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모든 형태의 혐오

by 인용구

*이 글은 2018년,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릴 무렵에 쓴 글입니다.


나는 오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오이가 싫다, 라기보단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 쪽이 더 가깝다. 그냥 오이 맛을 잘 모르겠달까. 가끔 보이면 한 번쯤 먹어보긴 하지만 찾아 먹지는 않는 정도.


"이를 어하는 사람들의 임"이라는 커뮤니티가 있다. 오싫모. 이 사람들은 오이를 극혐한다. 이들은 자신의 냉면 위에 오이가 올라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며, 김밥에 당근이나 우엉, 시금치는 인정할지라도 오이가 있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극단적인 사람들 중에는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간혹 있으며, 오이를 싫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이를 먹으면 안 되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실제로 오이의 쓴 맛을 강하게 느끼는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오이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내 주변에도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재밌는 것은 이 친구들이 오싫모라는 집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더 적극적으로 오이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된 이들은 이제 편식쟁이로 취급받지 않고, 오싫모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 듯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오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들의 아우성이 조금은 불편했다. 나는 오싫모의 일원이 되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오싫모’가 아닌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나는 아직 오이를, 그리고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중에도 완두콩은 색깔에서 고소한 맛과는 어울리지 않는 풋풋한 초록색이 인지 부조화를 줘서 특히 거부감이 있었다. 게다가 그 밥을 물들이는 콧물 같은 느낌이란… 윽. 그런 내가 완두콩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은 짜장면 위에 올라간 완두콩 몇 알 덕분이었다. 완전 별미잖아요, 그쵸? 지금도 짜장면 먹을 때면 완두콩 개수를 세 두었다가 아껴 먹는다. 진짜 맛있다. 그때 알았다. 완두콩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완두콩을 접해온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이도 마찬가지다. 아직 내가 맛있는 오이를 먹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오이를 조리하는 더 좋은 방법이 분명 있지 않을까. 언젠가 오이의 맛을 알게 되고, 나도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다-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둘째, 그냥 지극히 개인적으로 "싫어한다"라는 말 자체를 자주 쓰고 싶지 않다. 별로 안 좋아해. 막 좋아하지는 않아. 잘 모르겠어. 결국 같은 얘기일지라도 느낌이 다르다. 옛날부터 설문조사를 해도 매우 불만족, 불만족 항목은 거의 건드려본 적이 없다. 진짜 좋았으면 매우 만족, 그냥저냥 괜찮았으면 만족, 최저의 평가가 보통이다 정도….


의견이 같은 사람이랑 공감을 할 때 오는 만족감이 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구나.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뭐 이런 데서 오는 안도감이려나. 그런데 욕을 한 바가지 시원하게 하고 난 뒤에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약간 찝찝한 게 남는다. 적당히 포장을 하고 대화를 끝내지 않고는 그 부정에 아예 잠식되어 버린다. 말하는 대로 진짜 이루어지는 언어의 힘을 믿기 때문에, "좋아해"라는 말은 많이 할수록 좋지만 "싫어해"라는 말은 필요에 따라서만 하면 되지 않나-라는 신조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어떤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자체를 내가 갖고 싶지 않다. 굳이 혐오를 드러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마지막은 내 주변에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오이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이를 좋아하는 그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부정하는 표현을 하고 싶지 않다. 만약 내 연인이 오이를 엄청 좋아한다면, 나도 오이를 좋아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주변에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 거꾸로도 적용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그것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과,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동등하지 않다. 애초에 싫어하는 사람은 그 대상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이 그 사람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을 들으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대칭성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오이 먹기를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오이에 대한 선호를 표현하는 일마저도 잘못일까? 오이를 싫어하는 게 죄가 아니라면, 오이를 좋아하는 것도 죄는 아니잖아. 싫다는 사람한테 오이를 강제로 떠먹이는 것도 아닌데, "입맛 떨어지니까 내가 보이는 데서 먹지 마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사실 오이에 대해 잘 모르고, 오이를 막 좋아하지도 않지만 나의 친구가 나를 오이 관련 행사에서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참가할 것이다. 그곳에서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맛있는 오이를 건강하게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은 오이가 갖는 영양학적 올바름(?)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와 연대하는 것이 도덕적 올바름에 취합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 친구를 위해서. 지극히 사적인, 그러나 내겐 중요한 이유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어떤 개인의 긍정적인 자기표현마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은 혐오감을 주기 때문에" 자신의 혐오는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주변에 그 당사자들이 없었던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히는, 자신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함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의 친구가, 나의 자식이, 나의 이웃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혐오스럽다"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믿고 싶다.


누구나 호불호는 있다. 각자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이 타인의 그것과 다를 수 있다. 그렇기에 절대선, 절대적인 정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보편적 가치 역시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연하게도 나의 가치관, 잣대는 오직 나만의 것이고 그것은 틀렸을 가능성도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남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불호, 잘못됨을 표현할 때 한 번 더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오늘 서울에서는 수많은 혐오를 마주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신을 드러낸다. 오이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갈등보다는 훨씬 골이 깊고 복잡한 이야기. 왜냐하면 이들을 혐오하는 사람 역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이들이 혐오받는 이유도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이성인가, 동성인가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 나는 오늘 그 축제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 있을 나의 친구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래서 계속 존재하기 위한 용기를, 자존감을 얻기를 응원한다.



앞에 말했지만, 2018년에 작성한 "오싫모" 글은 서울퀴어문화축제 소식을 앞두고 썼던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논리가 부족한 부분도 있고, 세 번째 읽어보니 이건 논설문이 아니라 그냥 사견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한 것 같아 조금 부끄럽다. 그러나 저 당시 내가 스스로 세웠던 근거들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있다. 이제 "오싫모"라는 조직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지만, 여전히 특정 대상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는 커뮤니티는 존재한다.

사실 오싫모, 반민초단 정도면 귀여운 수준이지. 타인을 조롱하고, 혐오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혐오를 혐오하는 것도 혐오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반성을 하면서도. 혐오에 대한 혐오는 혐오가 사라질 때에 같이 사라질 것이라는, 음의 피드백의 성질을 믿기 때문에. 혐오와 갈등이 만연한 오늘날 다시금 글을 꺼내본다.


[사진 출처, 서울경제 "당신도 '오이코패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절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