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보단 보고 듣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전시를 감상하는가? 전시장을 가득 수놓은 미술작품들은 대개 현란한 감각을 뽐낸다.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낯설고 생경한 감각이 감상자를 짜릿하게 만든다. 또 전시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다른 시간대, 고대 유물을 모아놓은 전시, 특정 사조의 작품을 모아놓은 전시 등 관람객이 살아본 적 없는 시대의 문화를 간접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전시장에서 펼쳐진다. 또 다른 공간을 매개한다. 바다 너머의 대륙, 국가, 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는 인류의 삶이 다양하게 꽃피울 수 있음을 증명한다. 설령 같은 시대나 문화권의 작가, 심지어 나와 아주 유사한 친구의 전시라고 하여도, 나의 유한함을 환기하는 무한의 '혼돈'을 경험시켜준다. 내가 몰랐던 대상의 요동치는 내면, 복잡한 영혼의 맛이 매개되기 때문이다. 질서를 벗어나야지만 느껴볼 수 있는 이 혼돈 속에 자유, 생경한 감각, 기존의 앎을 뛰어넘는 인지적 가치가 가득하다. 켈리 레이카트가 신작 <쇼잉 업>에서 보여주려 하는 것도 이러한 혼돈이다.
1964년 플로리다 마이애미 태생의 켈리 레이카트는 미국 독립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1990년대에 데뷔한 그녀는 당대에 함께 활동한 시네아스트들 중 몇 안 되는 ‘여성 영화감독’으로서, 그간 남성 영화감독들의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부드럽고도 세밀한 필치로, 남성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삶을 비춘다. 그것은 바로 ‘관계’다. 자본주의가 짓밟는 인간 사이의 우정, 종을 초월한 우애 등이 레이카트가 카메라로써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은 개인의 위업을 강조하며 동등한 관계 대신 수직적 관계를 중시하는 가부장적 영화와 큰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으로 <믹의 지름길>과 <퍼스트 카우>에서 서부 개척 시기 원주민의 언어를 부각하며 인종 간 동등한 소통, 대안적 우정을 제안하고 야만의 시대를 반성한다. 레이카트는 매 작품에서 반복하는 기법, ‘렌즈 플레어’로 풍성하고도 황홀하게 확장되는 관계망을 예찬한다.
하지만 인간의 관계는 불안정하다. <어떤 여자들>은 총 네 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옴니버스 극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서로는 각자의 세계에 느슨하고도 간접적으로 침투하며, 아주 얇은 선이 끊길 듯 말듯 관계를 잇는다. 미약한 끈은 결국에는 끊겨 서로 다른 방에 놓이거나 벽이나 창으로 분리된달지, 또 서로를 등지거나 내가 바라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발화를 쏟아내기 일쑤다. 그래서 레이카트의 작품 속 대화는 ‘독백’에 가깝다. 수용하는 이는 없고 말하는 이만 가득하다. 독단적이거나 고집스럽게 발화를 쏟아내는 이는 인질극이나 테러를 벌인다. 한편 대화가 전무하여 지나치게 고요하거나 조심스러운 경우, 서로의 속내가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단절된다. 결국 해답은 대화지만 이상적인 대화가 쉽지 않은 개인은 대체로 외롭다. 만났다가 각자의 삶을 위해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하는 서로는 사무치게 쓸쓸하다. 더욱이 레이카트는 돈, 노동이 사람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미국의 세태를 비판한다. <어떤 여자들>에서 우정의 시작과 끝을 모두 노동이 결정한다. <웬디와 루시> 속 반려견과의 이별도 돈에 의해서다. <올드 조이>에서 황홀한 주말을 보낸 단짝은 노동의 시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퍼스트 카우>처럼 죽어서 멈춰야만 함께로 영원할 수 있다. 하지만 레이카트는 마냥 비관적이진 않게 늘 희망을 남겨둔다. '나'로 되돌아가며 각각의 단막이 끝난 <어떤 여자들>이었지만, 멀리서 기차가 다가오며 새로운 관계는 돌고 돌아 다시 찾아오리니. 이렇게 관계를 탐구하던 그녀가 예술계로 눈길을 돌린다. 또 바로 전작 <퍼스트 카우>에서 서부 시대의 초상과 정물을 아주 섬세하게 스크린에 수놓던 레이카트가 전시를 소재로 삼아 영화를 연출한다. 과연 그녀가 보여주는 전시는, 그리고 예술가는 무엇을 보여주고 표현할까?
