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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Jan 05. 2023

50만 유튜버한테 메일 보낸 썰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2022년 연말을 장식한 최고의 밈(meme)은 역시, 롤(LoL,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데프트" 선수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명언일 것이다.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의 기적을 만들어낸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들고 있던 태극기에도 등장해서 롤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된 구절이다. 데프트는 롤 e-스포츠 역사에서도 손에 꼽는 레전드 선수로, 지난 2022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속칭 롤드컵)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영광의 주인공이다. 포르투갈 전의 역전승도 짜릿했지만, 작년 롤드컵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데프트 선수의 드라마야말로 '기적'이라 부르기 손색이 없었음을 알 것이다. 병역 문제로 인해 은퇴를 앞두고 있던 데프트 선수의 마지막 롤드컵, 나의 본진은 "페이커" 선수가 있는 T1 팀이었으나 데프트 선수의 오랜 팬이기도 했던 나는 그의 모든 경기를 챙겨보았다. 국내 리그에서 진행한 선발전부터 대망의 결승전까지 단 한 번도 데프트 선수가 속한 DRX 팀의 승리가 정배였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결코 순탄하진 않았지만 언더독 DRX는 접전 끝에 승리를 이어갔고, 데프트의 라스트 댄스는 끝나지 않았다. 결국 결승전에서 T1을 꺾고 커리어 첫 롤드컵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는 그를 보며 나도 여러 감정이 폭발했다. 롤이라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어서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롤을 플레이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강한 모멸감을 느꼈던 순간이 있었다. 더 정확히는 '롤을 플레이하는 사람'의 커뮤니티의 어두운 이면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낀 사건이었다. 오늘의 글은 동성애 혐오라는 다소 예민한 주제를 다룰 예정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고, 다소 정치적?인 글처럼 읽힐 수도 있다. 굳이 읽고 싶지 않다면 페이지를 닫고 나가주면 된다. 그렇지만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는 누군가에게 - 어쩌면 당신에게 - 나는 미리 무한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사건의 발단은 2022년 9월 즈음 퍼졌던 하나의 찌라시였다.

세트와 아펠리오스는 각각 탑 라인과 바텀 라인에서 활약하는 남성 캐릭터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내에 게이 캐릭터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타릭"이라는 캐릭터는 유저들 사이에서 동성애자 밈으로 유명했고, (공식적으로도 그러한 설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바루스"라는 캐릭터는 캐릭터 리워크를 거치면서 동성애자 커플이 하나의 몸으로 합쳐진 것으로 설정이 변경되기도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조사를 해보니 동성애 및 양성애의 성적 지향을 가진 캐릭터들이 내가 알았던 것보다도 많았다.


   내 정치적 성향과 관계가 있다면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설정을 가진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딱히 부정적이지 않다. 마음에 안 들면 어쩔 건데? 그렇다는데,라는 주의이고. 사실 좀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PC)를 위한 노력이 우리 주변의 소수자 및 사회적 약자들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애초에 162개나 되는 챔피언 중에 (2023.01 기준) 성소수자 캐릭터가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겠다. 물론 소위 '지나친 PC주의'에 대해 피로감을 토로하는 유저들의 반응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바루스의 설정 변경 당시 나도 커뮤니티의 주된 반응처럼 반가움보다는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루스의 과거 설정 (딸을 잃고 복수의 화신이 된 수호자)의 설정이 워낙 매력 있었기 때문이지, 새로운 설정이 맘에 안 든다거나 아쉽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튼, 위의 루머가 여러 SNS를 통해 돌아다닐 때 유저들의 주된 반응이 환영일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적나라한 혐오를 드러내는 댓글들을 마주쳐도 그러려니 하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보통 이러한 설정은 6월 즈음 Pride month 이벤트에 공개되는 단편 소설에서나 은연히 표현했던 것으로 기억해서, 나도 조금 타이밍이 의외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쁜 대학원 생활 중에 크게 신경을 쓸 만큼 중대한 소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유튜브에서 충격적인 댓글을 발견하게 된다. 아마 국내 롤 유저라면, 그리고 유튜브를 조금이라도 보는 사람이라면 "롤박사 해*리"라는 유튜버를 알 것이다. (와! 박사 부 럽 다!) 아는 사람은 벌써 그의 트레이드 마크 배경 음악이 귓가에서 재생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2023년 1월 기준 구독자 48.1만 명을 보유한 롤 정보 전달 채널로, 빠르게 패치 노트나 업데이트 소식 등을 정리해서 올리는 렉카 컨텐츠로 구독을 하지 않아도 알고리즘 추천을 받아 자주 보이던 채널이었다. 페이스북 페이지 등에서도 종종 공유되고, 라이엇 코리아의 공식 채널에도 등장한 적이 있어 나도 알게 모르게 내적 친밀감을 쌓았었다. 썸네일에 내가 플레이하는 챔피언이 들어가 있으면 가끔 클릭해서 영상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의 댓글은 위의 루머가 돌던 "영혼의 꽃" 이벤트를 소개하는 영상 아래 있었다. 댓글의 내용은 이랬다.

