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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Jan 04. 2024

네 번째 단상

여행은 낭만이다 - 충북 단양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사이의 기이한 일주일은 시간의 밖에 있는 괄호 속 같다.
지난해가 끝났지만 아직 새해는 시작되지 않았다.

- 미셸 트루니에, <외면일기> 중.


2023년 연말을 맞아 연구실에서도 일주일의 휴가를 받았다. 붕 뜬 '괄호 속'의 시간을 작년에는 광화문 소풍을 한 번 다녀온 것 말고는 집에서 빈둥대기만 했는데, 올해는 그래도 부지런히 여행을 다녔다. 일주일 중 3박 4일은 가족과 단양을, 하루는 대전에서 쉬고 1박 2일은 친구와 통영을 다녀왔으니 이번 괄호는 꽤 두둑이 채운 셈이다.


여행은 낭만이다. 후각이 쉽게 피로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몸은 같은 자극에 계속 노출되면 그것에 금세 적응해서 불필요한 정보를 차단해 버린다. 똑같은 일상, 매일 머무는 공간과 지겹게 반복되는 시간은 권태로움을 가져오고, 결국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멈추게 한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하다. 타지에서 객(客)으로 머무는 시간은 삶을 3인칭에서 바라보게 한다.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무뎌져있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주위의 아름다움을 살피고, 맛과 향에 집중하며 음식을 즐기다 보면 오감을 넘어서서 "살아있다는 감각", 그러니까 삶의 신비로움에 대한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생각(生覺)을 포착하는 것이 낭만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감동도 평생을 간직할 수는 없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행의 기억은, 생각보다도 금방 머리에서 잊히기 마련이다. 즐거웠다-는 어렴풋한 감상만 남는 것이 슬퍼서 글을 쓴다. 단양의 무엇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단양의 낭만을 잘 기억하고 싶어서.



겨울의 단양



    사실 이번 여행을 가기 전까지 나는 단양이라는 지역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몰랐다. 들어는 봤는데. 대나무 유명한 담양은 전라도에 있고. 단양은 어디 있지? 지도에서 찾아보라면 엉뚱한 곳을 헤맸을 것이다. 충북 단양이라길래 또 대전에서는 가까운 줄 알았다. 찾아보니 단양은 충주 옆에, 제천 옆에. 그러니까 강원도랑 경상북도에 접경한 소백산 줄기에 위치해 있었다. (소백산 대강 막걸리는 맛있는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단양에서 열심히 팔더라.) 부끄럽지만 충청북도의 지역 이름을 대라면 충주, 청주밖에 바로 생각나는 곳이 없었다. 단양이 뭐가 유명한지도 몰랐다. 뭐, 이제 알면 됐지. 이렇게 새롭게 배우는 것도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단양을 대표하는 볼거리로는 단양 8경에 속하는 도담삼봉이 있다. 남한강 가운데에 서있는 세 개의 봉우리가 제법 멋스러웠다. 강물이 언 상태에서 눈까지 살짝 내리니 하얀 도화지 위에 멋진 동양화를 그려놓은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배경으로 보이는 도담리의 공터가 봄여름에는 꽃으로 꾸며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5월의 단양을 상상하기도 했다. 눈앞의 설경(雪景)을 펼쳐두고 상상 속의 풍경을 가늠하는 일은 미완성의 그림에 색을 더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이미 아름다운 장관이었지만, 6월의 단양은 어떤 모습일까 기대를 하게 되었다. 날이 풀릴 때 또 한 번 찾아야겠다,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도담삼봉 (feat. 낭만젊음사랑 - 이세계)

