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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Sep 22. 2023

첫 번째 단상

손맛은 낭만이다.


자취 요리


    자취를 시작하고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요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직 전자레인지로 '조리'만 가능했던 기숙사 생활 시절과는 다르게, 요즘은 냉장고에 마늘, 파, 계란 같은 간단한 식재료들을 사두고 기회가 될 때마다 간단한 음식을 직접 해 먹고 있다. 처음에는 소금, 후추, 식용유 밖에 없었어서 요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계란 부침(후라이, 스크램블, 오믈렛 등)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점점 올리브유, 버터, 간장, 설탕, 굴소스 등등 조미료들이 추가되면서 할 수 있는 음식의 범위가 늘어나고 있다. 파스타 면을 사서 알리오 올리오 (마늘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지난 주말에는 집에서 보내준 김치로 김치볶음밥도 해 먹었다. 볶음밥을 하려고 베이컨을 산 김에 우유랑 양파도 사서 크림 스파게티도 만들어 봤다.


    아직 칼질도 서투른 1렙 초보 자취생이지만, 나는 이 과정이 너무 즐겁다. 퇴근길에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생각하며 간단하게 해 먹을 수 있는 야식거리를 생각하는 것도 재밌고, 그것을 땀 뻘뻘 흘리며 실행한 뒤 하찮은 인증샷을 남기고 게 눈 감추듯 해치우는 것도, 심지어 먹자마자 설거지를 하는 것도 지금은 마냥 재밌다. 자취 선배들은 이 재미가 딱 한 달 간다는데, 일단 지켜보십시오. 해보고 싶은 음식들이 너무 많습니다만.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다.


    요리왕이 될 것이다. 마스터 셰프 최강록이나 외식업 천재 백종원이 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내게 요리왕의 조건은 딱 두 가지다. 첫째, 쓸 수 있는 재료만 보고 할 수 있는 음식을 떠올린 뒤 레시피 검색 없이 그 음식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상황에서든 "냉장고를 부탁해"가 닥쳤을 때 무엇이 가능하고, 그러려면 어떤 순서로 무엇을 해야 하고. 이런 판단이 곧잘 나오는 사람. <삼시세끼> 차승원처럼 필요한 것을 금방 구해다가 마술처럼 재료를 요리로 바꾸는 연금술사가 곧 요리왕이다. 둘째, 몇 가지 음식만큼은 내가 한 것이 제일 맛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잘하고 싶다.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 그냥 하는 일 때려치우고 식당이나 할까?'라는 실없는 고민을 할 정도로. 나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음식을 해줬을 때 킹왕짱 소리를 듣고 싶다. 그 사람이 다른 데 가서 같은 음식을 먹고 '아, 이건 용구가 진짜 잘하는데,' 하고 내 생각이 나게 만들고 싶다. 변진섭 씨는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가 좋다던데, 나는 그냥 내가 김치볶음밥 마스터가 되고 싶다.


    나를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는 정말 먹는 걸 좋아한다. 가리는 것 없이, 뭐든 맛있게 잘 먹지만 나름 스스로를 미식가라고도 생각을 한다. 그런데 정작 요리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은 반성해야 할 일이다. 반의 반백년을 사는 동안 남이 차려준 밥만 먹었다. 가축이 따로 없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유튜브로 칼질하는 법부터 찾아보면서 손 베이고 데어가며 요리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아직은 눈대중으로 라면물도 제대로 못 맞추는 허접이다. 고백하면 위에서 말했던 알리오 올리오도 세 번이나 실패하고, 유튜브 영상을 열 개는 찾아본 뒤에야 겨우 먹을만한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런데 요리왕? 그런데 원래 배도 없는데 해적왕이 되겠다고 해야 낭만인 거임. 열심히 폐관 수련해서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매운맛을, 아니 궁극의 맛을 보여주겠다.



집밥


    꽤 많은 사람들이 엄마 요리에 대한 자부심, 그러니까 "집밥부심"이 있을 것이다. 미안한데, 우리 엄마는 진짜 객관적으로 요리를 잘한다. 진짜임;; 내가 키 188cm에 0.1톤 거인이 된 것은 엄마 음식 때문덕분이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집밥이었다. (나머지는 술 살인 듯..)


    뭔 요린들 다 잘하시지만, 개인적으로 엄마의 닭볶음탕은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저녁밥으로 그 메뉴가 나오면 일단 밥 세 공기는 가뿐하다. 닭볶음탕에 대단히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는 않는다. 자극적이지 않은 깔끔한 매운맛에 양파 단 맛이 어우러진 양념. 잘 익은 감자 하나를 으깨다가 국물 조금 덜어 비벼먹으면 닭고기는 없어도 그만이다.


    요리 잘하는 사람 특) 딱히 계량컵이나 저울 없이도 적당히 이만큼 저만큼씩 이것저것 넣으면 뚝딱 맛있는 음식이 탄생한다. 하수는 그걸 보며 똑같이 따라 해도 고수가 내는 맛을 흉내 낼 수는 없다. 우리는 이걸 손맛이라 부른다. 손맛은 낭만이다. 엄마도 나처럼 요리에 서투른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말하는 "적당히"의 의미를 몰라서 싱겁고 짜고 달고 매운 음식을 한 솥 가득 만들고는 꾸역꾸역 해치웠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25년 주부의 세월을 거쳐 수렴시 "적당히"의 양은, 숙련된 사람의 손맛은, 낭만이다.


    요리왕 용구의 하나 목표가 있다면 나중에 엄마한테 기깔나게 닭볶음탕 한 번 만들어서 대접하는 것이다. 나보다 낫다, 그런 인정 한 마디 들으면 그날 밥은 역대급 꿀맛이겠다.


낭만은 혼자서도 한 끼를 맛있게 해치울 줄 아는 것이다.

낭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히"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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