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식민지가 된 테크놀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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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에 인류는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든 혁신 기술과 맞닥뜨렸다. 단순 통화·문자만 가능하던 피처폰의 시대에서, 한 손에 잡히는 개인용 컴퓨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스마트폰의 시대로 이행하며 인간의 삶 전체가 편리하게 격변하였다. 그러나 진보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던 것이 불가능하게 되면 왠지 모를 그리움과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법이다. 자판이 물리적으로 튀어 나와 있었고,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피처폰의 아날로그 감성이 그렇다. 그 감성을 아이폰도, 갤럭시도 아닌, 바로 블랙베리가 충족했었다. 스마트폰임에도 불구하고 피처폰과 절충한 디자인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블랙베리의 이점은 다만 노스탤지어를 잠깐 충족시켜주는데 그쳤고, 타 스마트폰과의 성능 경쟁에서 뒤처져 결국 2022년 1월 7일 완전히 단종된다. 본 블랙베리의 역사를 매트 존슨이 동명의 영화로 영상화한다.
1985년 온타리오 태생의 매트 존슨은 캐나다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국내에 소개된 <고딩감독>, <아폴로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존슨은 시뮬라크르(장 보드리야르의 개념으로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가상 이미지를 의미한다. 미술 작품에서부터 사진, 영화, 심지어 보도영상, 기사 등이 시뮬라크르에 해당한다.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행위는 ‘시뮬라시옹’이라 불리는데, 시뮬라시옹은 현실에서 가상으로만 향하지 아니하고, 가상이 현실로 모방될 수도 있다)를 모큐멘터리로 탐구한다. 장편 데뷔작, <고딩감독>에서 존슨은 절친 오웬과 영화를 찍는다. 너드인 그들은 학교에서 따돌림과 폭행을 당한다. 이런 상황이 못마땅한 매튜와 오웬은 통쾌한 복수를 ‘픽션’으로써 꿈꾼다. 그래서 이들의 사실은 어렴풋한 징후만 노출된다. 또 학교 폭력에 관한 견해를 학생들에게 질문하는 장면에서, 학생들의 답변을 들려주지 않고, 이에 무관심한 교사들이 외부에 '보여주고' 싶은 답변만 이어낸다. 즉 다큐멘터리 푸티지는 픽션, 곧 욕망을 위해 몽타주, 왜곡된다. 이로써 다큐멘터리, 곧 객관적인 기록은 불가능하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인 모큐멘터리에 위치하여, 어설픈 가상과 어렴풋한 진실이 뒤섞인다.
<아폴로 프로젝트> 또한 시뮬라시옹의 이유를 고찰하는데, 존슨과 오웬이 본래 지니고 있던 조악한 16mm 흑백 필름과 이로 인한 1.33:1의 화면비는 CIA의 지원으로 1.88:1의 컬러 필름으로 발전한다. 곧 구조의 지원이 매체의 질이 결정하는데, 지원을 받기 위해선 시뮬라크르 제작을 허가하는 상부의 취미에 부합해야 한다. 즉 특정한 이미지를 보고 싶은 욕망과 이익에서 창조는 출발하기에 존슨은 시뮬라크르의 태생과 시초가 불순하다고 본다. 존슨은 영화 내내 검열, 감시, 도청에 따라 달 착륙 영상이 조작되는 과정을 부각한다. 또 카메라를 숨기지 않으면 사람들은 카메라를 의식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다큐멘터리는 모큐멘터리 내지 픽션으로 전락한다.
존슨은 가상이 현실을 교란하는 시뮬라시옹의 ‘역 파장’ 또한 고찰한다. <고딩감독>에서 매튜와 오웬이 연출한 총기 난사는 현실이 된다. 매튜는 영화가 현실에 역으로 시뮬라시옹되는 해악을 포착한다. <아폴로 프로젝트>에서 존슨과 오웬 콤비는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0>과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나라 여행>으로 달 착륙을 연구한다. 20세기, 그들이 서있는 지대는 현실이 아니라 가상이다. 가상으로 점철된 시대에서의 ‘지식’이나 ‘정보’는 실효성이 없다. 즉 진실과 무관한 허구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시뮬라크르가 팽창하며, 시뮬라시옹 시대는 내적으로 빈곤하다.