리지라는 이름의 예술가는 창작과 전시에 애를 먹고 있다. 예술의 대표적인 두 역할은 유한한 피조물들을 반영구적으로 붙잡고 보존하는 '모방론', 예술을 통해 작가와 감상자가 교류 및 소통하는 '표현주의'다. 리지에겐 바로 이 두 관점 모두 다 어렵다. 그 이유는 작품에 영감을 제공하는 모델, 전시에 방문한 감상자, 곧 타인과의 '대화'가 리지에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터 레이카트는 '불통'을 부각한다. 리지는 아빠 '빌'하고도 대화가 쉽지 않다. 상대한테 말은 하고 있지만, 서로의 발화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빌은 리지가 보낸 전시 초대장에 관심이 없고, 리지 또한 빌의 방탕한 생활이 영 마음에 들지 않고 걱정된다. 고집 센 둘은 상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리지는 집주인이자 예술적 동지, ‘조’와의 소통 역시 원활하지 않다. 리지는 조가 고장 난 온수기를 하루빨리 교체해주지 않는 것이, 이로써 집에서 샤워를 못하는 상황이 짜증난다. 그래서 리지는 조에게 보채지만, 정작 조는 '타이어로 그네'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며, 이를 리지에게 밀어달라고 부탁한다. 리지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조에게 빈정이 상해, 마찬가지로 조의 부탁을 무시하고 자리를 뜬다.
불통, 이에 따른 '고립'을 레이카트는 프레임 구성에 반영한다. 리지가 근무하는 예술 아카데미에서 에릭은 가까이서 눈을 맞대고 타인과 대화하며, 또 상대방이 혼자서 당기기 어려운 등의 '지퍼'를 올려준다. 이렇게 대화는 아주 사소할지언정 서로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데, 이때 프레임엔 ‘나’와 ‘상대방의 일부’가 공존한다. 또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에릭과 상대방은 클로즈업된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임에 그만큼 나는 상대에게 긍정되었고, 그렇게 상대에게 존중받는 나 자신은 온전해진다. 외에도 예술 아카데미에서 대화할 땐 항상 프레임 안에 다수가 북적거린다.
그러나 영화 초반에 늘 불통하는 리지는 프레임을 홀로 차지한다. 상대방이 리지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면, 리지는 그 프레임에서 이탈하며 대화를 거부한다. 또 그녀는 가까이서 포착되지 않는다.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항상 소외되고 멀리 있는 '풀숏' 수준으로 포착된다. 리지와 조, 서로간의 거리는 까마득하게 멀다. 전신이 온전히 보존된다는 관점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풀숏, 그러나 본 작품에서는 '필름'을 연상케 하는 혼탁하고도 흐린 '화질' 때문에 풀숏으로 사람을 포착하면 잘 보이지 않는다. 즉 대화하지 못하는 리지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또 불통에 의해 상대방이 지지직, 거칠고 모호하게만 보일 뿐이다. 수용되지 못한 '다름'은 <쇼잉 업>의 거칠고 혼탁한 질감처럼 밝혀지지 않은 혼돈에 빠져 있다.
레이카트는 불통의 이유를 다각도에서 탐구한다. 이유는 세 갈래 정도로 나뉜다. '다른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의 본능, 자기만의 '표상'에 중독된 예술가의 특성, 그리고 '젠더'에 의해서다. 다른 것을 배척하는 사람의 본능은 '자신의 기준'을 최우선으로 삼고, 타인을 이해하기보단 '나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앞선 불통의 사례들에서 나타난다. 레이카트는 이를 형식으로 감상자가 체감하게 만드는데, 바로 영화 속 예술가들의 작업을 비추는 '줌인'을 이용한다. 도입부, 리지의 조각 착수에 앞서 카메라가 그녀가 그려놓은 '도안'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도안을 꽤 길게 검토한다. 이후 다른 도안으로 이동할 때면 카메라의 균질하지 못한, 삐걱거리고 어설픈 '줌인'이 눈에 띈다. 리지의 작품뿐만이 아니다. 조가 전시를 준비하는 '작업실'의 외관을 로우 앵글로 올려다볼 때도 줌인은 뻣뻣하고 투박하다. 눈에 띄는 것은 동공에 담기는 '시각'이 아니라, 카메라에 상응하는 '동공'의 ‘불안한 떨림’이다. 왜 동공은 타인의 작업을 마주할 때 떨리는가? 내가 틀렸다고 질책할지도 모르는 타인의 판단 기준과 철학이 불안한 것인가, 더욱이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이나 예술관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자아 상실과 소외가 파르르 떨리는 줌인에 반영되는가?
