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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지 않다.

첫 장에 적힌 이야기 (2)

by 인용구
2017년 03월 23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좋은 OO.
좋은 아들
좋은 오빠
좋은 친구
좋은 회장
좋은 학생
좋은 선배


매 순간 좋은 OO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런데 계속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정모 장소 예약, 숙제 제출 기한, 부모님 결혼기념일, 밥약... 게으르게 살고 있진 않은데, 분명 바쁘게 살고 있는데 계속 소홀해진다. 실망시킨다. 미안한 일이 생긴다.


나는 괜찮다. 지치지 않는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괜찮았음 하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


"Pressure Makes Diamond" - SF 영화 과목을 가르치는 외국인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지 않다. 흑연이고 싶다. 빛나지 않더라도 쓰이고 싶다. 머무르기 좋도록 무르고 싶다. 문대고 비비면 흔적이 남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그래, 그리고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한대로, 자처한대로. 닳고 있다.


닳고 있다. 부모님이 말했던, 어른들이 말했던 '쉬운 삶'을 문득 생각하게 된다. 그들을 닮고 있다. 예컨대 이런 생각이 든다.


- 놓아버릴까?

차라리 몇 개의 관계들을 놓아버리면 더 소중한 사람들에게 더 잘해줄 수 있을거야. -라고 합리화한다.

너무 많은 일을 벌였어. 능력 밖의 욕심을 부린거야. - 변명을 한다.


그리고 내게 붙은 이름표들을 확인한다. 아들, 친구, 회장... 나를 정의하는 것들. 애정과 책임감으로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것들. 놓을 수 없다. 놓는 데는 잡는 데보다 더 큰 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능력도 용기도 없는 난 그냥 고통받는 수밖에 없다. 호구같이.


무겁다. 답답함에 문득 악몽을 꾸었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나. 아무도 필요없는 나. 홀로, 온전하게. 자유로운. 평온한. 정적인...


정적. 숨은 쉬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아무 목적도 필요성도 없이, 있다. 살아있는지도 모르게. 무섭다.


그래서 열심히 버티고 있는 이 무거움은– Pressure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를 변성시키고 있었다.


놓아버렸다. 관계보다 덜 소중한 것들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나의 부족함이 예민함이 되어 주변 사람들을 찌르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의 어떤 부분들을 놓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요즘은 화날 일이 별로 없다. 그저 슬플 뿐이다. 엿 같은 상황들은 여전하지만, 배에서 끓어오르는 것들이 젖은 가슴을 지나며 식어버린다. 꿀렁꿀렁 뱉어내려던 모진 말들은 현무암처럼 가슴에 굳는다. 까맣게, 구멍 송송 뚫린 채로. 답답하지만, 역시 화내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이 뭐길래…. 놓을 수도 없는 너와 나의 억울한 불균형을 원망한다. 화가 날 뻔 했지만 그저 슬프고 만다.


그래서 한동안 조금 슬펐었다. 내가 남 때문에 나를 포기하는 게 불쌍해서. 바보 같아서. 그러다가도 다시 괜찮은 날이 왔다. 달이 밝은 날, 산책을 하다가 문득 예쁜 생각을 한 내가 너무 기특했던 날. 그리고 어느 하루는 또 주변 사람들 덕분에 깨달았다. 아, 나는 많이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사람이구나. 엄마 말대로, 나보다 먼저 남들을 사랑해서 남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그렇다고 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구나. 나는 나와 내 사람들을 사랑하고, 다시 그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냥 오늘처럼 멘탈이 터지는 날도 있지만, 이렇게 글을 쓰면서 버티는 거다.


누가 물었었다. ‘남들 생각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건 없니?’

-그들과 있다 보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해줄 수 있는지가 보인다. 나는 그 일들을 하고 싶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거다. 그러니, 나는 계속 흑연처럼 살면 된다.


대신 조금 단단해지자, 쉬이 닳지는 않도록. 이 무게를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도록. 천근같이 무겁고, 천금같이 소중한 관계들을 잘 가꿀 수 있도록.

Presure.png 글씨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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