시뮬라크르가 가상임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 세트장, 현실 등은 모두 살해, 방화된다. 이미지를 위한 질료로 현실은 착취된다. 그러나 존슨은 현실을 교란하고 유린하는 픽션, 곧 거짓 그 자체인 시뮬라크르로부터 비교적 진실을 지향하는 시뮬라크르로의 완화, <고딩감독>의 결말에 등장하는 CCTV, 곧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 <아폴로 프로젝트>에서 영화 말미까지 모큐멘터리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총격이나 차량 충돌 등을 다큐멘터리로 기록한달지, 상부의 증거 조작 및 은닉 지시를 폭로하며 현실을 위한 영화로 나아가려 노력한다.
이러한 그의 ‘허무맹랑하면서도 현실적인 연출’은 이제 블랙베리의 흥망성쇠를 영상화한다. 실제 블랙베리의 일대기를 리얼리틱한 연출로 풀어내고, 이와 동시에 왜 이런 연출이 필요한지 고민한다. 블랙베리의 태초에 ‘기술자’ 마이크(제이 바루첼)와 더그(매트 존슨)가 있었다. 그들은 오직 순수한 '기술'만 연구한다. 영화 초반, 마이크와 더그는 ‘사업가’ 짐(글렌 호워튼)과 미팅한다. 영화의 배경 1990년대에 스마트폰이라는 자신들의 비전을 설득하기 위함이다. 이후 그들과 협력하는 짐은 여러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며, 잘 '설득'하고 '포장'하는 협상의 기술을 뽐낸다. 그와 달리 마이크와 더그는 ‘화술’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발표는 허술할뿐더러,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는 그들은 기계에서 새어나오는 '소음'에만 관심이 있다. 물론 소음은 매끈한 포장지보다 더 중요한 기술의 본질일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본질이 귀 따갑다는 것이다. 중요하다만, 자꾸만 귀를 틀어막고 싶어진다.
이후 존슨은 카메라를 연구실로 옮긴다. 사무실은 효율을 내기 위해 바삐 재촉하고 채찍질한다면, 연구실은 느슨하고 태평하다. 사무실은 합리적으로 계산한 이윤을 추구한다면, 연구실에선 꿈과 미래를 공상하기에, 싫은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연구실엔 자신이 외부에 어떻게 보일지, 현실에 어떻게 참여할지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 너드들로 가득하다. 그들의 관심은 ‘사이버스페이스’에 산재한 '정보'들, 미래를 상상하는 'SF 영화', 현실이 아닌 '게임' 등 흥미진진한 유토피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몰두하는 세계는 20세기 후반에 전혀 보편화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선 난해한 것은 쉽게 설득하고, 기이한 것은 매혹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의 투자를 받아야 하지만, 너드들은 미래의 토대가 되는 ‘지금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화술은 어눌하고 표정은 얼빠져있으며 행동은 어설픈 그들을 포착하는 연출 또한 삐걱거리는 ‘크래쉬 줌’, 쉴 새 없이 흔들리는 '핸드 헬드' 등 매우 불안정하다. 흡사 '르포 영화'를 연상케 하는 본 연출은 단순히 현실감을 위해 택한 것 같지는 않다. 르포 영상에서 이런 형식이 사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동적인 현실’에서 '진실'은 우연하게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언제 엄습할지 모르는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준비되지 않은 카메라’ 또는 ‘덜 준비된 카메라’는 어쩔 수 없이 어설플 수밖에 없다. 급박하기에 어설퍼지는 르포적 양식, 존슨은 거기서 '급박함'은 제외하고 오직 '어설픔'만 남긴다. 현실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너드들의 비가시적인 속성을 형식으로 가시화하여 감상자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다. 존슨의 연출은 연구진의 속성과 일치할지언정, ‘연출하는 존슨’과 ‘존슨이 연기하는 더그’의 태도는 180도 다르다. 