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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가 되고 싶다.

첫 장에 적힌 이야기 (1)

by 인용구
2016년 12월 1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남자답다”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정말 자주 울었고, 남들처럼 흔한 운동 취미 하나 가져보지 않았다. 구기종목은 특히 못해서; 공이 내 손에 들려있으면 이걸 어떻게 하지 못해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 흔히 이야기하는 ‘사내놈’은 못 되는 꼬마였다.


뭐, 사실 그렇다. 중학교 때도 공 한 번 차기를 부담스러워했고, 고등학교 때도 땀 한 번 시원하게 흘려본 날이 며칠이나 되었을까. 아, 팔씨름ㅋㅋㅋ;; 옛날에 네 살 어린 동생한테 낑낑댔던 (사실 졌던 것 같다ㅂㄷ) 기억이 있어서 그 이후로는 해본 적이 없다. 체육 대회마다 나는 부러운 마음으로 관중석에만 있다가, 혹시나 등 떠밀려 나가는 일이 있으면 (제발) 1인분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했다. 체력장을 하는 날은 경악하는 주변 사람들한테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애써 헤실헤실 웃으면서 숨을 곳을 찾는, 그런 비참한 날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 스스로도 그냥 운동하는 구인용이 어색해서, 뭔가 건강해지고 싶다 생각을 하면서도 누구 앞에서 운동을 하지 못하고 숨어서 운동을 했다. 자전거 타고 멀리 나간 중학교에서 철봉을 한다던가, 화장실에서 욕조에 대고 팔굽혀펴기를 한다던가…. 그냥; 폼도 어정쩡하고 약한 체력도 금세 들통이 나니까. 내가 봐도 우스운 모습을 남들한테 보여주기 싫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키나 손발이 커서 남들은 뭔가 더 정상적인 남자의 모습을 기대하니까;; 덩치값 못한다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열심히 노력했다. 일부로 더 무거운 짐을 들고, 오래 걸어도 힘든 내색 안 하고. 아무튼 평균을 웃도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내 딴에서는 남들보다 훨씬 많은 노력과 의지가 필요했음을 고백한다.


아무튼 ‘남자답다’라는 말은 나에게 굉장히 부담스러우면서도 아쉬운, 동시에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그런 추상적인 개념이었다. 힘이 세고 호탕하고, 술 잘 먹고 색을 밝히는 게 남자다운 건가? 생각해 보면 별 거 없는데…. 그래도 부정할 수 없지. 나는 남자답고 싶었당! (비참)


히어로물을 좋아하게 된 데에도 그런 묘한 선망이 작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가슴 뛰게 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내다운’ 캐릭터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초한지>에 등장한 항우였다.


역발산.jpg 항우는 정말 무서운 사나이.


어렸을 때는 유방보다는 항우를 좋아했다. 결국 초한지도 승자의 역사여서일까, 내가 전에 읽었던 초한지는 유방에 굉장히 초점을 맞춘 해석이어서, 유방은 외유내강의 덕 많은 사람으로 그려지는 반면 항우는 힘만 셀뿐 멍청하고 미련하게 표현되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우가 좋았다고. 남자답잖아.


그래서 다시 꺼내든 <초한지>, 조금 머리가 컸으니 어려운 버전으로 읽어볼까 했는데 역시 집중력이 약하고 재미를 추구하는지라 고우영의 만화판으로 읽었다ㅋㅋ. 그리고 나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유방도 항우도 전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다시 읽은 <초한지>의 진짜 주인공은 책사(策士)들이었다. 장량, 한신과 범증. 초한지의 판을 짠 것은 이들이었고, 그 위에 감투를 쓴 늙은 여우와 큰 곰이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진시황 암살에 실패하고 좌절을 이겨내 결국 한을 재건한 장량, 대의를 위해 가랑이를 기고 호구 코스프레를 하며 인내했던 한신, 신선이 될 수 있었지만 관상을 통해 항우가 패배할 것임을 직감하고도 인생을 걸었던 범증.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남자답다’라는 말을 재정의하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나는 의도치 않게, 본능적으로 소위 남성성, Masculinity에 대해 목을 매고 있었는데, 진짜 ‘사나이’란, ‘강함’이란 물리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반하게 한 것은 ‘포부’. 거창해 보일지라도 분명히 관철하고 싶은 이상을 갖는 것이 진정 한 존재로서 가장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내놈이라면 거창한 포부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인내하고, 극복하고, 자기를 계발하면서 모든 것을 쏟아낼 만한. 삶의 궁극적 목표는 때론 삶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2016년 다시 읽은 <초한지>에서 느낀 것이었다. Boys, Be AMBITIOUS.


나의 포부는 무엇이었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물음이었다. 친구 하나는 ‘세계 제일’을 목표로 잡았다. (세계 제일의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나도 모른다.) 만화책의 한 소년은 해적왕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런 거창한 포부는 살면서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기억을 거슬러 보니 하나 괜찮은 답이 있었다. 좋은 아빠 되기. 내가 형성해 온 가치관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걸 위해서 나는 나의 관점을 계속 고민하고 다듬어왔던 것 같다. 이 꿈을 조금 더 확장한 게 ‘좋은 선생님 되기,’ ‘좋은 멘토 되기,’ ‘좋은 선배 되기,’ ‘좋은 친구 되기’….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토론하는 데 있어서는 물러서거나 타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생각에 많이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고. 긍정적인 영향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엇, 생각해 보니 엄청 거창한 일이었어. 한 사람만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면 성공한 게 아닐까? (으으, 남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ㅠㅠ)


아무튼, 잊고 있었다.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나를 다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의 장애에 가까운 신체능력에 불구하고도 나는 ‘남자다움’에 다가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열등감을 이렇게 극복했다. 그래서, 이 참에 오글거리지만; 긴 글을 읽어준 사람들에게 한 번 묻고 싶다.


당신의 포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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