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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존엄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봉준호 감독 신작 <미키 17> 후기

by 인용구

문학의 뜨락과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을 보고 왔다. 모처럼 좋은 영화를 보고 좋은 사람들과 무비 토크를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영화를 되게 다양한 각도에서 이리저리 씹뜯맛즐(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했는데, 생각나는 만큼 다 공유하고 돌아왔는데 또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 기왕 적는 김에 기록도 할 겸, 친구들의 평가와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점들을 짚어보려 한다.


후기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영화의 요소별로 하는 걸로. (스포 있음!)


설정

미키 17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Mickey 7>을 원작으로 하는 SF 영화이다. 주인공 미키는 니플하임이라는 행성의 식민지화를 위한 원정대에 '익스펜더블(expendable)'로서 참여하게 되는데, 익스펜더블은 지구에서는 윤리적, 사회적 이슈로 허락되지 않는 인간 복제 기술을 통해 임무 수행 중 죽으면 프린터로 복원(?)되어 다시 임무에 투입되는, 이른바 '죽음 노동자'를 뜻한다. 미키 17은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티슨 役)의 17번째 버전을 말하며, 그가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이 만들어졌는데, 미키 17이 다시 돌아오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는 질문을 계속 듣고 사는 미키가, 또 다른 자신을 만나며 처음으로 '살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 한편으로는 타락하고 저능한 지도자 마셜 (마크 러팔로 役)과 그의 아내 일파 (토니 콜렛 役)를 필두로 한 과학자, 종교인 캐릭터들의 사회비판적 블랙 코미디나, 니플하임 행성의 원주민 생명체 "크리퍼"를 다루는 갈등 등에 묻혀 미키 개인의 딜레마와 메시지가 희석되기는 한다.


내가 생각하는 봉준호 영화는 두 개의 키워드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정치적인 영화. <설국열차>, <옥자> 같은 해외 출연진이 등장하는 SF 영화가 특히 이런 색채가 강한데, 계급론이나 생명 윤리, 부패한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 등이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둘째는 지극히 휴머니즘적인 영화이다. <괴물>, <기생충> 같은 국내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서는 지긋지긋하게 사람 냄새나는 주인공이 등장하여 어떤 극한의 환경에 놓이며 인간의 본성을 불쾌하리만큼 사실적으로 표현해 낸다.

영화 <미키 17>은 분명 전자에 분류되긴 하겠지만, 어느 정도 그 사이의 지점을 공략한 느낌이 있다. 일단 주인공 미키는 <설국열차>의 주인공 커티스보단 훨씬 친근하게 느껴지고, 원작의 설정부터가 한 인간의 자아라던가, 생명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기 훨씬 좋은 소재였다. 그럼에도 살짝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연출

영화를 함께 본 친구는 <미키 17>이 '상징으로 점철된 영화'라고 표현했다. 맞는 말인 게, 원래 봉준호 영화가 좀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이미 대충 예상? 각오? 하고 있어서 크게 불만은 아니었다. 나는 원래 막 뭔가 있어 보이고 미장센 좋고 한 영화도 좋지만, 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흥미롭고 화젯거리,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작품을 좋아한다. (전형적인 Top-down 말고 bottom-up 인간. 문뜨에서도 누누이 이야기하는, '심미적인 개소리보단, 전달력 있는 좋은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깊이를 늘리자!' 파.)

아무래도 이번 작품은 좀 노골적이긴 했다 싶긴 한데, 일단 '모든 캐릭터가 어떤 대상에 대한 풍자, 또는 상징'이라는 비판에는 반박할 길이 없다. 단순히 멍청한 미키를 빼면 좀 모든 인물이 단편적으로 선하거나 악하다. 영화 <기생충>에서 이선균, 송강호 같은 배우가 연기했던 캐릭터처럼 다면적이고 모호한 인물은 딱히 등장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것은 극 전체에 걸쳐 미키의 자전적인 나레이션이 들어간다는 부분이었다. 너무 직접적이고 해석의 여지를 달리 주지 않는 스토리텔링 수단이라, 편하다고 함부로 쓰지 않았으면 하는 수법이었는데 좀 아쉬웠다.