현실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너드들의 비가시적인 속성을 형식으로 가시화하여 감상자에게 잘 전달하는 존슨은 더그와 달리 스크린의 화술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피치를 포기하지 않는, 되레 화술에만 집념하는 또 다른 남자가 바로 짐이다. 짐 또한 사내 정치에서 밀려나 예상에 없던 결과를 맞닥뜨릴 때는 연출이 불안정해진다. 다른 사업가들과 수 싸움에서 밀릴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는 교활한 사업가들과의 관계에서나 그렇지, 짐이 너드 콤비와 협상하는 일은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빼앗는 일’만큼 아주 쉽다. 그래서 짐이 너드 콤비와 협상할 때의 카메라는 앞선 연출과 달리 아주 안정적이다. 물론 영화는 모큐멘터리로서 다큐멘터리적인 촬영인 핸드 헬드를 줄곧 유지하기에 흔들림은 약소하게 남아있지만, 그 조급한 떨림을 최대한 없애 안정적인 워킹과 줌인을 보여주며 짐이 원하는 '완전성'에 도달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짐은 하버드에서 배운 화술로 위풍당당하게 계약을 성사하나, 정작 너드 콤비와 공동 대표를 맺고 계약을 따러 갔을 때, 자신이 의기양양하게 포장하는 기술의 '알맹이'를 모른다. 그래서 짐 역시 존슨과 닮았지만 동시에 다르다. 존슨은 영화가 다루는 블랙베리의 창립과 역사를 꿰고 있기 때문, 즉 연출로써 무엇을 포장해야 하는지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슨은 영화 속 극단에 위치한 서로가 결합해야 한다고 본다. 첨단기술을 팔아야하지만 팔지 못하는 개발자들의 세계, 무언가를 파는 기술은 있지만 정작 무엇을 팔아야 할지 오리무중인 사업가의 세계는 반쪽짜리다. 각각 경제학과 IT기술이 없는 절반짜리 세계는 공동 대표를 맺기 전까지 ‘교차편집’으로 분리되어 섞이지 않는다. 마이크는 교활한 기업의 간계에 휘말려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을 뻔했고, 짐 또한 자신이 무엇으로 어떻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지 상사를 설득하지 못했으니, 각자의 세계에 참여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 비로소 하나의 시퀀스에 공존하며 사업가는 무엇을 팔아야 할지 인지하고, 기술자는 자신들의 공을 세상에 널리 알리며, 비로소 세계에 결함은 사라지고 완전에 가까워진다. 경제와 기술이 만나 각자의 단점을 보완했을 때 블랙베리는 창립했고, 그래서 초기에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존슨은 해석한다.
이 같은 블랙베리의 탄생이 모큐멘터리란 장르에 또 다른 당위성을 제공한다. 짐은 아주 아름답게 포장하는 사람이다. 그의 발화는 늘 청산유수다. 그런데 아름다운 기표가 기의와 일치하지 않거나, 기의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가 인재를 영입할 때 남발하던 ‘스톡옵션’은 사기였고, 그는 잘 포장하지만 실체를 설명하진 못한다. 그것이 곧 예술의 '형식'과 같을 지다. 형식을 위한 형식,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은 빈껍데기다. 존슨도 현실과는 분명 다른 ‘허구’로서 영화, 본인이 추구하는 ‘고유한 영상 언어’를 연출에 반영한다. 하지만 그 문법이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 그러한 미적 속성을 지녀야 하는 당위성은 카메라가 담아내는 ‘현실’에 있다. 그 현실은 마이크와 더그의 영역이다. 그들의 연구소는 솔직히 말해 쳐다보기 싫게 생겼다. 또 화법이 좋지 못한 마이크와 더그의 발표는 도무지 '촐싹'대서 내용과 별개로 신뢰가 가질 않는다. 즉 미적 속성이 결여된 현실은 시선을 끌지 못한다.
또 영화에선 블랙베리를 소개하는 오프라 윈프리 쇼 '푸티지'가 인서트되어, 영화의 전체적인 질감과 다른 신선함을 불어넣기도 하지만, 이 또한 간헐적으로 삽입되기에 특유할 뿐이다. 만약 현실에서 익히 볼 수 있는 푸티지가 반복되었더라면 우리는 그 영화를 굳이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대신 현실을 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진실엔 멀끔한 '양복'을 입혀야 한다. 존슨 역시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그 내용에 걸맞게 가시화하고 승화하는 연출을 선보이며, 그것이 거친 진실을 반영하면서도 특출한 감각을 겸비한 모큐멘터리다.
