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기관에서 자주 생기는 포지션의 역설
공공기관에서 일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일이 ‘맡겨진다’는 느낌보다 ‘얹혀진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공식적인 직급은 그대로인데, 책임의 무게만 조용히 늘어나는 순간이다.
“이 건은 네가 좀 챙겨줘.”
“네가 제일 잘 아니까 맡아줘.”
그 말들은 부탁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역할 변경에 가깝다.
문제는 그 역할에 결정권이 함께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에는 종종 이름 없는 포지션이 생긴다.
팀장은 아니지만 팀장처럼 움직여야 하고,
결정권자는 아니지만 결과에 대한 설명은 대신해야 한다.
보고서에 이름은 빠지지만,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불려가는 사람.
위에서는 “왜 관리가 안 됐냐”는 말을 듣고,
아래에서는 “이건 왜 이렇게 됐냐”는 질문을 받는다.
이 역할에는 직급도, 명확한 권한도 없지만
책임만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런 구조는 주로 일을 잘해온 사람에게 생긴다.
조직은 그들을 신뢰한다기보다, 의존한다.
한 번 맡아서 잘 해낸 사람에게 일이 더 몰리고,
조율을 잘하는 사람에게 중간 역할이 고정된다.
문제는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그 사람이 가진 선택지가 점점 사라진다는 점이다.
결정할 수 없는데 책임져야 하고,
바꿀 수 없는데 설명해야 하는 자리.
그 자리는 성장의 발판이 아니라
소모의 출발점이 되기 쉽다.
공공기관에서는 특히 “권한은 위로, 책임은 아래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위험한 결정일수록 승인 단계를 늘리고,
실무 단에서는 실행만 담당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 말한다.
“현장에서 잘 관리했어야죠.”
하지만 현장은 관리할 권한이 없었다.
결정은 이미 끝난 뒤였고,
실무자는 결과만 떠안는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의심한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나.”
“내가 아직 부족해서 권한을 못 받는 건가.”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권한 없는 책임은 신뢰의 표시가 아니라,
책임의 외주일 수 있다.
이 자리에 오래 머물수록,
사람은 점점 조용해진다.
결정할 수 없으니 말할 이유가 줄고,
바꿀 수 없으니 제안할 동기가 사라진다.
결국 남는 건,
묵묵히 떠안는 능력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책임은
나를 성장시키는 책임인가,
아니면 단지 조직을 편하게 만드는 책임인가.
권한 없는 책임을 견디는 능력은
미덕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건 성실함이 아니라 자기 소모에 가깝다.
조직은 종종 말한다.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 보상할게.”
하지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그 ‘나중’은 잘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책임을 거절하는 법이 아니라,
권한을 함께 요청하는 법을.
그리고 때로는,
그 자리를 벗어나는 선택도 필요하다.
책임이 늘어날수록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함께 늘어나고 있는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일을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선택하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다음 글에서는 "이 일은 제 역할이 아닙니다를
말하는 연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