    날이 풀릴 때 단양을 다시 와야겠다는 짧은 생각은 여행이 계속되며 다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 겨울의 단양. 멋있는데, 못하는 게 너무 많아!! 일단 남한강변의 절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잔도는 고드름 이슈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고, 만천하 스카이워크는 기상 문제로 휴장 (3일 차에 방문 성공하긴 했다), 초록색 이끼가 가득 덮여있다는 이끼터널은 곰팡이처럼 검게 물든 이끼벽 위로 초라하게 눈이 덮여있었다. 물론 이번 여행에서도 단양의 자연경관이 정말 끝내준다고 생각했지만, 여러모로 헐벗은 민낯의 단양을 보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특히 사인암 이쪽은 꼭 여름에 다시 와야겠더라. 물이 너무 맑고 시원해 보여서, 물놀이하러 오기에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수동굴


    이번 단양 여행의 명소 방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소는 고수동굴이었다. 어릴 때 <동굴에서 살아남기>라는 만화책을 무한정독했던 사람으로서, 또 나름의 과학도로서 "동굴 탐사"라는 말은 가슴이 뛰었다. 단양은 온달동굴, 천동동굴 등 여러 석회 동굴이 소재해 있는데, 그중 으뜸으로 치는 것이 고수동굴이다. 부지런히 안을 이동했는데도 40분 이상이 소요되는 큰 규모에 종유석과 석순을 비롯한 여러 동굴지형이 늘어서 장관을 이루는 곳이었다. 나는 제주도의 만장굴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화산 동굴이고 이것 우리가 조금 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석회 동굴이어서 더욱 기대가 됐다. 또 만장굴 방문은 여름이었고 지금은 겨울이니, 늘 서늘한 동굴의 내부가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따뜻하게 느껴져서 신기했다.

    동굴 내부도 아주 교육적인(?) 구성이라 마음에 들었다. 마냥 똑같은 지형만 보면서 걷는 게 아니라, 좁은 길목도 통과하고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는 등 코스 자체가 아주 알찼다. 카메라 셔터를 쉬지 않으며 끊임없이 감탄하면서 보았다. 석회동굴이 형성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이게 보이는 것 이상으로 놀랍다. 수적천석(水適穿石)이라 하던가, 약산성의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를 뚫고, 녹아내린 석회질이 흐르고 굳으며 기암을 빚어낸다. 종유석이 1cm 자라는데 100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럼 저만한 유석이 생기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종유석은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고드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언가 녹아내린 것처럼,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부드러운 모습이었지만 만져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시멘트처럼 단단했다. 그것이 억겁의 시간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특히 인상 깊었던 지형은 위아래로 몇 미터 가량 자란 석순과 종유석이었다. 둘은 손 한 뼘만큼의 거리를 서로 두고 있었다. 물 한 방울에 섞인 돌가루를 서로 나누며, 그들은 서로에 닿으려 한없는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견우와 직녀 같기도 하고, 미켈란젤로 <천지창조>의 닿기 직전의 손가락 같기도 하고. 둘이 만나 하나의 석주가 되는 광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이 내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때 느낀 장엄함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였다. 갑자기 주위에 보이는 모든 종유석 하나하나가, 어떤 거대한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에 가슴에 와닿는 감정이 폐소공포증을 유발할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는데, 뭔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carpe diem (카르페 디엠, 현재를 잡아라)이라고 속삭이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천연 무덤에 들어온 느낌. 그러나 죽음을 생각한다기보단 삶을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종유석 1cm만큼의 삶. 그 안에 내가 남기려는 유산은 그보단 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가슴의 답답함은 동굴을 "숲"으로 생각하니 조금 편해졌다. 저마다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이곳은 석회지형이 자라기 위한 거대한 온실. 자라는 돌을 생명처럼 느끼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명랑해졌달까. 700개가량의 계단이 있다는 고수 동굴, 중간에 낮은 지형을 마주치면 키를 바짝 낮추고 걷기도 해야 했어서 조금은 힘들었지만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멋진 경험이었다.

