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석과 서영은 퇴근 후에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 전에 함께 밴드 '민물장어'의 콘서트에 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둘은 자신들이 연인 사이도 아니고 지인 사이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콘서트를 함께 간 경험은 둘의 관계에 큰 진전을 보이게 했다. 서영은 이후에 태석에게 시시콜콜한 일로 카톡을 하는 때가 많았다. 직장에서 평소보다 멀리 출장을 간 일, 직무 교육때문에 빨리 퇴근하게 된 것, 직장 동료의 결혼 소식 등. 태석은 그럴때마다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답장을 하고는 했다. 강의가 끝날 무렵 즈음에는 태석은 설레는 마음으로 먼저 카톡을 확인했다.
태석은 자신이 일하는 한국어 학원에서 서영이 일하는 직장까지 가서 서영을 픽업하고 금광아파트 주차장까지 차를 몰아서 함께 가는 때가 많았다. 태석은 서영을 조수석에 태우고, 이런 저런 두서 없는 이야기나 질문들을 늘어놓았지만, 서영은 그런 말들에도 밝게 웃고 괜시리 기분이 들뜬 사람처럼 반응을 해주었다. 태석은 금광아파트 107동 402호에 살았고, 서영은 301호에 살았기 때문에, 둘은 저녁에 엘레베이터에서 헤어졌다. 좁은 엘레베이터 안에서 헤어질 때, 다정한 제스쳐나 스킨십을 하기에는 조금 머쓱했지만, 태석은 서영이 3층에 내려 집의 도어락을 누르기 전까지 손을 흔들어주며 작별 인사를 해 주었다. 점점 둘은 서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으면서도 연인 관계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사이가 되었다.
어떤 화창한 주말, 서울 혜화동의 대학로 거리를 태석이 서영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서로의 마음 속에 확신 비슷한 것이 생겼다. 암묵적인 합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서로가 연인 사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는 사이로 점점 발전하게 됐다. 태석은 친구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근황을 전하기도 하며, 서영은 이미 알고있는 친구들에게 남자친구에 대한 소소한 화제거리를 그들 사이에서 꺼내어 놓기도 한다. 둘은 손을 잡고 걸을 때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포옹을 하거나, 태석이 서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 그리고 둘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포개는 일도 모두 그들의 기억 속에 이미 자리잡았다. 태석과 서영은 서로 손을 잡고 익숙한 거리를 걷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소중한 사이가 되었을까?"
태석은 107동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둘은 나란히 걷고 있다. 서영은 태석의 손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색한 이웃 사이였잖아, 서영이 말하면서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오늘 저녁 먹고 슈미보러 3층에 가봐도 돼?"
태석은 묻는다. 그럼, 당연하지. 우리 지금까지 한번도 우리집에서 만난 적은 없네. 서영은 말한다.
"저번에 내가 자기 집에 밥 먹으러 갔을 때 생각나? 그때 내가 당직근무가 잡혀 있어서, 빨리 밥 먹고 복귀해야 됐었잖아. 그런데 집에 있는 거라곤 우유하고 시리얼정도 밖에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전화하니까 집에 오라고 해서 이것 저것 많이 차려줬지. 그때 해준 닭볶음탕 아직도 생각난다. 정말 맛있었는데"
"다시 언제든지 와도 돼. 이제 곧 겨울이니까 우리 엄마가 팥죽 해서 보내주셨거든"
자기는 사실 요리 안해서 먹지? 서영이 웃으며 장난치듯 말하자, 태석은 정곡을 찔렸다는 과장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그래도 그때 닭볶음탕은 내가 한거야.
"저기 고양이가 있네 요즘 아파트 단지 안에서 고양이를 볼 일이 참 많은 것 같다"
서영은 말하면서, 앞에 있는 갈색 줄무늬의 고양이를 바라본다. 머리와 몸 쪽에 다소 화려한 줄무늬를 한 고양이다. 목과 발쪽은 하얀 털에 윤기가 났다. 딱 보기에도 깔끔해 보이는 고양이가 서영과 태석 앞으로 점점 다가온다.
"이리와보렴"
서영은 무릎을 굽혀 앉아서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이는 서영이 팔을 뻗으면 약간 모자랄 거리까지 다가와서 주저앉더니 앞발을 핥아서 자신의 털을 단장한다.
"어 이상하네"
서영은 신기한 것을 봤다는 듯이 머리를 갸우뚱 한다. 태석은 물었다. 뭐가 이상한데?
"원래 길고양이들은 사람 앞에서 그루밍을 잘 안 하거든. 고양이들은 어렸을 때 자기 어미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면서 큰대. 그래서 길고양이들은 낯선 사람 앞에서 그루밍을 잘 하지 않는 습성이 있으니까. 그대로 이어지는 건데, 이 고양이는 조금 특이하네?"
음, 태석은 조금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아마, 누가 버린 거 아닐까?
"그런가"
서영은 고양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손짓을 했다. 서영은 고양이를 조금 쓰다듬으며, 경계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방에서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꺼내려고 하는 찰나였다.
"어?"
태석이 놀라는 소리에 서영도 고개를 들어 휘둥그레진 눈으로 태석을 바라보며 묻는다. 왜? 태석은 107동 5층의 왼쪽 모퉁이쪽을 가리켰다.
"저기 불나는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뭔가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점점 짙어지고 타닥타닥 불길이 거세지는 소리가 조금씩 들렸다. 서영은 태석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그런데 정말 5층쪽에서 빨간 열기가 조금씩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닌가.
"저 정도면 신고해야겠는데"
태석은 핸드폰을 꺼내어, 119를 누르고 귀에 바싹 갖다붙였다.
메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카페 - 휘경sk뷰 입주자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