이 댓글은 30분이 지나지 않아 삭제되었고, 다음날 영상도 내려갔다.

처음엔 "두창 이슈"가 뭔가 했다. 그것이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표현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너무 저급한 표현에 처음엔 당혹스러웠다가, 아래 "ㅋㅋㅋㅋㅋㅋ두창ㅋㅋㅋㅋ" 등의 웃음의 댓글들이 달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것이 이 사람 나름의 '유머'였음을 알게 되었다. 순간 구역질처럼 모멸감이 올라왔다. 이게 만약 아무개의 댓글이었다면 그냥 조용히 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방비 상태로 전혀 의외의 인물에게서 이런 일을 당하니까;; 심지어 나는 이 사람이 올린 영상을 막 시청한 직후였다. 마치 방금까지 대화를 주고받던 사람이 갑자기 자리에서 바지를 내리고 똥을 싸는 것을 본 기분이었다. 상황이 파악되자 경악스러움은 곧 강한 불쾌함으로 바뀌었다.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유튜브에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달리는 무수한 답글들...


열렬한 성원(?)

    솔직히 나도 "ㅇㅈㄹ" 이렇게 욕을 적을 필요는 없었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불쾌함을 생각하면 내 딴에선 존댓말도 하고 참으로 교양 차린 거다. (이게 "롤박사"라는 호칭 때문에 그렇다; 박사과정인 나는 박사라는 말만 보면 왠지 쫄린다고. 그나저나 학위는 어디서 받은 걸까? 내가 아는 자칭 박사는 N번방 조*빈이랑 문도 박사 밖에 없는데...) 이후 얼마 동안 답글이 달렸다는 알람이 끊임없이 왔다. 덕분에 나를 향한 모욕성 댓글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때는 화가 나지 않았다. 내가 못할 말을 한 건가?라는 의심이 한 치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데미지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관종이라 신났다! 반응 뜨겁네~ 친구에게 자랑(?)하려 악플들을 캡처하던 와중, 갑자기 새로고침한 페이지에 모든 알람이 사라져서 문제의 댓글이 삭제됐음을 알게 되었다.


    와, 그때는 좀 화가 났다. 미처 캡처하지 못한 댓글들이 아쉬웠던 까닭은 아니고. 그냥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첫째로 들었다가, 무력감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50만에 가까운 구독자를 보유한 이 사람은 저질스러운 표현 한 단어를 통해서 혐오와 조롱을 마음껏 드러낼 장을 만들었다. 삭제된 댓글의 답글은 지워졌지만 그것을 제외해도 영상에 표현되었던 이벤트 내용과는 무관한 '두창' 관련 댓글만이 댓글창을 뒤덮고 있었다. 댓글을 다시 달아보려 했지만 이상하다, 새로고침하면 내 댓글이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 형성된 여론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기분이 퍽 참담했다. 산불처럼 번지는 혐오의 세력. 저들은 나와 같은 롤 유저들이다. 내가 게임에서 만나는, 내 주위를 살아가는, 내 또래의 청년들. 절망스러운 감정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느낀 모멸감은 새발의 피다.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느낄 막막함에 비할 것은 아닐 테다. 내 주위에 "롤대남"들이 만연하듯이, 소수자들도 그들 사이에서 숨 죽인 채 조롱의 고함을 듣고 있을 것이다.


    어찌 됐건 해*리는 나의 댓글을 읽은 게 분명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아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며 댓글을 지웠을 것이다. 부끄러웠을까? 무서웠을까? 무엇이든 나는 그의 사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검은 화면에 "죄송합니다" 같은 문구가 적힌 썸네일의 영상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부적절한 표현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댓글은 삭제했습니다." 같은 댓글 하나만 다시 고정 댓글로 올려주길 바랐다. 하지만 댓글이 삭제되고 몇 분이 지나도록, 그리고 그 이후로도. 사과는 없었다.


    별 꼴을 다 본다, 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까. 그런데 나는 괜한 일에 엮여서 괜한 욕을 먹어야 했는걸. 기왕 불편충이 되어버린 거 끝장을 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냐하면; 이 사람 T1 소속 크리에이터래. 국내에서 가장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롤 프로 팀, 내가 유일하게 경기를 챙겨보는 팀 T1. 혐오를 조장하는 행동으로 페이커의 얼굴에 먹칠을 하면 안 되잖아. 유튜브에 댓글을 써봤자 사람들한테나 노출되고 그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인스타그램 DM을 보냈다. 읽지 않길래 메일을 썼다. 제보 메일이랑, 비즈니스 문의 메일 둘 다에게 보냈다. 이번에는 메일 읽음 표시가 모두 떠서 그가 읽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 발췌) 훨씬 길게 보냈는데, 잘 가다듬지 못한 문장들이라 부끄러워요.