사업가/개발자의 세계, 현실/영화 등 두 차원이 결합하기 전까지 연출은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고수한다. 주차장에서 풀숲이나 전봇대, 가로등 뒤에 숨어, 등장인물의 행적을 몰래 훔쳐보는 구도가 연이어진다. 두 차원이 접목하기 전까지 ‘숨김’이 만연한 이유는 각자의 단점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너드 콤비는 분명 어설프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어수룩함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나, 어찌됐든 현재 자신들의 연구소가 어떤 위기에 봉착했는지, 기술이 어느 정도로 진척했는지 말을 아낀다. 그래서 짐은 너드 콤비가 처한 문제를 오롯이 파악하지 못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간헐적이고 제한적'으로 훔쳐본 셈이다. 너드 콤비가 바라보는 짐은 더한데, 짐은 분명 사내 경쟁에서 밀렸다. 짐은 영화 내내 계약에서 온전하게 우위에 서지 못한다. 성공과 더불어 실패도 적지 않다. 또 짐의 계약은 항상 '밀실'에서 은밀하게 진행된다. 법에 저촉되거나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드 콤비 앞에서 짐은 완전무결한 척 연기한다. 심지어 위대한 척 동료들을 마구 채찍질하고 닦달한다. 약점을 지닌 것이 인간의 필연이지만 그것을 노출하고 싶지 않은 서로는 상대 면전에서 허언, 거짓말 등 주장을 허위로 부풀리고, 그런 가운데서 진실이 무엇인지 골똘히 고민·관찰하는 ‘관음증’의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존슨은 몰래 뒤로 돌아가 ‘이면’을 본다. 그 뒤편에서 숨겨진 진실을 폭로한다. 마냥 이성적이지 않은 사업가들의 감정적인 거래, 자신들이 몰두하는 차원에선 똑똑하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는 모자라고 현실감 없는 기술자들을 비춘다. 서로가 그 결여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비난 대신 협력·보완할 때, 블랙베리는 더 큰 성공을 거둔다. 짐에게 모뎀 계약 실패와 빚진 액수를 털어놨을 때, 계약 과정에서 짐이 설명할 수 없는 기술의 원리를 마이크가 대신 설명할 때 기업은 많은 이윤을 남긴다. 그래서 존슨의 영화는 더더욱 모큐멘터리여야만 한다. 불완전한 그들이 서로 결합해야 하듯, 진실은 지녔지만 미적 형식을 지니지 못한 다큐멘터리와 이와 정반대의 속성인 픽션의 결합이 모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이 테크놀로지를 식민화하며 서로 간의 균형이 서서히 무너진다. 이로써 연출 또한 진실과 형식의 미적 조화가 아니라, 오직 '겉치레', '양복'만 남게 된다. 짐이 공동 대표가 되기 전까지, 연구원들은 근무 시간에도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서핑, 연구소의 전통 ‘영화의 밤’을 즐겼다. 그러나 짐의 입사 및 관리자 찰스(마이클 아이언사이드)의 부임 이후 사내 분위기는 엄격하게 얼어붙고 오직 노동만 강제된다. 개발자들은 돈도 중요하지만, 냉혹하게 통제하는 관리자와 상사가 싫다는 언급을 한다. 그들은 전문적인 기술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기술'만을 독촉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독촉이 아예 불필요하진 않다. 마냥 놀기만 하던 개발자들에게 짐이 '마감 기한'을 설정하자 자신의 공상을 정돈하여 미래를 재촉한다. 그렇지만 미래를 공상하며 첨단 기술에 관한 '영감'을 받아야만 기술의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를 발전시켜 도달하고자 하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해답은 경제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술을 위한 독촉이 아닌, 오직 자본을 위한 재촉만 남는다. 일순간 블랙베리는 시장 점유율 1위에 우뚝 서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파는 기술'은 발전해갈지 몰라도 '파는 내용', 곧 당위성이 저물어간다. 패드를 아예 없애서 스크린의 효율성을 증대한 '아이폰'의 탄생에 블랙베리는 정상에서 내려와 이윽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테크놀로지를 식민지로 전락시킬 때, 하나로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던 두 세계는 다시 분열되고 교차 편집이 재개된다. 하지만 영화 초반부처럼 기술/자본으로 양립된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교차편집으로 두 세계는 나뉘었지만 자본에 의해 잠식되었다는 본질은 각각 사업가/연구소를 비춘 양 시퀀스 모두 동일하다. 도입부에선 기술의 전문성을 마이크와 더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지만, 후반부엔 자본이 기술을 잠식하여 연구소의 전문성이 실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기술이 궁핍해지자 그것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 또한 몰락한다. 그간 권력을 누리던 짐은 계약을 실패하고 SEC가 들이닥쳐 체포된다. 짐의 몰락은 주차장에서 더그의 전용석이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끝끝내 마이크는 자본을 포기하고 기술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무능력해진 짐을 팽한다.
