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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May 13. 2023

푸른 기억

나의 감시자, 나의 보호자

*이 글은 작년 잠시 활동했던 대전 글쓰기 소모임 "글밭"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만약 당신이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당신을 이루고 있는 가장 큰 조각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세요.


나의 기억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015)>

    글밭의 2주 차 발제문을 보자마자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풍경이 펼쳐진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혐오 - 다섯 가지 감정으로 표현되는 기억 구슬들이 도서관의 책장처럼 빼곡히 늘어서 있다. 이들 중 어떤 기억을 나누면 좋을까, 선명한 기억이야 많지만 그중 하나를 고르기가 참 어려웠다.

    영화에서도 “핵심 기억”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사람의 기억은 보통 어떤 경험의 흔적처럼 결과물로써 남지만, 어떤 강렬한 기억들은 그 사람의 부분을 형성하여 이후의 행동과 성격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을 틀어놓고, 나의 “핵심 기억”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하나씩 톺아보았다. 빨간색보라색, 초록색 구슬들은 일단 제쳐두기로 한다. 너무 무겁고 불편한 이야기는 아직 하고 싶지 않았다. 잊기로 늘 다짐하는, 코끼리 같은 트라우마도 굳이 꺼낼 필요는 없겠다.


그렇다면 노란 기억 중에서 하나를 골라 묘사해 볼까.   

    몽마르뜨 언덕에서 처음 내려다본 지평선   

    - 지형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버스킹 음악과 폭죽놀이를 안주 삼아 밤새도록 노상 술판을 벌였던 월미도   

    - 소주를 생수처럼 마셨음에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 즐거웠나 보다.  

    25년 인생 중 가장 많은 축하를 받았던 작년 생일  

    - 따지자면 돌잔치가 더 큰 규모의 생일 파티였겠으나, 1990년대의 일이라 기억이 없다.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행복이 몰려오는 기억들이지만, 왠지 그 기억들은 새벽 같은 푸름이 옅게 묻어있었다. 말하자면, 그 장면들에서 유독 강하게 기억 남는 감정은 정신없는 행복의 순간이 아니라 거기서 한발 물러서서 우리를 바라보았을 때의 센치함이었다. 나는 행복해하다가도 자주 서글퍼진다. 그냥 좋아서, 너무너무 좋아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드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워서. 또 너무 감사해서,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죄송해지기도 하고. 이런 주책맞은 생각이 떠올라 괜히 기분을 망친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마냥 즐겁고 행복해하는 걸 참 못한다. 항상 저런다. 샛노란 감정은 너무 눈이 부셔서 부담스러운 걸까, 행복해서 눈물이 살짝 고이는 순간이 오면 들뜨지 말라며 머릿속에 경고 메시지가 뜬다. 내 뒤통수쯤에 머무르는 목소리가 “좋냐? 신났네?” 하고 비웃는 것 같다. 그러면 나는 그 감시자(?)에게 순간 쫄아서 시무룩해진다. 왠지 과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칭찬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아닙니다, 저는 못난 사람입니다.’ 이런 같잖은 겸손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제 풀에 지쳐 풀이 죽는다.

    그렇다고 내가 심한 조울증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생각해 보면 말하면 나는 흥분해서 나 자신을 잃는 게 싫은 것 같다. 분노나 두려움만큼이나, 과도한 즐거움 역시 나를 너무 흥분하게 하는 것이라 거부감이 든다. 나다움이 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감정에 잠식되어 나답지 않게 행동하는 순간들이 불편하다. 그런 의미에서 푸름은 한 발짝 물러서서 나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예전에는 이렇게 프로그래밍된 자신이 조금 싫었다. 순간에 몰입하지 못하고 괜한 궁상이나 떠는 내가 한심했다. 뭐가 그렇게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어라고 태어났다고, 불행이 익숙한 사람처럼 구는 것이 같잖고 꼴 보기 싫기도 했다. 나는 내가 마음의 병이 있는 줄 알았다. 그 푸른 감정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 내가 고른 기억 구슬은 바로 그날 밤의 이야기이다.