그 불안이 예술가의 특성과 결합한다. 영화 속 리지는 '완고한 예술가'의 전형이다. 그녀는 항상 외부 객관적인 세계와 동떨어진 자기만의 '집', '작업실', '사무실'에서 주관적인 '표상'을 조각하는데 몰두한다. 그래서 그녀는 타인에 의해 불통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관적인 표상을 보전하기 위해서 본인이 고독을 자처하는데, 레이카트는 이 또한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외부를 활발히 누비고, 또 타인과 대화하기 좋아하는 인물들은 능수능란한 '트래킹 숏'에 담긴다. 조가 '타이어를 굴릴 때', 동네의 소년들이 '보드'를 타고 놀 때 그렇다. 그런데 이 와중에 리지는 항상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다. 트래킹 숏에 담긴 인물들이 드넓은 외부 세계에 자신을 퐁당 빠트리며 확장한다면, 리지는 확장을 멈추고 우두커니 멈춰서 자신의 주관적인 표상, 곧 예술 세계를 보충할 질료만 수집한다. 또 리지가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들은 완고하게 멈춰 있다. 그러나 리지가 보지 못하는, 그녀 뒤편의 세상을 레이카트는 트래킹 숏으로 포착한다. 작업실의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비둘기' 등 외부 세계는 변화로 가득하다. 그 변화를 자신의 표상을 이데아로 삼는 예술가는 거부하고 멈춘다.
예술가의 완고한 특성은 영화 내내 거의 변하지 않는, 미셸 윌리엄스의 섬세한 연기가 한 몫 보탠다. 분명 영화가 진척되어가며 리지는 점차 대화를 재개하고 이로써 개방적으로 변해가지만, 윌리엄스는 그 와중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외부 세계에 반하여 자신만의 진선미를 탐색하고, 이로 지탱되는 표상을 창조하는 예술가는 고집스럽다. 대화를 재개하며 외부 세계에 참여하더라도 자신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윌리엄스는 약소한 시니컬함과 짜증을 동반한 예술가의 민감한 감수성, 이로써 자신만의 표상을 완고하게 지켜내려는 예술가의 심리를 섬세히 표현한다. 그렇게 외부를 의심하고 적대시하면서 예술가는 자신의 이데아를 지킨다. 그래서 불통을 자처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젠더다. 젠더에 따른 특성은 이분법으로 확연하게 나뉘지 않는다. 그것이 레이카트의 특징이기도 하다. <올드 조이>나 <퍼스트 카우>에서 ‘여성적인 남자’들을 다루기도 했었고, 또 <믹의 지름길>에서 남녀의 의견이 두 갈래로 딱 갈리지 않았던 것처럼, 본 작품에서도 보편적인 젠더를 따라 확연하게 나뉘진 않지만, '대체로' 젠더가 대화의 가능/불가능을 결정한다. 크레이그나 에릭을 제외하면 남성과는 대화가 쉽지 않다. 비둘기를 향해 '비비탄'을 쏘며 장난을 치거나, 딸의 전시회보다는 젊은 여성과 사귀고 싶은 '슈가 대디'로서 사심만 관심이 있는 빌, '음모론'에 빠져 외부 세계가 아닌 자신만의 '땅굴'에 처박힌 션처럼 말이다. 션은 리지가 방문해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기는커녕 자신이 먹어야 할 음식이나 계획에 집착하고, 리지의 전시에서 드러나는 빌의 독단과 이기적인 여성 편력이야 말로 진과 왜 이혼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반면 여성은 상대를 품고 대화한다. 조는 리키에 의해 다친 비둘기를 마다하지 못하고, 리지 또한 처음에는 비둘기를 내쫓았지만 계속 마음이 쓰여, 오히려 조에게 잘 보살피라고 닦달한다. 도로시는 항상 리지에게 포스터나 작업이 대단하고 멋지다며 말을 덧붙이고, 그녀가 계속 말을 건네자 리지 또한 대화를 재개한다. 무엇보다 관용적인 어머니상의 전형인 진은 리지를 늘 배려하고, 또 손이 많이 가는 아들 숀을 성심성의껏 챙긴다. 마지막으로 리지의 전시에 방문했던 두 소녀들은 비둘기의 회복을 세심히 읽어낸 듯 붕대를 푼다.
