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자취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한 달 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 사실 부끄럽진 않은데 주변에 얘기하면 아무도 자랑으로 생각하지 않더라. 머리를 자르고 오는 길에 동아리 후배가 술집에 혼자 있다길래 살짝 들러 말동무를 조금 해주고 돌아왔다. 가을비가 조금씩 떨어지기에 우산을 펼칠까 잠깐 고민했지만, 뒷짐 진 채 맞잡은 손이 제법 따뜻해 놓기 싫어서 그냥 그대로 돌아왔더니 옷이 젖어 있었다.
걷는 동안 동아리 후배들의 글을 떠올렸다. 올해 문학의 뜨락은 활동 인원 톡방에만 40명 가까이 사람이 들어왔다. 역대급 인원 덕분에 매주 다양한 글이 올라와서 읽는 재미가 있다. 나도 좋은 글을 들고 가서 그들을 감탄시키고 싶지만, 요즘은 예전처럼 글이 써지지도 않고 바쁘기도 해서 아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뭐라도 써야겠다, 자극을 받아 오랜만에 메모장을 뒤적이며 옛날에 썼던 글 토막들을 읽어보다가, 퍽 재미있는 글감들을 여럿 발견했다. 그 단상들을 모두 시의 형태로 발전시키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들 것 같아서, 그냥 힘 빼고 습작처럼, 조금 다듬어 짧은 글로 풀어보기로 했다.
매거진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앞으로 연재하게 될 글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낭만이다. 낭만(浪漫). 사전적 정의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라고 하는데, 낭만의 뜻을 사전을 통해 받아들이는 것은 낭만적이지 못하다. 한자를 해석해볼까, 그러면 흩어지는 파도라는 말인데 제법 멋있으면서도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의미가 명확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조금 더 찾아보니 사실 낭만이란 단어는 romance를 일본어로 번역하며 음차한 것으로, 흩어지는 파도 어쩌구는 의미 부여에 불과하단다. 의미 부여. 이게 낭만이다. 흩어지는 파도처럼 의미 없는 것. 그래서 더욱,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인 것.
낭만은 비논리다. 비효율적이고, 겉멋에 불과하며, 괜한 것이다. "굳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모든 것이다. 낭만은 모순이다. 필요한 것은 아닌데, 있으면 충분해지는 그런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이유를 붙여 유일한 어떤 것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낭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낭만을 좇아야 한다. 영겁의 시간, 무한의 우주 속에 한낱 찰나의 티끌에 불과한 당신과 내가, 그럼에도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낭만이기 때문이다. 몇몇 주변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나는 "낭만충"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별명이지만 '충'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부정적인 느낌이 있으니, 나는 'OO를 잘 하는 사람 또는 즐기는 사람'이라는 뜻의 '꾼'을 써야지. 낭만꾼 용구. 낭만꾸러기(?)
낭만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앞으로 이곳에 내가 생각하는 낭만에 대해 쓸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하찮은 것들에 대해서,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소박한 꿈들에 대해서. 낭만의, 낭만에 의한, 낭만을 위한 나의 미련한 노력들에 대해서. 짧게 부담없이, 생각나면 생각날 때마다 쓸 것이다.
이 기록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나의 낭만이 당신의 낭만이 된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또, 어쩌면. 내 안의 낭만이 꺼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만약 먼 미래 나의 파도가 흩어지거든, 앞으로의 글들은 좋은 유산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때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며 쓴 것들을 다시 읽어봐야지. 궂은 비 내리는 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나는 어쩌면 다시 우산 없이 길을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