성이 있기에, 이러한 상황이 영 불편하다.

그러나 여성 젠더의 수동성을 원치 않는 비바는 능동적인 남성 젠더의 특징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성 백댄서들을 고용하여 지시한다. 또 남근을 남겨 놓으라는 하이더르, 곧 맨스플레인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성기를 제거할 것이라 말한다. 즉 비바는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 갖고 태어난 인류의 진실을 보여주지만, 사회에 의해서 남성성을 타자화하고 여성성만 인위적으로 모방해야 하는 그녀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는 여성의 진실을 더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사회가 금기시한 젠더를 선망하면서도, 사회가 규정해놓은 젠더의 특성에 갇히지 않고, 자신이 지향하는 고유한 젠더를 몸소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젠더를 공간이 좌우한다. 옥상에서 하이더르는 춤추고, 또 뭄타즈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터놓는다. 옥상은 지상과 비교해서 하늘과 가깝다. 또 천장으로 막혀있지 않아 탁 트여있다. 특히 하이더르가 옥상에서 춤출 때는 감각적인 핸드헬드도 동반되어 활력이 넘친다. 이와 동시에 옥상에서 대화하는 부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고정되고, 패널을 잠시 옥상에 올려두니 이웃이 명예를 운운하며 간섭한다. 즉 옥상은 하늘, 곧 이상과 맞닿아있지만, 그 이데아는 종교적 이데아라서 갑갑할 수도 있다. 결국 하이더르, 뭄타즈 자신들의 이데아에 다가가지 못한 부부는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 채, 뭄타즈의 생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렇게 높은 공간에서 한없이 낮은 '지하철'로 추락한다. 오히려 인간이 감히 손대지 못하는 종교적 이데아에 맞닿아있는 옥상에서 검열은 극심했다. 그러나 종교적 이데아에서 멀어진 지하철, 정전이 발생한 어두운 공간에서 이들은 되레 부조리를 극복한다. 지하철의 여성 좌석에 앉은 비바를 두고 한 노인이 남성 좌석으로 가라며 훈계한다. 그러나 하이더르는 비바 옆에 살포시 앉아주며 문제를 극복한다.

또한 영화 속 합법적인 공간이 결혼한 부부의 침실이라면, 불법적인 공간은 비바 및 트랜스젠더들이 모인 숙소다. 비바는 아주 으슥한, 외부인의 시선이 들지 않는 은밀한 아지트에 거주한다. 동료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건대, 더더욱 그들은 눈에 띄지 않은 곳에 숨어야 할 것이다. 공인되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의 아지트와 달리, 뭄타즈와 하이더르의 관계는 국가 및 가족들에게 합법적으로 승인된 관계, 이로써 탁 트인 시야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관계뿐만 아니라 그들이 머무는 집 또한 규정하는데, 그래서 갑갑한 것이다. 뭄타즈는 화장실에 숨겨놓은 약물을 마시려는데, 갑자기 하이더르가 들어온다. 줌아웃으로 멀어진다. 이렇게 합법적인 공간은 아무리 사적인 집이라 한들, 타인에게 승인받아야 하는 나머지 정작 자신이 소외된다. 반면 외부인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비바의 집에선 조명이 개인을 훤히 밝힌다. 어둠 속에 자꾸만 숨어야 하는 뭄타즈와 정 반대로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다. 즉 집에서만이라도 감시, 곧 법이 미치지 않아야 한다. 법이 미치지 않을 때, 비로소 비바와 하이더르는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을 되찾는다.

그러나 놀이공원에 간 여성들이 비바의 집에서처럼 조명을 받고 즐기는 것을 두고 '죄악'이라 말하듯, 파키스탄에서 제게 솔직하면 처벌을 당한다. 솔직함은 오직 아이들, 그리고 실현되지 않은 약속만 존재하는 '플래시백'에서나 가능하다. 약속을 할 당시에는 솔직할 수 있었으나, 정작 그것을 실현할 현재나 미래엔 어른들을 법이 구속하여 약속은 거짓이 된다. 그러나 사디크는 결말에서 모든 옷을 벗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하이더르를 줌아웃한다. 멀어지면서 롱숏, 익스트림 롱숏으로 확대된다. 4:3 화면비의 갑갑함을 잊으리만큼 광대한 풍경, 거기서 무엇이든 입혀질 수 있는 나체의 하이더르는 검열을 피해 '잘 보이지 않고', 대신 변형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액체가 들어찬다. 사디크가 파키스탄에 바라는 것이 내게의 줌인, 반면 검열로부터의 줌아웃, 이를 가능케 할 바다와 같은 법인 것이다. 이렇게 사디크는 파키스탄의 상황을 형식과 감각적인 촬영, 매혹적인 미장센으로 가시화한다. 특히 염소의 피에 창공의 까마귀가 비친 숏은 감히 잊을 수 없다. 이로써 문자 그대로의 탐미주의가 아니라, 진실을 비추기 위한 탐미주의를 지향하며 자유에 헌사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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