젠더의 차이는 두 성별이 몰두하는 각기 다른 '감각'에서 발생한다. 레이카트는 본 작품에서 '취식'을 강조한다. 취식은 행위자의 에너지와 쾌락을 위해 대상을 제물로 삼아 변형시키고 삭제하며 먹어 치운다. 영화에서는 불통하는 이들이 주로 취식에 몰두한다. 리지가 오든 말든 숀은 먹기로 마음먹은 라구 파스타를 만들고, 또 제 입이 가장 만족스럽게끔 식빵의 거칠고 뻣뻣한 가장자리를 잘라내어 속살만 파먹는다. 혀의 감각을 위해 대상을 찢어발기는 숀처럼, 리지 또한 무언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나름의 만족과 안정을 찾고자 취식한다. 전시 오프닝에서 케이터링에 치즈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케이터링이 불만족스러운 리지는 갑자기 불해진다. 그런 그녀는 음식을 우악스럽게 먹으며 마음을 달랜다. 외에도 전시에서 케이터링 음식을 축내기 바쁜 도로시와 리, 숀 또한 마찬가지요, 빌은 처음에는 리지와 대화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하다가 '와인'을 들고 그가 ‘집어삼키고’ 싶은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외에 배고파서 비둘기를 사냥한 리키, 상징적으로 리지의 '월세'나 '주차 자리'를 먹어치우고 정작 리지가 원하는 보상은 내놓지 않는 조도 그렇다. <퍼스트 카우>부터 이어지는 레이카트의 취식은 일방적으로 상대를 착취하는 측면이 부각된다.
하지만 취식 대신 ‘보고 듣는 감각’에 몰두하며 점차 달라진다. 리키가 비둘기를 포식하려고 ‘깃털’을 모조리 뜯어내던 상황과 달리, 리지가 비둘기의 호흡 소리를 성심성의껏 '듣고', 비둘기의 상태를 눈으로 '관찰'하며, 대상을 변형하지 않고 고스란히 수용한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회복할 때 비로소 서로의 발화를 있는 그대로 흡수하고 교환하는 대화가 재개된다. 집에만 갇힌 숀은 리지의 전시에 참석한다. 또 비둘기가 진정 바라는 마음을 읽어낸 듯, 갤러리 밖으로 완쾌한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항상 실내에만 머물던 리지는 자동차를 몰고 동물병원, 야외로 활동 반경을 넓힌다.
이렇게 재개된 대화는 타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 '동물'마저 이해한다. <웬디와 루시>에서의 ‘반려견’, <퍼스트 카우>에서 가축이 아니라 ‘친구로서 소’ 등 레이카트의 작품에서 부각된 인간과 동물 간 유대가 본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본래 리지는 인간 중심적, 예술가인 자기중심적 사고로 동물을 해석했다. 리지가 자는 동안 리키가 집안으로 들어온 비둘기를 공격하여 날개를 부러뜨렸다. 리지는 인간을 기준으로 삼아 리키에게 '못됐어!'라고 일갈한다. 고양이의 '본능', 그 이후 리키에게 밥을 주는 것을 생각하건대 동물의 '허기'를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또 리지는 자신만의 세계가 더렵혀지지 않게끔 비둘기를 창밖으로 버린다. 하지만 이후 리지는 조가 들여온 비둘기를 툴툴거리며 돌봐준다. 동물병원에 데려가고, 온기 유지를 위해 '보온병'과 쾌적한 '종이'를 수시로 바꾸며 리키와 격리한다. 또 예술 아카데미에는 사무실의 문지방을 가로막는 ‘거대한 흰색 대형견’이 있다. 하지만 구성원들 그 누구도 보행에 불편을 주는 반려견을 깨우거나 치우지 않고, 그저 자신이 보폭을 넓힐 뿐이다. 이렇게 언어도, 습성도, 본능도 다른 타 동물 종을 이해할 때, 리지는 홀로 놓였던 프레임을 깨고 나와 타인과 함께 부대끼는 프레임이 조금도 어렵지 않게 된다. 비둘기를 혐오하여 비비탄으로 쏴서 괴롭혔다는 남성이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한다면, 동물의 삶을 헤아리는 리지는 점차 프레임 안에 다수의 생물과 공존한다. 더욱이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리지와 조는 비둘기에 의해 가까워진다.
타 동물의 목소리를 이해하기 시작한 리지는 그보다 더 쉬운 인간의 목소리가 이젠 불쾌하지 않다. 그렇게 리지가 듣기를 선택하였을 때, 비로소 집단적 독백에 가까웠던 불통이 대화로 전환된다. 또한 리지의 작업도 진척된다. 분명 작업은 혼자서 주관적인 예술혼을 표현하는 활동이다. 하지만 레이카트는 예술이 마냥 주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객관적인 외부 대상과 대화하고 이를 주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리지의 작품 소재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후반부에 드러난다. 리지는 자신의 주변인들을 모델로 삼는다. 조 또한 조각의 모델이다. 즉 타인을 모방하는 리지의 조각은 모델을 가장 적확하게 재현하기 위해 대화를 필요로 한다. 비둘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성심성의껏 살피던 리지는 타인을 재현하기에 가장 좋은 것, 또 작품에 가장 좋은 것을 대화로써 찾는다. 리지는 조각에게 '미안해'라 말하며 조각의 원형에서 비롯한 '팔'을 조심스레 수정하며 더 나은 형태로 나아간다. 이 대화는 리지만의 의무는 아니다. 영화 중반, 화가들의 피사체가 되어줄 '나체 모델'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모델은 화가들에게 잘 '보여주고', 마찬가지로 화가들도 모델을 잘 '그려야' 한다. 그런 상호 이해, 소통이 곧 예술이다.