고수동굴 (feat. 천년의 사랑 - 박완규)

패러글라이딩



    단양은 또 패러글라이딩 명소로도 유명하다. 연구실 동료에게 휴가를 단양에서 보냈다고 하니, "패러글라이딩 탔어? 카페 산?" 하고 패러글라이딩을 한 위치까지 정확하게 이야기하길래 깜짝 놀랐다. 살면서 처음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해봤다. 나는 겁이 많은 편인데, 의외로 고소공포증은 없고 놀이공원의 익스트림한 놀이기구도 곧잘 탄다. 왜냐하면, 그런 류의 공포는 보통 순간이기 때문이다. 주사 맞는 거랑 비슷하다. 몇 초만 눈감고 있으면 끝날 공포. 그것을 견디고 나면 죽음즐거움이라는 꽤 커다란 보상이 기다리기도 한다. 내가 싫어하는 공포는 무서운 영화나 이야기 같은 거. 되새길 때마다 매번 다시 찾아오는 공포, 끝나지 않는 불안함. 이런 게 싫다. (어? 박사과정?)

    아빠가 "너 패러글라이딩 해볼래?"라는 말을 했을 때도 사실 나는 뭐 비싸지만 않으면 하는 거지, 생각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무서워서 못한다'도 아니고 '비싸서 못한다'는 말은 조금 이치에 안 맞는 것 같았다. 비싸봤자 십몇만원 할 텐데, 그게 무서워서 버킷리스트의 한 줄도 못 지우면 내 삶은 얼마나 쌈마이인가. 그래서 하기로 했다. 사실 패러글라이딩이 막 버킷리스트에 위치한 것은 아니긴 한데, 나는 나는 것에 동경이 있기는 하다. (나는 나는 것 ㅋㅋㅋ) 어렸을 때는 수십 종류의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기도 했고, 비행기를 타는 것은 지금도 설렌다. 사실 경비행기 같은 엔진 동력으로 나는 것보다, 바람을 타고 나는 것이 훨씬 간지난다고도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래! 결심했어! 하고 해 버렸다.

    사실 혼자 한다고 하면, 함께 동행한 가족과 이모 부부의 시간을 많이 뻇는 것 같아 좀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이모부도 선뜻 함께 뛰겠다고 해서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임했다. 몸이 무거우니까 마음이라도 가벼워야지; 와 진짜 근데 몸무게가 조금만 더 나갔으면 못 탈 뻔했음. 대충 200Kg까지 커버가 된다고 하는데, 장비랑 파일럿 님이랑 하면 대충 90Kg 정도 나간다고 하더라고. 휴~ 아슬아슬했다~ 살 좀 빼긴 해야 할 듯. 참고로 키는 189입니다. 저 돼지 아니고 코끼리임;

    파일럿 님이 너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니까 더 열심히 뛰어서 추진력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삶에 미련 없는 사람처럼 뛰었다. 그리고 날았다. 내가 너무 재밌어하니까 서비스로 스파이럴도 두 바퀴 돌아주셨다. 너무 재밌었다. 야, 나는 나는 사람이다! (I'm a flying man!)

패러글라이딩 (feat. 하늘을 달리다 - 이적)



송어


    사실 겨울 휴가를 단양으로 간다고 했을 때, 지도를 찾아보고 내가 살짝 실망했던 부분은 그게 너무 내륙지방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겨울인데, 부모님이 사주실 때 회를 먹고 싶었거든. 방어가 제철이라는데, 꼭 방어가 아니어도 이맘때쯤 안전하게 맛있게 회 좀 먹으면 좋잖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송어 회를 배 터지게 먹었다.

