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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자A Jan 17. 2022

사무실의 씨씨티비





첫 회사로 신생 독립언론사를 갔을 때, 한 동기와 피튀기는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과연 택배기사들의 휴대전화에 위치추적장치를 다는게 옳으냐 그르냐를 두고서다.

나는 사생활 침해와 인권 침해의 면에서, 또 신뢰를 바탕으로 한 효율을 저하시킨다는 점에서 반대했고

경영학을 전공한 동기는 근로하기로 한 시간동안 위치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떳떳하지 못하다는 자백이라고 고집했다.


후에 이 동기는 인권에 대한 탐사보도를 깊이 해왔기 때문에 아무래도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어제 회사에서 고객응대에 문제가 생겨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고용주가 사무실 씨씨티비를 돌려보고 문제에 대해 코멘트 하는데

나는 기함하고 말았다.

씨씨티비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도난이나 침입방지용인줄 알았지 24시간 다 녹음되고 언제든 통지없이 돌려볼수있단 사실을 몰랐다.

친구들은 인권위원회나 민사 소송을 얘기했지만 어차피 계속 다닐 회사라면 긁어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을것이다.

이런식으로 인권침해를 겪는 노동자는 얼마나 될까.

사업주라고 해서, 임금을 준다고 해서 그들의 노동시간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녹화해서 판옵티콘처럼 어느때고 원할때 감시할 권리는 그 누구도 부여받지 않았는데

어째서 효율이니 컴플레인에 대한 효과적 대응이니 핑계들로 내 머리위에 씨씨티비가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법을 알고 권리를 알면 뭐하나

현실의 모든 일을 송사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법은 해도 해도 안 될 때 집는 마지막 수단이 되곤 한다.

조선시대 노비도 대감이 없을땐 농땡이를 쳤을 것 같은데

기술은 어째 우리를 점점 노예이자 죄수로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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