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은 모두 회수돼야 할까? 영화 <이그잼>
8명의 지원자가 방에 들어선다. 인종, 국적, 연령이 각기 다른 여자 넷과 남자 넷이다. 여덟 개의 책상에는 1~8까지 번호가 쓰인 시험지 한 장과 연필 한 자루가 각각 놓여있다. 최종 시험을 통과하면 유수의 대기업 임원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감독관은 규칙을 설명하고 나간다. 제한시간이 시작된다.
-시험지를 훼손하지 말 것
-감독관이나 고사장의 경비에게 말을 걸지 말 것
-자신의 의지로 고사장을 나가는 즉시 실격
-문제는 하나, 답도 하나
지원자들은 이른바 ‘멘붕’에 빠진다. 시험지는 백지. 전등에 비춰도 보고 혹시 물이 닿으면 변할까 침도 뱉어보지만 종이는 변하지 않는다. 한 지원자가 자신의 각오를 써내려가기 시작하자 실격 경고음이 울리고 그는 끌려나간다. 나머지 지원자들은 깨닫는다. 자신의 시험지에 글자를 쓰는 것은 훼손으로 간주된다.
시험장은 방탈출이 펼쳐지는 무대와 같다. 지원자들은 이내 규칙을 뒤집어 보기 시작한다. 경비원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말은 즉 지원자끼리는 대화를 나눠도 된다는 뜻. 이기기 위해 다른 지원자를 완력으로 고사장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자발적인 퇴실이 아니므로 소용이 없다는 것 등.
일곱 명의 지원자는 나름대로 협력에 나선다. 방을 둘러싼 전등 속에 숨겨진 등이 있는 것을 간파하고 하이힐로 전등을 깬다. 그러나 시험지에는 아무런 글씨도 나타나지 않는다. 경비원에게 말을 시키지만 말라고 했으니 그의 주머니를 뒤져본다. 라이터가 있다. 불로 그을려도 특별한 잉크로 문제가 써 있는 게 아니었다.
영화 이그잼 속의 방탈출은 맥거핀으로 점철돼 있다. 맥거핀은 복선인 척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영화 속 장치를 말한다. 힌트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문제 푸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가짜 단서들이 지원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실제 방탈출 카페가 재밌는 이유도 이런 가짜 힌트다. 퍼즐이나 퀴즈는 IQ퍼즐 잡지를 혼자 푸는 것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방탈출 마니아들은 난이도가 높은 테마를 찾아 헤맨다.
방탈출을 하러 갔을 때 방 안에 다트판과 화살 세 개가 있어서 그 화살들을 이리 저리 옮기느라 20여분을 헤맨 적이 있다. 결국 시간이 끝나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다트판은 그저 소품이었다. 허탈하다. 하지만 모든 소품이 방탈출을 위한 힌트인 방은 난이도가 낮아 재미도 떨어진다. 어려운 게임일수록 참가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안 맞는 여분의 조각’이 퍼즐 맞춰가기를 방해한다.
이그잼은 이 여분의 조각을 다루는 방식에 관한 영화다. 이그잼의 지원자들은 면접관들이 CCTV로 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답은 하나라고 했다. 즉, 남은 지원자가 단 한명이 될 때까지 이들은 협력을 멈추고 속임수와 공격을 시작한다.
이쯤되면 “그래서 문제가 뭐고 답이 뭐야!”라고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드러날지 모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그잼은 불친절한 영화다. 문제와 답에 대한 힌트,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추리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그냥 영화를 따라가야겠다고 중반부에 포기하고 나니 편해졌다.
책과 영화에서 떡밥을 군데군데 숨겨놓고 성실하게 이를 회수하는 작가들이 있다. 미야베 미유키가 그렇다.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도 있지만 ‘이유’라는 장편소설에서 전혀 접점이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산발적으로 펼쳐지는데 결국 책을 덮을 때에는 그들의 삶이 한 점으로 모여서 성실한 떡밥 회수가 뭔지 보여준다. 촘촘한 떡밥이 모두 회수될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못지 않게 이그잼의 맥거핀이 주는 찜찜함도 매력이 있다. 물론 이 영화를 감상하다가 불가피하게 결말을 못봐서 이 시험의 문제와 답을 모르고 끝난다면 정말 끔찍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