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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자A Nov 09. 2021

Prisoners of Geography

맹모삼천지교, 맹자가 딸이었어도 세 번 이사를 갔을까




‘지리의 힘’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세계사에서 각 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얼마나 이들을 속박하고, 혹은 융성하게 했는지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Prisoners of Geography(지리의 죄수들)’로 저자의 의도를 더 명확히 드러낸 반면, 자유의지를 믿는 인간의 한사람으로서는 슬픈 제목이다.


이 책에서는 험준한 산맥이 없어 번번히 침략의 대상이 되곤 했던 대한민국을 ‘경유지’로 부른다.

지리의 힘은 개인들에게도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친다.

특히 당신이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가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던 때에는 이미 딸/아들 차별이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지만

여전히 지방의 딸들은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있는 고만고만한 대학에 갈 바에야 지역 거점 국립대학으로 진학하라”는 압박이 존재했다.

‘우리 귀한 아들’이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여자 아이가 위험하게 서울에서 자취를, 이라는 말은 ‘어디 여자가 공부를’, ‘어차피 시집갈건데 쓸모없다’의 다른 말일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 살아온 곳에 정을 붙이는 것 같다.

경로 의존성이다.

한 왕궁에 특이한 관례가 있다고 치자. 정원의 특정 장소에서 경례를 하고 지나가야 하는 의식이 있었던 거다.

그곳은 딱히 특별할 게 없었는데 말이다. 누군가 의문을 갖고 들여다보니 원래 그 장소에는 경의를 표할만한 동상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병사들은 대대로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 물어보는 것, 의식을 굳이 없애려 드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주어진 경로, 가본 길을 따라가는 건 편하다. 생각 않고도 가능하다.


예전에 한 지인의 가족이 집 계단에서 사고사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지인은 그 후로도 줄곧 같은 집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괴로운 기억은 괴로운 기억이고 새 집을 알아보고 이사하는 것은 대대적인 일이다.

자녀들이 전학도 해야하고 출퇴근 경로도 달라진다. 무엇보다 돈이 든다.


그래서 나는 범죄 피해자들이 사건 후에도 이사를 가지 못하는 것이 슬프면서도 이해가 된다.




쉬이 떠나기 힘들기 때문에 상대의 위치를 아는 것은 곧 권력이 된다.

특히 약자가 강자에게 거처를 발각당하는 것은 인간사회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이 된다.

많은 여성들이 오늘도 골목에 있는 집까지 들어가지 않고 대로변에서 택시에 내린다.

사귀는 사람에게도 쉽사리 집 위치를 알려주기 겁이 나는 세상이다.


온라인에서 사는 대도시까진 말하더라도 자세한 위치는 밝히지 않는 친구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나는 자주가는 식당 등을 거명했다가 누군가 내 위치를 추리할까봐 일부러 위치를 틀리게 말하거나, 한 자리를 뜬 다음에야 그 곳에 있었다고 포스팅하는 버릇이 생겼다.


가만히 있어도 위험한 세상에서

내가 내 위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서 좋을게 없다는 판단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나는 내가 ‘지리의 힘’을 가졌거나 못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리의 죄수’라고 느낄 때가 더 많다.


소도시에서 태어나서 단 한 관의 영화 상영관에 만족해야 했고 각종 공연은 순회공연이 이웃 도시에 와야 꿈꿔볼만한 일이었다.

진학에 필요한 정보도 없다시피했고 무엇보다 다양한 롤모델이 부족했다.


작년부터 온라인 무료 튜터링을 조그맣게 하고 있다.

지역과 관계없이 무료로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안그래도 갖은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는 중요하다.


하굣길에 1시간 30분 버스를 타고 공공 도서관으로 향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책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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