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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Sep 22. 2023

두 번째 단상

손맛은 낭만이다. (2)


낚시


    이번 휴가는 부산으로 다녀왔다. 고등학교 친구 WJ랑 다른 한 놈이랑 다녀오려 했는데, 그놈이 마지막에 도망을 치는 바람에 둘이서 다녀오게 됐다. WJ는 아재다. 뜨끈한 국밥에 소주 한 병을 야무지게 비울 줄 아는, 사우나에 몸 지지며 시원타 좋다 행복해하는, 진짜 아재다. 그런 주제에 나랑 생일은 하루 밖에 차이가 안 나서, 얘랑 있으면 나까지 아재가 된다.


    의외로 부산은 살면서 한 번도 안 가봤다기에, 부산 필수 코스 위주로 컨텐츠를 짜봤다. 부산역 내리자마자 국밥 먹고, 시장 들러서 어묵이랑 물떡 먹고, 저녁에는 꼼장어 먹고, 밀면 먹고 해장하고, 해수욕 즐겼다가 회 먹고. 어쩌다 보니 아뿔싸 일정에 먹는 것 밖에 없어서 앗싸리 하고 있었는데 별안 WJ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맥락 없는 제안이었지만 사실 너무 반가웠다. 낚시, 해 본 적은 없었지만 꼭 해보고 싶었거든. 학교 앞 갑천에도 뭐 잡을 게 있다고 낚싯대 하나 걸쳐두고 종일 앉아계시는 아저씨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는데, 도대체 무슨 재미인지 궁금했다. 이걸 진짜 아재와 하게 되다니, 물론 얘도 처음이라지만 설레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낚시를 하는 일은 없었다. 당일치기로 낚시장비를 대여할 수 있는 곳을 찾기는 힘들었고, 배 타고 나가는 좌대 낚시터 같은 곳은 동선이나 시간 상 일정에 포함시키기가 부담스러웠다. 실내 낚시 카페가 자갈치 시장 근처에 있긴 했는데, 그건 낭만 다 뒤졌잖아;; 결국은 아쉽지만 낚시 여행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애초에 생판 처음인 녀석들끼리 도움 없이 바다낚시를 해보겠다는 게 말이 안 되기는 했다. 뭐, 그러니까 낭만인 거지만.


    대신 새로운 기대가 생겼다. 올해 휴가는 아니더래도, 나중에 WJ와 어디 저수지 낚시터로 가는 거다. 사실 낚시는 아무래도 좋다. 소주를 한 다스 챙겨다가 컵라면 안주 삼아 밤새 노가리 까야지. 그러다가 적당히 취하면 말없이 고요한 검은 물을 바라보며 푸푸 젖은 한숨 내쉬어야지. 사실 낚시의 낭만은 기다림에 있다.(고 생각한다. 안 해 봐서 모름.) 물론 커다란 물고기를 잡아다가 직접 회도 뜨고 준비해 온 양념장에 매운탕을 해 먹는, 그런 상남자 같은 모습도 분명 낭만이긴 한데. 나는 수렵 행위 자체보다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황지우처럼, 반드시 당신이 올 거라는 믿음 하나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는 데에 낭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리숙한 물고기 한 마리가 미끼를 물어준다면, 팽팽한 낚싯줄을 감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신날까! 결국 잡는데 실패한대도 손맛을 느낀 나는 낚시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금붕어 IQ래도, 나한테 잡힐 만큼 멍청한 물고기가 어디 있겠나. 빈 손으로 일어나는 일에도 실망하지 않도록, 세월을 낚는 강태공의 하루도 가늠해 보면서 그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연날리기


    사실 낚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꽤 옛날부터였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하루가 있다. 올해 초, 아직 바람이 쌀쌀하던 시기에 목욕탕 이용권 당근거래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100년 전통의 유성호텔이 올해를 끝으로 영업을 종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목욕탕 이용권을 싸게 구해서 가능할 때 최대한 유성호텔 대온천탕을 많이 이용해야지-라는 생각이었다. WJ와 생일이 하루 차이나는 나는 그 못지않게 목욕탕을 좋아하는 아재인데, 대전 생활 8년 동안 구석구석 유성온천 탐방을 다닌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유성호텔 대온천탕이 물도 좋고 시설 면에서도 으뜸이다. 특히 남탕에는 자그마한 노천탕이 두 개 있는데 이게 진짜 낭만 최고다. 론 찜질방까지 생각하면 또 괜찮은 곳이 하나 생각나긴 하는데 이건 나중에.


   아무튼, 당근 거래를 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갑천을 달리던 와중한 사내가 연을 날리는 모습을 보았다. 늠름한 매가 그려진 가오리연이었는데, 빳빳한 돛처럼 바람을 맞으며 제자리에 머무는 모습이 제법 멋있었다. 거래 약속 시간이 급한 것은 아니었어서, 잠시 자전거를 멈추고 넋을 잃고 그것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중학교 다닐 때, 시험기간마다 동네 평생학습관에서 공부를 좀 하다가 몸이 근질근질해지면 연습장으로 쓰던 A4용지 한 장을 접어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날리곤 했다. 암기 과목 필기 노트를 머지 한 손에 들고, 평생학습관 옆 공원으로 나가 내용을 중얼거리며 비행기를 날리고 있으면 답답한 학습실과 대비되어 느껴지는 자유에 괜스레 더 즐겁기도 했다. 이건 다소 미화된 기억이긴 한데, 그렇게 힘차게 비행기를 던지고 있으면 어떨 때는 꼬마애 한 녀석이 다가와 우와 우와 감탄해주기도 했다. 그럼 나는 관심에 신이 나서 더 높이 더 멀리 비행기를 날리다가, 소년에게 종이비행기를 날릴 기회를 주기도 했더랬다. (딱 한 번 그랬다.)


    지금 저 형도 내 시선을 느끼고 있으려나? 내심 어깨가 으쓱하시려나? 그래도 돼요 형님, 님 지금 ㅈㄴ 간지 나거든요;; 그러다가 슬, 목욕탕 이용권 받으러 가야 할 때가 돼서 자리를 옮기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연을 날려본 적도 없었다. 어렸을 때 나름 얼음썰매, 팽이치기, 쥐불놀이 이런 겨울 전통놀이는 꽤 해봤는데 연날리기는 못 해봤네.


    재밌겠다. 어떤 느낌이려나, 하고 생각해 보니, 연날리기랑 낚시질이랑 왠지 느낌이 비슷한 거다. 연날리기도 낭만이다. 강물 대신 하늘에 줄을 던지는 것이다. 끝에 달린 것의 저항을 느끼며, 팽팽한 줄을 풀었다 감으면서 흘러가는 구름처럼 무상한 세월을 낚아보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낚시질도, 연질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 손맛이 비슷한 감각일지 알 도리가 없었다.


    WJ와 하는 낚시도 기대가 되지만, 나중에 아이를 갖게 되면 어린 자식의 등짝만한 연을 만들어 쥐어주면서 연질은 또 어떤 재미인지 배워보고 싶다. 네가 기다림을 더 잘 이해하는 나이가 되면 아빠와 낚시도 하러 가보자, 말해주고 싶다.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나는 기다릴 것이다.


낭만은 기다림이다.

낭만은 기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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