    참고로, 단양을 대표하는 특산물은 마늘이다. 시장을 갔는데 마늘 순대, 마늘 만두, 마늘 닭강정, 마늘빵. 온갖 마늘 음식이 다 있었다. 그걸 모조리 먹어본 평가로는 - 마늘 순대는 마늘이 익어서 그런지 기대했던 마늘 향이 약했고, 마늘 만두는 기름 둘러 구워 먹었으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고, 마늘 닭강정은 제법 맛이 괜찮았고, 마늘빵은 바게트가 아닌 데다 맛도 다양한데 특색 있어서 히트였다. 또 남한강 근처라 쏘가리가 유명한가 본데, 겨울에는 중국산 쏘가리를 쓴다는 얘기도 하고, 민물생선의 왕답게 가격도 너무 높아서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그래서 송어를 먹었다. 송어는 주황빛 살 색을 보면 알겠지만 연어랑 사촌지간이다. 그런데 연어는 바다도 다녀오고 살도 많이 올라서 기름기가 많은 대신, 송어는 보통 민물에서 양식을 하는 데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서 조금 더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난다. 의도한 건 아닌데, 여행 중에 이틀을 연속으로 송어를 먹었다. 한 번은 단양에서, 한 번은 제천에서 먹었는데 덕분에 송어 회라는 음식을 마스터해버린 듯. 송어는 말했듯이 살의 기름짐이 덜해서 고소함을 더하기 위해 콩가루를 찍어먹는다. 분명 예전에 송어를 먹어본 적이 있는데, 딱히 맛이 인상 깊진 않았고 다만 콩가루를 찍어먹는 게 특이하다- 정도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송어 먹는 법을 제대로 배웠다.

    식당에서 송어를 그냥 내주는 것이 아니라 상추, 당근 등 야채를 풍성하게 같이 주더라. 그래서 야채에 초장, 참기름 등을 버무려 회덮밥에서 밥을 뺀 것처럼 무침을 한 뒤, 송어를 같이 먹는 것이었다. 사실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처음 먹었을 때는 그냥 음~ 이런 느낌? 하면서 먹었지만, 딱히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거나 나중에 또 생각이 날 것 같다는 기분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황금 송어"라는 아주 큰 규모의 제대로 된 식당이었는데, 송어 살맛도 훨씬 잘 나고 푸짐하게 잘 먹었다. 특히 종업원 분이 '먹을 줄 모르시네' 하면서 직접 말아준 양념장이 아주 히트였다. 대접에 먼저 초장, 참기름, 다진 마늘, 와사비를 섞어 양념장을 만든 다음에 야채를 섞으면서 콩가루도 미리 살짝 더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스맛도 균일하고 아주 만족스러웠다. 쑥갓이나 양파가 있는 것도 좋았다. 나름 전날에 먹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배움의 즐거움은 끝이 없구나! 민물생선은 가끔 뻘맛이 난다고 해야 할까, 흙비린내 회맛을 해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송어는 정말 깨끗한 맛이 났다. 연어와 달리 기름기가 적어서 끝도 없이 들어가는 맛이었는데, 야채를 곁들이니 제법 양이 많게 느껴지기도 하고 첫 입부터 마지막 입까지 물리지 않고 너무 맛있게 먹었다. 매운탕도 좋았다.

    '먹을 줄 모른다'는 말만큼 자존심 상하는 게 없다. 모든 것이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것도 못하면 왜 살아? 어떤 음식을 떠올릴 때, 그 음식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상황과 방법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준하처럼 무식하게 먹는 사람 말고, 김준현처럼 철학 있게. 밥 한 공기를 먹더라도 (보통은 두 공기를 먹지만) 한 숟갈 한 숟갈을 가장 맛있게 먹기 위한 루틴을 찾는다. 반찬을 조합하고, 쌈을 싸고, 국을 말고, 술을 곁들이고 하는 그 모든 과정이 예술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송어를 맛있게 먹는 법을 이번에 배워서 기뻤다. 다음에 송어를 와사비 간장에 찍어먹는 사람을 보면 에헤잇, 먹는 법 모르네! 하고 알려줄 수 있어서 기쁘다. 송어 하면 그 집이 맛있었는데, 하고 이야기할 맛집이 생겨서 기쁘다


송어 (feat. 송어 - 슈베르트)

겨울에 봄을 기대하는 것은 낭만이다.

자연 앞에 삶을 생각하는 것은 낭만이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은 낭만이다.

제대로 먹을 줄 아는 것은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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