    그날은 정말 별다를 게 없었다. 동아리 정모를 마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끝나자 다시 허무함이 찾아왔다. 센치한 감정이 또 지겹게 찾아와서 기분이 살짝 나쁠 뻔했는데, 그날의 공기가 왠지 좋았다. 바람이 제법 선선해서, 달이 보름져서, 기숙사로 돌아가던 발길을 돌려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각진 건물들을 피해 갑천을 향하자 시야가 편해졌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저쪽에서 걸어오길래 반대쪽 방향을 선택해 강변을 한참 동안 걸었다.

    음악도 없이, 정해진 목적지도, 어떤 생각할 거리도 없이. 그냥 나와 단둘이서 걸었다. 서로 말도 걸지 않고 그냥 하염없이 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강물의 냄새가 물큰 올라와 강 건너도 쳐다보다가. 그러다가 내 그림자를 보았다. 가로등을 지나치면 내 앞에 그림자가 앞서갔다가, 다음 가로등이 가까워지면 천천히 짧아지고 옅어졌다. 조금 더 걸으면 다시 내 앞에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게 어쩐지 반갑고... 귀여웠다. 무표정으로 걷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금 웃긴데, 순간 사랑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평생을 함께해 온 오랜 연인과 느낄 법한 편안함을 그림자에게, 나 자신에게 느꼈다. 뜬금없는 나르시시즘에 놀랐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그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무럭무럭 커져서 스스로가 마구마구 사랑스러웠다.

    갑자기 나한테 노래를 들려주고 싶어서 이소라 6집을 트랙 리스트에 올렸다. 앨범을 다 들을 때까지 걸었다. 마지막 곡이 끝나서 나도 멈추고, 다시 앨범을 처음부터 들으며 돌아왔다. 그동안의 감정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젖지 않을 정도의 우울함 -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고, 그렇다고 행복이라 부르기에도 미묘한, 은은한 편안함. 그 하나뿐이고 절대적인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오롯이 느끼면서, 새롭게 샘솟는 감정. 평정심. 그걸 처음으로 사랑처럼 느낀 것이었다.

    내 노란 기억에 묻어있는 푸른 흔적들은 그 평정심을 향한 메타감정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다시 느끼는 감정. 그 정체가 ‘좋냐? 신났네?’ 하고 비꼬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너 지금 되게 즐거워하고 있구나. 너무 흥분하면 실수하니까, 다치지만 않게 조심해.’ 하면서 나를 다정하게 지켜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놀이터에서 신나서 놀다가, 멀리서 나를 지켜보는 차분한 보호자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처럼. 잠깐 메타감정을 마주하고서 편안하게 다시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 나를 관찰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화도 내고 엉엉 울기도 하는 나를, 나의 행동들을 조금 멀찍이서 바라본다. 그러면 가끔은 내가 정말 부끄럽고 싫기도 하고, 어떨 때는 또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걸 소재로 글도 참 많이 썼다. 나의 경험을 단순한 기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하며 자기혐오나 자기애의 근거로 삼는 반성의 태도가 나에게는 하나의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푸른 기억들의 방, 영화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2007)>

    <인사이드 아웃>의 세계관이, 내 안에는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 나온 예언의 방처럼 옅푸른 구슬들이 모여있는 구역도 있을 것이다. (예언은 다가올 기억 아닐까) 내가 수집한,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 푸른 기억들을 나는 사랑하기로 했다.


    발제자는 각자에게 소중한 기억을 함께 공유해 보자-라는 취지로 글감을 들고 왔던 것 같은데, 글을 써놓고 보니 사실 기억이랄 건 별 것 없고 딴 얘기만 잔뜩 했다. 취지에 안 맞는 글이긴 한데, 정말 기억 하나가 고르기도 무진장 어렵기도 했고... (너무 제 자랑 같거나, 무거운 이야기일 것 같았다.) 그냥 발제를 듣고 연상했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떠올리다가, 푸른 구슬? 하고 해리포터를 떠올렸는데 그 이미지의 구도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글을 쭉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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