시각적 연출은 뭔가 봉준호의 이전 작품들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까, 나쁘게 말하면 재탕인 장면이 많았던 것 같다. <설국열차>에서 양갱과 스테이크로 표현했던 계급 간의 식문화 차이는 이 작품에서도 무슨 시멘트를 뿌려놓은 듯한 죽과 '소스'로 치환되어 등장한다. 먹는 것에서 가장 서러움이 크게 느껴지는 건 맞지만요. 영화 초반에 손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도 비슷하게 <설국열차>의 초반 팔 자르는 연출에 대한 샤라웃인가 싶었는데, 그 비주얼 스토리텔링이 그 장면에서의 '신발' 씬의 임팩트와 같지는 않았다. 지구에서 발생한 첫 '멀티플'의 집 구조가 <기생충>의 저택과 이미지가 비슷했고, 크리퍼의 외관은 <옥자>나 <괴물>에서 등장한 괴수 모습의 또 다른 변형처럼 느껴졌다. (마마 크리퍼 지키려고 콩벌레들이 전략 쓰는 장면은 지리긴 했음.)

개인적으로는 미키를 프린트하는 '사이클러'의 작동 연출이 좀 웃기다?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프린터가 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출력하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살짝 먹는(?) 디테일이 진짜 웃겼다. 다만 그 내부의 실제 구동 장면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후반부 미키의 악몽(?)에서 출력되는 사람의 단면을 보여주며 그 신비로움이 좀 제거된 것은 많이 아쉬웠다. (애초에 그 씬 자체가 별로였다.)

미키에게 5살의 트라우마로 남은 'Red button'이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 것이 굉장히 노골적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좋은 의미로 남겨졌다. 미키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졌던 차사고의 원인으로 자신이 조수석에 있던 'red button'을 누른 것을 생각하며 평생의 죄책감으로 여겨왔는데, 미키 18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차량의 결함 때문이지, 미키의 잘못도 아니었고, 어머니가 운전을 잘못한 탓도 아니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에 많은 죄책감을 갖고 살아갈 때가 있다. Red button은 미키가 익스펜더블에 지원하고, 부당한 죽음들을 담담히 받아들였던 것의 기저에 있던 죄책감을 상징하는 장치였기 때문에. 영화 후반부에서 그것을 누름으로써 사이클러를 폭발시키고 과거와의 연결고리를, '매일 죽고 싶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죽는 것이 무서웠고.) 그럼에도 다시 살아야 했던' 그 이유와 작별하는 모습이 좋은 결말로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로, 또 좋은 시각적 연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미키의 연인 '나샤'가 방호복을 입고 죽어가는 미키의 곁을 지켰던 장면인데, 방호복이 되게 SF 느낌의 수녀복처럼 의도되어 표현되어서 뭔가 되게 홀리한 느낌을 주었다. 이게 과한 해석이 아니라는 확신이 드는데, 거기서 줌아웃되면서 보여주는 구도가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구도처럼 둘을 잡아서 좀 강한 확신이 들었다.

640px-Michelangelo%27s_Pieta_5450_cropncleaned_edit.jpg 영화 보신 분은 어느 장면인지 알 듯.

문뜨 친구들과의 후기 톡에서는 그냥 그런 의도가 있었다~ 정도로 끝냈는데,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하니 이게 정말 미키를 예수에 빗댄 어떤 상징이 아니었을까 하는 해석이 또 들었다. 진짜로 그런 것이,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난 예수처럼 천대받았던 미키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것도 예수와 다를 바 없다. ('that is my gift to the mankind,' 미키 중 일부는 행성에서 우주복 없이 호흡하기 위한 백신을 만들기 위해 희생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샤가 <피에타>를 재현하며 미키의 곁을 지켰을 때 미키는 사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희생된 것이 아니라 유독한 신경가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미키는 자신이 위험한 일을 대신함으로써 '팀'에 기여하는 느낌이 좋았다고 했지만, 사실 과학자들은 그를 그저 '소모품(expendable)'으로 생각하며 이용했다는 부분이 비극적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제목 <미키 17>이 그래서 일종의 성경 레퍼런스도 있나? 해서 michael 17절 이런 게 있나 찾아봤는데, 마태(matthew)랑 마가(mark)는 있어도 미카엘복음은 없더라. 마가복음이 16절에서 끝나긴 하는데, 이걸 그것과 연결 짓는 것은 좀 무리인 것 같다.)