이런 와중 매트 존슨이 직접 연기하는 더그는 ‘순박하고도 순진한 기술’을 상징한다. 마이크는 돈을 벌며 짐의 멀끔한 용모를 닮아간다. 머리도 포마드로 세팅하고, 항상 깔끔한 양복 차림이며, 손목에는 반짝거리는 시계도 찼다. 사업가적인 용모로 가꿔가며 태도 또한 짐과 유사하게 변한다. 기술자들에게 자본을 위한 연구를 주문한다. 그런데 더그는 사업이 순풍을 타더라도 용모가 늘 그대로다. 헤어밴드를 차고 민소매 나시를 입으며, 마이크에 의해 미팅에 끌려가기 전까진 양복도 입지 않았다. 그는 사업이 아무리 발전해도 순진하게 기술을 추구하는 속칭 '공돌이'의 전형으로, 존슨은 기술의 희망이 오직 그에게 있다고 본다. 더그는 혜성처럼 등장한 아이폰으로 인해 블랙베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마이크와 짐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했으나 그들은 이를 거부한다. 양복이 입혀진 더그는 마이크처럼 타락하기보단 퇴사하고, 이후 블랙베리의 몰락은 가속화된다. 결말에서 짐과 결별한 마이크는 초창기의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가 블랙베리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일일이 고쳐보지만, 블랙베리의 전성기를 함께 맞았던 더그가 더는 없다. 팔만함과 동시에 전문적이고 현실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함께 연구하던 더그가 말이다. 이에 묵묵히 블랙베리를 수리하는 마이크는 '줌아웃'되고, 블랙베리의 전성기에서 카메라는 '멀어지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교훈은 블랙베리라는 개별적 사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존슨은 외의 작품에서도 연기자로 참여할 때 항상 편한 옷차림을 고수하는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소재에 잠식되지 않으려는 영화의 의지이자, 배역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존슨 본인의 고집이다. 잠식은 블랙베리의 몰락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불러오는 반면, 그 치열한 조화의 미덕은 소재와 연출이 균형을 이룬 본 작품이 몸소 증명한다. 더욱이 존슨의 인터뷰에서 '영국계 캐나다인'으로서 영미권 영화의 문법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마냥 자유롭지 못하다는 언급을 찾을 수 있는데, 그러한 압력에서 본인만의 연기와 연출 문법을 모색하며 소위 캐나다성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것이다. 나를 잃지 않고 상대와 동등하게 연합할 때 내/외부 모두 만족스러운 최선의 결과를 낳을 것이요, 반면 어느 한쪽에게 식민화될 때 보완의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두드러져 몰락의 길을 걸을지어다. 이를 모두 다 경험한 블랙베리의 역사를 매혹적으로 풀어낸다. 특히 빠르게 연결되어야 하는 '통신 기술'의 진보에 알맞은 신속하고 탄력적인 숏의 '컷과 연결'이 눈에 띈다. 다만 은밀한 것을 들여다보는 연출처럼, 블랙베리의 피상 너머를 좀 더 상세하게, 이로써 블랙베리의 역사에서 깨우칠 수 있는 요인들을 좀 더 깊게 묘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약소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