     고백하면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나도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너무 유난 떠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 사람 입장에선 블랙메일처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별생각 없었을 수도 있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면서, 과연 답장이 없을 때는 어떤 추가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나도 일을 더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지쳐...)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갖고 답장을 기대했다. 하지만 답장은 끝내 받지 못했다.


     사건이 있고 몇 주가 지나고, 친구에게서 이 사건이 나름 롤 커뮤니티 내에서 큰 이슈가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의 말을 듣고 구글에 검색해 보니, 나 DC 갤러리에서 인기 많이 끌었더라.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leagueoflegends4&no=13020757

아. 롤갤은 정말 '심연'이라고 들었는데, 들여다보고 말았다. 근데 쟤네가 먼저 나 들여다봤음. 그나저나 T1 유튜브 구독한다고 욕먹을 줄은 몰랐네, 정말 T1 안티 팬도 많구나. 와, 그것보다 댓글 수 봐라; 무섭다 무서워. 그래도 이걸 보니 내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겠다 싶었다. 이 정도로 다구리를 맞았으면 나도 정당방위 아닐까? 그래도 해*리에게 더는 기대할 것이 없어서, 갤러리 게시물 링크를 공유하는 것을 끝으로 50만 (근접) 유튜버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음. 이런 일이 있었다. 고생했네. 댓글 하나에 열받아 댓글 하나 달았다가 아무도 모르는 작은 소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소위 '롤대남'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해보는 진귀한 경험도 누렸다. 모든 것이 지나고 보니,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결국 영혼의 꽃 이벤트에서 세트와 아펠리오스의 연애 등을 암시하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성애 혐오의 잔치를 벌였던 저 사람들, "롤이 PC에 굴복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며 안도했으려나? 미안하지만 롤은 엄연한 PC 게임이다.  2022 롤드컵 주제가 <STAR WALKIN'>을 부른 Lil Nas X가 유명한 게이 가수인 것은 알고 있는지. 가장 최근 공개된 챔피언 "크산테" (K'Sante, The PRIDE of Nazumah)가 첫 흑인 LGBTQ+ 캐릭터이라는 것은 또 어떤가. 불편해도 어쩔 수 없다. 롤은 PC 게임이니까. 싫으면 모바일 게임 와일드 리프트나 하는 수밖에.




    혐오와 차별이 만연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향한 조롱과 비난 플랜 카드, 대구 이슬람 사원 건축 현장 앞의 돼지고기 바베큐 파티, 전장연 지하철 탑승 시위에 대한 폭력 진압과 여론 몰이 등. 약자를 핍박하는 데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뉴스에 나오고, 그들의 저열함에 치가 떨릴 때가 있다. 그것이 자랑스럽지는 못하다. 혐오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것도 결국은 혐오이기 때문에, 또 정치적 '올바름'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잘 모르겠어서. 나의 분노가 마냥 정당한 것은 아니리라. 사람들은 저마다의 올바름을 따라 행동하는 것일 테니, 굳이 나와 다른 가치관의 인격체와 충돌하며 갈등을 키울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글을 올리는 것도 결국 편가르기려나. 어디서도 정치색은 내비치면 안 된다던 어른들의 말씀도 기억이 난다. 미안, 사실 나는 두렵고 외롭다. 큰 목소리를 내는 쪽은 언제나 내 반대편에 서있어서. 그리고 그들의 제법 많은 수가 20대 남성, 그러니까 나와 같은 시대 같은 환경을 함께 살아가는 나의 주변인들이어서. 나만 동떨어진 사람인 것 같아 고백하면 내 편을 찾고 싶은 것을 보니 그래, 이 글은 편가르기 글이 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까지 글을 읽어준 당신, 나의 생각에 전부 공감하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의 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이 나의 글을 읽어주었듯이, 나도 당신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나쁜 일을 당한다면 함께 싸워줄 각오도 되어있다. 잘 지냈으면 한다. 우리가 안녕하기를 바란다.


     내 삶만 해도 바쁘고 피곤한데,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면 암담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마음이 꺾이게 된다. 나와는 먼 일들이라고 되뇌어도 계속, 속상하고 화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그 모든 일들에 분노하지 않는 내가 될 것이다. 그때 나의 방법이 무심함이 아닌 더 큰 사랑이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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