스토리적인 연출로는 친구들은 플롯이 좀 '해피 엔딩을 위한 갑작스러운 전개, 데우스 엑스 마키나'였다는 평가도 있던데, 내가 원작을 안 읽어서 그런가 그렇게까지 막 부자연스럽지는 않았고. 봉준호 특유의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에도 10분 후에 장면이 상상이 안 되는, 흥미진진한 전개가 계속되었다고 생각하긴 했다. 오락성은 확실했다. 물론 개연성은 좀 아쉬운 부분이 있긴 했는데, 그건 그냥 등장인물들이 멍청해서 좀 납득? 되긴 했지만 역시 좀 아쉽긴 하고. '카이'라든가, 처음에 '냄새 데자뷰'를 일으켰던 여성이 좀 필요 이상으로 조명되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건 원작에서 더 중요한 역할이었다고 한다. 일단 '카이'가 미키 17과 18의 공존을 처음 알아챈 부분에서 큰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맥거핀이긴 했음. 마찬가지로 미키의 친구(라고 불러도 되냐?ㅋㅋ) '티모'의 캐릭터도 그냥 좋은 에피소드랄까, 미키 17의 찌질함을 보여주는 데에는 역할을 했지만 '다리우스 블랭크'와의 갈등은 맥거핀이 맞았다. (애초에 이름이 blank인게 그런 이유였을까? 싶긴 했다.)

아, 이름 이야기 하니까, 어떻게 정치인 이름이 '계엄(martial)'이냐 ㅋㅋ. (*marshall입니다.) MAGA처럼 One and only 문구를 단 빨간 모자를 쓴 지지자, 아내에게 휘둘리며 뜬금 '전시 상황'을 공표한 멍청한 독재자... 이런 게 현실 세계의 트럼프와 윤석열을 빗댄 것 아니냐는 농담이 있던데, 진짜로 어떻게 이걸 윤석열 계엄/트럼프 당선 전에 찍었지? 싶긴 했다 ㅋㅋ. 현실이 영화보다 더 하다 xx. 개인적으로는 마샬 캐릭터가 <설국열차>의 윌포드처럼, 좀 더 카리스마 있는, 필요악(?)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면 좀 더 입체적으로 심도 있는 이야기가 나왔을 것 같은데 너무 우스꽝스러운 파렴치한으로 나와서 좀 아쉽긴 했다. 물론 연기는 좋았음. 아, 연기 얘기 해야지.


연기, 촬영 및 그 외

소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좀 지쳤다. 슬슬 분량이 너무 초과하는 느낌이 들긴 했다. 연출 부분에서 쓸 얘기가 많긴 했지만; 총평 및 감상 이야기 하기 전에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이야기는 좀 빨리 끝내야 할 것 같아서.

일단 이 영화는 "봉준호" 영화인 것도 맞지만 분명, 최대 수혜자는 로버트 패틴슨이다. 내가 본 그의 연기 중에 제일 좋았다. 1인 18역(?)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진짜 미키 17은 멍청해 보였다. 로버트 패틴슨이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도 몰랐고, 찌질하고 자존감 낮고 그냥 캐릭터의 연기를 너무 잘 잡아서 전작 <테넷>이나 <더 배트맨> 같은 작품에서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은 거의 상상하기 힘들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어색한 연기와 섹시함을 장착한 배우가 여기서 슬랩스틱을 하고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기적 성장을 거쳤을지. 웃긴 영화 평 중에 "로버트 패틴슨에게 주연상과 조연상을 모두 주어라"라는 말이 있던데, 진짜 공감할 정도로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좋았다. 미키 18은 또 은근 섹시하고 카리스마 있게 나와서 역체감이 컸다. (근데 설정 상으로는 미키 17과 미키 18의 괴리가 너무 큰 게 좀 납득 어려운 부분이긴 했다.) 마크 러팔로를 비롯한 나샤, 일바 역의 주요 조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근데 티모 역의 스티븐 연은 그냥 스티븐 연이었음. (못한 건 아님.) 왜지? 그냥 황정민 같다.

