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약업계의 비즈니스에 놀아나고 있었던걸까?
에릭 메이젤의 <가짜 우울>은 ‘우울증’이란 허구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현대인이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는 이 질환이 실재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서 의료계와 제약회사의 비즈니스용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반복해서 어떤 증상이 존재하는 것이 그것이 병증이나 장애라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무기력하고 살고 싶지 않고 회사에도 가고 싶지 않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침대 밖으로 나올 힘도 없으면서 하루종일 정크푸드를 먹어치우고 있다면 그에게는 그럴만한 무게의 슬픔과 불행을 불러오는 사건이 있었을 거라고 그는 추측한다.
사무실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적인 꾸지람을 연거푸 들었다거나, 실연을 당했다거나 하는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당분간은 단숨에 회복하기 힘든 슬픔과 불행에 빠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마음을 터놓을 대화와 시간이 필요하다.
무조건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을 찍고 위약보다 나은지 아닌지 논란이 있는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항우울제의 기본 작동 원리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다.
인간의 뇌에서는 기분을 좋게 하거나, 우울감을 떨치고 기력을 내게 하는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나오는데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몸은 이 세로토닌을 흡수해버려서 체내량이 충분치 않은 문제가 생긴다는 게 신경정신학계의 진단이다.
세로토닌을 더 발생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몸이 흡수해버리는걸 막아서 체내 잔존량을 늘리자는게 항우울제의 원리다.
뇌 단층영상에서 우울증 환자의 뇌 특정한 곳이 밝은지 어두운지, 항우울제를 먹으면서 몸 속에 어떤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우울증이 실재하는지와 연관관계가 없다는 주장이 반복된다.
화학물질이 인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다는 건 기본적인 상식이기 때문이다.
오직 우울증에만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떠한 권위를 부여하고
환자의 ‘우울하다’는 자기고백에 바로 우울증이라는 진단명과 항우울제 처방전을 들이민다.
항우울제 복용을 끊었을 때 재발의 강도가 높고 재발율 역시 높은 것을 따져보면 거의 평생에 걸친 치료가 담보되는
노다지 산업이 바로 우울증 시장이기 때문이다.
피터 콘래드는 ‘사회의 의료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료화란 의학적 관리 대상이 아닌 문제가 의료 문제로, 주로 질환이나 장애로 정의되고 다뤄지는 과정을 말한다. 일부 분석가들은 의료 영역의 확대를 ‘20세기 후반 서구에서 일어난 가장 강력한 변화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앨런 호위츠는 ‘정신질환 만들기’에서 이렇게 썼다. “정신과의사, 심리학자, 심리치료사들이 사용하는 진단 편람 기준에 나와 있는 상태 중에는 정신장애도, 별개의 질병도 아닌 것이 많다. 그러한 상태는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에 대한 예측 가능한 반응이나 문화적으로 양식화된 형태의 일탈 행동, 일반적인 인간의 불행이나 불만을 반영한다고 봐야 한다.”
멜 슈워츠는 심리학 전문 잡지 ‘사이콜로지 투데이’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이라는 정상적인 경험들이 지금은 기능 이상의 프리즘을 통해 관찰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모든 시련과 고통에는 진단명이 꼬리표처럼 붙고, 우리는 희생자 집단이 되어간다. 막연한 불안감과 인간다움의 병리화에 희생되어 가는 것이다.
<가짜 우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