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레이카트는 예술 아카데미가 품고 있는 각양각색의 '매체'를 촬영한다. 예술가들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다. 그 질료 이해, 곧 재료와의 대화 또한 예술가에게 필요하다. 예술가 및 질료와의 대화가 충분치 않았던 에릭은 리지의 조각을 태워먹었다. 에릭 스스로는 괜찮은 눈치지만, 리지와 작품에겐 결코 괜찮지 않다. 즉 질료의 객관적인 성질을 이해하며 예술가는 주관성을 표현해야 한다. 또 영화에선 객관적인 외부 세계에서 질료를 끌어오는 시각 예술 뿐만 아니라 '춤' 역시 조연으로 등장한다. 춤도 대화가 필요하다. 정신이 지시하는 바를 몸이 듣고, 마찬가지로 몸이 즉흥적으로 표현하려 하는 바를 정신이 다듬으며, 몸과 정신이 대화할 때 분방하면서도 이성적으로 절제된 춤을 출 수 있다.
그렇게 대화하며 인식을 드넓게 확장하는 예술의 미덕을 레이카트는 연출로 보여준다. 고립된 리지를 고정된 카메라로 담았던 것과 다르게, 예술 아카데미의 작업실은 ‘수평적인 트래킹 숏’으로 널따랗게 포착한다. 레이카트는 프레임 바깥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를 계속 좌우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존에 보던 것을 넘어서, ‘프레임 바깥의 새로운 것’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행위가 대화이자 예술이다. 비로소 상대방의 표상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간 영화의 투박하고 불안정하던, 이로써 피사체가 아니라 주관적인 시선을 환기하던 줌인과 로우 앵글이 안정을 되찾는다. 그 상태에서 레이카트는 피사체를 '롱테이크'로 길게 조망하고, 화면 또한 보다 선명해지고 화사해진다. 입 대신 눈과 귀를 연 우리는 상대를 포용했고, 상대 또한 눈과 귀를 열어 배려 받은 나는 가까워지고 확실해진다.
다만 그 대화는 단번에 끝나지 않으니 안주할 수 없다. 비둘기를 돌보며 리지는 점차 외부 세계에 참여하고 대화에 가교를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화는 다시금 '음성사서함'으로, 즉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듣는 식으로 전락하고, 이때 조와의 관계가 틀어진다. 비로소 예술이라는 대화가 결실을 맺은 전시 역시 마찬가지로, 거기서 불통하는 사람들과의 사소한 충돌이 긴장을 촉발한다. 숀의 심정이 변화하고, 비둘기가 완쾌하는 것처럼 대상은 '과거의 대화'에 머물러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대화하여 변화하는 상대방을 인지하고, 마찬가지로 변화하는 나를 전달해야 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리즈와 조가 '멈추지 않고 묵묵히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대화는 ‘계속 가야만 하는 어딘가’다.
이렇게 레이카트는 예술이 내재한 여러 가지 '소통'의 잠재력을 고찰하며, 이를 끌어올릴 '대화'와 종을 초월한 '우정'을 부각한다. 지금까지의 작품 중 가장 일상적이고, 또 소박한 작품이다. 물론 기존까지의 작품도 문법 자체는 소박했다. 하지만 서부극을 '수정'하며 거대한 패러다임을 통째로 뒤흔들거나, '대규모 자본'을 역으로 소박하게 활용하거나, '신자유주의'라는 거대 이념의 추악한 진실을 들춰내거나, 독립된 세 명의 관계를 '교차하고 이어내는' 등 소박함 속에서의 거룩한 실험이 <쇼잉 업>에선 전무하다. 그래서 한편으로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작품이 주는 감흥 자체도 원체 평안하던 레이카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소소하다. 하지만 그 편한 감각을 결코 진부하지 않게 표현하는, 또 평범함 속에서 날카로운 위기와 빛나는 미덕을 건져내는 레이카트의 섬세한 시선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