은막 활동을 하며 영화를 만들다 보니, 이제 영화를 볼 때도 촬영이나 편집 같은 부분도 좀 신경 써서 보는 눈이 생겼는데, 그런 부분에서 이번 영화는 사실 좀 미학적으로는 대단히 인상적인 장면은 없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게, 정말 잘 찍긴 했거든요? 확실히 카메라 워크라던가, 구도며 촬영이 스토리텔링에 충실해서 단 한 장면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같은 생각이 드는 난잡한 컷은 없었다. 확실히 스토리보드를 잘 짜는 감독님이라, 불필요한 어둠이나 '난독성'을 일으키는 장면 하나 없이 모든 컷이 명확했다. CG도 이질감 없이 좋아서 확실히 돈을 많이 쓴 티도 났다. 다만, <기생충>을 볼 때는 몇 개의 몽타주 시퀀스를 보면서 전율이 흐르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정도. 애초에 봉준호가 박찬욱처럼 어느 장면에서 스톱해도 스틸컷 이미지, 배경화면이 나오는 변태 감독은 아니다. 직관적인 오락영화-에 충실한 감독이고, 그것을 대단히 존중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몇 개의 'cinema moment' 후보는 있긴 한데, 보는 동안에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장에서 감동을 느끼는 장면은 솔직히 없었다. 음악도 적재적소에 잘 배치되었고, 편집도 불편하거나 어색한 부분 없이 좋았지만 딱 그 정도. 기억에 남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 이유를 생각하면, 그건 아무래도 내가 CG에서 느끼는 감동의 한계 같다. SF 장르의 한계랄까, <기생충>에서 본 잘 짜여진 몽타주나 우리가 이해하는 배경에서의 좋은 촬영 장면들은 그냥 보기만 해도 감독의 역량, 촬영과 편집의 예술이 잘 느껴졌다면. 이 작품은 아무래도 장르의 특성상 어지간해서는 '시선'의 힘이라기보단 '연출', '조형'의 힘으로 느껴졌달까. 세트장을 잘 만들었네, 나쁘지 않네. 정도의 감상밖에 받지 못했던 건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다.


총평 및 감상

<미키 17>은 <기생충>의 뒤를 잇는 작품이라는 기대를 갖고 보면 분명 아쉬운 영화인 건 맞는 것 같다. 일단 봉준호의 작품은 맞고, 감히 로버트 패틴슨의 인생작,이라고도 생각하지만. 분명 봉준호 작품에서 우리가 오래 보았던 메시지와 감독 특유의 '쪼'가 많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솔직히 절대로 못 만든 영화는 아니고, 분명 극장에서 볼 만한 가치가 있긴 한데. 아무래도 워낙 많은 상을 받고 '찬양'이 이어지는 감독의 작품이다 보니 기대가 커서, 특유의 B급 감성이나 슬랩스틱, 블랙 코미디도 엄근진하게 보다 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원작과 많이 달라서 조금은 당황했다는 친구의 의견이 있었는데, 그건 <설국열차> 때도 그럤으니 봉준호의 상상력이 추가된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반감이 없고. 오히려 원작에 충실한 영화화면 굳이 봉준호가 해야 하나?라는 입장이다. 다만 <미키 17>이 좀 더 휴머니즘적인 영화로, 사람을 '소모품(익스펜더블)'로서, 도구로서 사용하는 사회 속에서 미키가 갖는 삶의 의미라던가 존엄성에 대한 고뇌가 좀 더 담겨있었다면 했다. 봉준호판 SF영화 특유의 사회정치적 메시지랑 짬뽕되면서 좀 애매한 영화가 되었단 아쉬움은 있다. 음, 일단 나는 <옥자>도 좀 노골적이긴 했다고 생각해서, 이번 영화의 악역이 좀 마음에 안 들었다. 어라 근데 글 쓰다 보니까 그 주제가 다 하나로 이어짐.

일단은 미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실 영화에 등장한 모든 인물은 미키의 희생 덕분에 그 행성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미키에게 정확한 정보전달 없이 비윤리적이고 가학적인 실험을 강행하고, 손이 잘려나가는 모습에도 'wow, did you see that?' 하고 웃으며 그를 소모품 취급하는 부분에서. 한 인간에 대한 존경은, 그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고민할 수 있었다.

사실 이건 작년 가을 문학의 뜨락에서도 한 번 톡방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잠깐 그 대화의 시작 부분을 공유하면-

kakao_screenshot1741355555419.png 내가 화제를 던지긴 했다. 엣헴 엣헴.

