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레한 고독을 여미어 입고서 연말을 느끼려 광장으로 나섰다. 본가가 5호선으로 이사를 온 덕에 마지막 방문보다 가는 길이 수월했다. 이사 시기를 따져보니, 이곳을 다시 찾은 것도 몇 년 만이겠구나 했다. 광장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성탄절 당일이었던 어제보다야 조용한 편이었겠으나, 갑자기 축제에 온 것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촛불의 온기만으로도 따뜻했던 이곳, 광화문은 나에게 어떤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졸업" - 브로콜리너마저). 왼쪽과 오른쪽이 맞부딪혀 나는 박수의 소리처럼, 대한에 대한 외침이 겹치는 곳. 그 다양한 애국의 현장을 좋아했다. 다가오는 주말이면 사람들은 또 종각 앞에 구름처럼 모여들 것이다. 나는 대전으로 다시 내려가야 하므로 갈 일이 없지만, 안전한 행사가 되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고궁 돌담길을 따라 돌기로 했다. 계획을 갖고 온 것은 아니었는데, 문상훈의 오당기(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가 기억나서 커피를 하나 사들고 걸었다. 기분을 내는데 비싼 커피는 필요 없어서 gs25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양도 많고 맛있었다. 경복궁 바로 뒤에 청와대가 있었다. 푸른 기와가 궁궐 어깨너머로 보이길래 가깝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정말 길 하나 건너 있길래 신기했다. 미리 예약을 하지는 않아서 들어가 보진 못했다. 어차피 빈 집이라서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멀리 북촌을 구경하며 삼청로를 걸어 내려오다가, 듣고 있던 노랫말에 집중력을 잃었다. 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루시드 폴의 여린 목소리에 살짝 마음이 꺾일 뻔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모처럼 혼자 멀리 나온 산책에 설렌 나는 그 슬픈 가사를 흥얼거리며 씩씩하게 걸었다. 그러다가 신발끈이 풀려서 잠깐 민속박물관 앞 벤치에 잠깐 앉았는데, 걸을 땐 몰랐는데 발이 조금 아팠나 보더라고. 쉴 겸 노래 한곡 다 듣고 다시 걸어야지 하고 한복 입은 청년들, 나들이 나온 아기들을 구경했다. 그게 뭐라고 평화롭고 좋아서. 다음곡 반주까지 마음에 들길래, 에라 모르겠다 커피 마지막 한 입 쪽 빨고선 그 노래까지 다 듣고 움직였다. (권나무, <어릴 때>라는 곡이었어요.) 몹시 행복해져서는 사진 찍어달라는 외국인 분들 무릎까지 꿇어가며 열심히 찍어주고 왔다.
돌담길 하면 덕수궁 돌담길이지- 하며 다음 행선지를 정한 채 시청으로 움직이다가, 코로나 백신 피해자 유가족 천막을 마주쳤다. 나는 백신 3차 접종까지 마친 사람이고, 사실 안티백서를 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다. 그러나 막상 코로나 백신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며 슬퍼하는 사람들을 직접 마주하니 세계관이 흔들렸다. 백신 접종과 그들의 죽음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저들은 어찌 됐건 백신을 맞은 가족이 금세 몸이 안 좋아지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이다. 백신 접종을 거부한 사람이 아니라, 정부와 질병청의 말을 믿고 백신을 맞았는데 사람이 죽었다. 그러니 '백신 접종과 그들의 죽음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답답할까. 나라고 백신이 100% 안전하다는 믿음에서 접종을 한 게 아니다. 공동체의 안녕과 빠른 회복을 바라서, 좀 더 솔직하게는 외부 활동의 편의와 접종 당일의 휴가를 바라서 맞았는데 운이 좋았던 거지. 우리 엄마도 살짝 알레르기처럼 부작용 증세가 있어서 3차 맞기는 꺼려졌다고도 하고. 살짝 엿본 천막 틈새로 3열로 늘어선 영정사진과 자리를 지키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해 괴로웠다. 누군가의 절박함을 남일처럼 스쳐 지나갈 뻔했다는 게, 결국은 아무런 행동도 애도도 표하지 못하고 글이나 한 토막 남긴다는 게. 괜찮은 걸까, 싶었다.
다소 무거워진 마음으로 덕수궁 주위를 돌았다. 월요일은 입장이 안 돼서 안은 못 들어갔지만, 어차피 외벽을 걷는 것이 목표였어서 상관은 없었다. 여기 뭐 연인끼리 걸으면 헤어진다고 했나, 나는 혼자여서 상관없지만. 미신 때문일까 커플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문득 쓸쓸해졌다. 오후 세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림자가 돌담벼락 위로 길게 늘어지더라. 모두가 분주한 월요일 오후, 나 혼자만 백수처럼 어슬렁거리는 것이 괜히 한심해졌다. 팔자 좋다 구인용, 아주 팔자가 니 그림자처럼 늘어졌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것보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 졌는데. 아냐, 사실 조금 출출한 것 같기도. 실화냐; 배고파서 우울한 거였냐고…
그래서 찾은 피맛골 "미진"의 냉메밀 맛은 끝내줬다. 여기가 미슐랭 빕 구르망에 6년이나 선정된 맛집이라며. 식사 시간에 가면 대기가 길어서 못 먹는다던데 오후 3시 반쯤 가니까 5분 만에 입장이 됐다. 이야 이게 맛있는 메밀이구나. 근데 11000원은 좀 비싸다, 초밥 세트 시키면 원래 사이드로 나오는 건데 이거.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분이 조금 회복되는 걸 보니 나는 그냥 단순한 가축이었다.
몰라, 그래도 광화문 왔으면 교보문고 가야지. 책을 살 계획은 없었지만 기념품 하나는 챙겨야 하지 않겠나. 소설 한 권 읽고, 시집 한 권 사야지. 서점에 들어가는데 선물 받은 방향제 냄새가 났다. "교보문고 향"이라더니 그런 게 있냐 했는데 있더라. 무튼 들어가자마자 구경한 곳이 학습지 코너길래 잠깐 중고등학교 참고서 몇 권 펼쳐 들고 추억에 잠겼다가, 문학 코너로 들어갔다. 앉아 읽을 곳이 없어서 소설 한 권은 다 못 읽고, 짧은 수필 몇 편 읽다가 시집 한 권을 골랐다. 냉메밀보다 2천 원이 싼 시집. 글로 밥값 벌려면 빌어먹게 힘들겠다, 생각하고는 카페로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썼다.
청계천 조금 돌다가 집으로 돌아가야지. 광장시장 들러서 분식 좀 먹을까 했는데 배가 아직 덜 꺼졌다. 모쪼록 랩 휴가의 첫날 집에만 박혀있기 싫었는데, 나오길 잘했다. 서울 재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