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세운다는 것

- “이건 제 역할이 아닙니다”를 말하는 연습

by 조직을 읽는 여자

공공기관에서 일하다 보면, 역할은 문서보다 먼저 흐려진다.
직무기술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실제 일은 사람에게 붙는다.


“이건 네가 좀 해줄래?”
“이 부분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처음에는 협조였다.
한 번 도와줬을 뿐인데, 어느새 그 일은 내 일이 되어 있었다.


“이건 제 역할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생각보다 말하기 어렵다.
무례하게 들릴까 봐,
협조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괜히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될까 봐.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제가 해볼게요.”
“일단 이번만요.”
그리고 그 ‘이번’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공공기관에서는 특히
역할보다 관계가 먼저 작동할 때가 많다.
업무 분장은 명확하지만,
현실에서는 “누가 하면 편한가”가 기준이 된다.


결국 일을 잘해온 사람,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
조금씩 경계 밖의 일까지 떠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누군가의 악의가 아니라 구조의 관성이다.


일은 흘러가고,
경계는 말해주지 않으면 사라진다.
경계를 세운다는 건,
선을 긋는 일이 아니다.
상대를 밀어내는 것도 아니고,
책임을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일에 가깝다.
“이건 제 역할은 아니지만,
어떻게 연결하면 좋을지는 같이 고민해볼 수 있어요.”


경계는 거절이 아니라 정의다.
내가 맡을 일과,
내가 책임지지 않을 일을 구분하는 일.
물론 말한다고 바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처음 경계를 세우면,
상대는 어색해하고
때로는 불편해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지금까지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오던 선이
처음으로 드러났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경계를 세우는 연습은
작은 문장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제 권한이 아닙니다.”
“이 업무는 공식적인 요청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건 제가 결정하기 어려운 사안입니다.”
이 말들은 방어가 아니라,
일을 제대로 굴러가게 만드는 언어다.


경계가 없는 성실함은
언젠가 지친다.
하지만 경계가 있는 성실함은
오래 간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책임지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움직일 때
일은 나를 소모시키지 않는다.
“이건 제 역할이 아닙니다.”
이 문장은 관계를 깨뜨리기 위한 말이 아니라,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한 말일지도 모른다.


공공기관에서,
그리고 어떤 조직에서든.
경계를 세우는 연습은
일을 그만두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일을 계속하기 위한 기술이다.



다음 글에서는 "몸과 일의 균형을 맞추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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