이때의 논의에서 '존엄성은 결국 인간이 연민을 느끼는 존재에 대한 시혜적(?) 환상에 불과하다,' '존엄성은 결국 약육강식의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 인류가 존재하기 위한 수단이다' 같은 이야기도 많이 나왔는데. 한 친구는 '존엄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좀 내 맘대로 곡해해서 좀 감동적으로 받아들였는데 -

kakao_screenshot1741364262712.png 누군가를 존엄하다고 인식하는 존재는 존엄하다.

대충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느낀 존엄성에 대한 나의 대답은, 모든 생명은 결국 죽기 때문에 아름답다-라는 것이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언젠가 멸함에 있다. 죽어도 다시 환생을 반복하는 미키는 어떻게 보면 '영생'이고, 그렇기에 그의 죽음의 가치도, 삶의 가치도 오히려 낮게 취급된다. 우리가 생명을 소중히 대하는 것은 죽음의 비가역성에 있고, 생애의 유한성, 또는 유일성에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YOLO (You only live once). 모든 선택이 어렵고, 모든 1분 1초가 의미 있는 데에는 우리는 무수한 가능성 중 우리가 걷는 시간만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있다.


영화를 보면서 특히 좋았던 부분은 미키 17이 미키 18과 대립하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는 장면이었다. 미키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은, 그다음으로 출력될 미키 n+1이 본인의 연장선, 연속성을 지닌 자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미키 18과 조우한 미키 17은 그와 자신이 서로 다른 인격체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정말로 그의 죽음이고, 그가 미키 18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장면에서 나는 미키 18 역시 '익스펜더블'의 역설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영원히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해서, 그 사이의 모든 죽음이 죽음이 아닌 것은 아니다. 하나뿐인, 고유한 삶.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윤동주의 말처럼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죽이려 들던 미키 18이, 죽음의 무게를 깨닫고 영화 후반의 선택을 하는 데에도 그런 자각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미키 반스는 항상 죽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미키 17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살고 싶다'라고 생각한 것 아니었을까, 그를 미키 18은 이해했던 것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우리 사회를 보면, 목숨이 하나임에도 너무나도 쉽게 '소모품'처럼 교체되는 삶들이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3D업종에서 일하며 목숨을 잃는 사람들. 미키처럼 그들이 돈이 궁해서 그 일을 택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미키처럼 그들 중 일부는 다소 지능이 낮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존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칼협? 스스로 지원한 일이잖아요?라고 단순히 치부하며 그들의 희생 위에서 우리가 편한 삶을 누리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결국, 개인 차원에서의 존엄과 삶에 대한 고민은 사회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서, 나는 감독 봉준호가 커리어에 걸쳐 질문했던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직시할 수 있는가"와 "그 사회 속에 놓인 약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에 대한 대답이 이 영화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경시하고, 인격체를 부품화하고 대상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우리의 존엄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크리퍼처럼 우리와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외지인을 배척하거나 '소스 재료' 같은 경제성의 자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공존의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헛된 이상으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고, 인간의 기본적 욕구와 권리를 제한하며 착취를 일삼는 부패한 권력자에 우리는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가?

물론 개연성을 포기해 가며 얻은 해피 엔딩이라고 혹자는 욕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런 메시지는 찬성이다. 해피엔딩의 주역은 역시 누가 뭐래도 미키의 애인 나샤 아닐까. 뛰어난 논리와 피지컬로 주변을 설득해 반란을 이끌어내고 아기 크리퍼를 구해내지만, 그녀의 가장 위대한 부분은 소모품 취급받던 미키를 그 자체로 사랑함에 있었다. "그녀는 모든 나를 사랑했다. 심지어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모습(미키 18)까지도." 라는 미키 17의 대사가. 나는 좀 많이 울컥했던 것 같다.

+ 한줄 평 쓰면서 추가) 미키 17도 사실, 저녁에 초대받았을 때 너무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열심히 참았던 게 기억이 난다. 예전의 미키였다면 그 자리에서 죽고 다시 환생하는 것을 택했을 것 같다. 근데 그가 나샤와 있는 미키 18을 본인과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고, 나샤 곁으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그 고통을 참으면서도 살고 싶었던 것 아닐까?

결국은, 사랑이다. 사람을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우리는 존엄성을 발견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게하는 힘이 된다. 사랑은 받는 이에게도, 하는 이에게도 구원이다.


총점 3.5 / 5

한줄평: "누구도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살고 싶은 이유가 없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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