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에 적힌 이야기 (3)
2017년 06월 08일 작성된 글입니다.
생각할수록 카이스트는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든다. 말로 뱉는 순간 그것이 진심이 될 것 같아 안 했었는데, 이런. 국내 이공계에서는 최고로 쳐주는 영재학교-KAIST 교육과정을 밟으면서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마는, 그건 그냥 가시적인 성취일 뿐이고 딱히 그로 인해 내가 추구하는 어떤 목적에 닿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을 해봤다. ‘이거 아니면 뭐 하고 싶은데? 어떤 길을 가고 싶은데?’ 라고 물으면 딱히 답할 말은 없다. 다만, 나를 구속하는 것들- 경제적, 사회적 책임이 없다면 절대 이 길을 걷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하는 동안 즐거운 것들이 있다. 영화를 찍는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을 듣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공유하고 수정하는 과정. 그런 즐거운 것들을 계속 하고 싶다. 물론 이것은 지금도 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카이스트의 누군가는 정말 전공에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임하고 있을 것이다. 극소수의 ‘공부하는 게 즐겁다’ 이외에도, ‘내 꿈을 위해선 이 공부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일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럭저럭 할만하고, 가끔 ‘오, 신기한데’ 하는 수준의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삶을 걸어볼 정도의 어떤 감동은 오지 않는다.
사실, 살아갈 자신은 있다. 남들이 부러워할만큼은 아니더라도 스스로 부끄러워할 정도로 비참한 인생은 살지 않을 것 같다. 뭐, 오만한 놈! 하면서 삶이 나를 패대기 치더라도 고고한 척 버텨내며 꿋꿋이 견뎌낼 자존심은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능력도 기본은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당당히 행복할 수 있는 건…? 기꺼이 하고 싶은 건….
그래.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과 살고 싶다. 단순히 ‘태어났으니 뭐, 적당히 살다 가는 거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보다는 ‘태어난 이상 이 세상에 내 흔적 하나는 이렇게 남겨야 하지 않겠냐’라고 말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 분야는 정확하게 몰라서. 혼자서는 그럴 자신이 없어서 어떤 사명감을 느끼는 사람을 찾고 있다. 거창한 사명감이 아니더라도, 내가 반할만한 사람이면 돼. 자신이 잘 가고 있는지는 끊임없이 고민하더라도, 자신이 가야할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치고 싶다. 그래서 선생님이 되고 싶었나 보다. 내 앞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가 그 꿈에 닿을 수 있게 조금의 도움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오… 글을 적다가 뭔가 생각의 진전이 있었다. 음… 부끄럽지만, 조금 더 목표를 크게 잡아야겠다. 옛날의 <사나이> 글에서 썼던 것처럼, 포부를 조금 키워본다.
(와, 지금 글을 찾아봤는데 하고 싶었던 말이 거기 있었네)
나의 포부는 무엇이었지?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물음이었다. 친구 하나는 ‘세계 제일’을 목표로 잡았다. (세계 제일의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나도 모른다.) 만화책의 한 소년은 해적왕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런 거창한 포부는 살면서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기억을 거슬러 보니 하나 괜찮은 답이 있었다. 좋은 아빠 되기. 내가 형성해 온 가치관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걸 위해서 나는 나의 관점을 계속 고민하고 다듬어왔던 것 같다. 이 꿈을 조금 더 확장한 게 ‘좋은 선생님 되기,’ ‘좋은 멘토 되기,’ ‘좋은 선배 되기,’ ‘좋은 친구 되기’…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엄청 노력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토론하는 데 있어서는 물러서거나 타협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의 생각에 많이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고. 긍정적인 영향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엇, 생각해 보니 엄청 거창한 일이었어. 한 사람만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면 성공한 게 아닐까? (으으, 남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ㅠㅠ)
야, 나 이미 답을 알고 있었네. 그 때도 답을 알고 있었는데 글을 쓰면서 다시 찾았던 거지 아마. 좀 더 구체화하자면, 나는 위에 사명감을 갖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고 했지만, 나 스스로도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꿈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뭐야, 3월 23일에도 같은 얘기를 했었어.
누가 물었었다. ‘남들 생각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건 없니?’
-그들과 있다 보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해줄 수 있는지가 보인다. 나는 그 일들을 하고 싶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거다. 그러니, 나는 계속 흑연처럼 살면 된다. 대신 조금 단단해지자, 쉬이 닳지는 않도록. 이 무게를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도록. 천근같이 무겁고, 천금같이 소중한 관계들을 잘 가꿀 수 있도록.
어, 나 흑연처럼 쓰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노무현만 멋있냐, 유시민도 멋있지.
다시, 기억하자.
- 나는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꿈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꿈을 이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꿈을 이루어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1)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낸다.
2) 유능한 사람이 된다.
3)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된다.
위 세 가지만 지키면 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편해지는 걸. 일단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죄다 이과니까. 이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전공을 살려서 내가 제일 잘하는 이 공부를 더 잘하고 싶다. 그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카이스트에 오길 정말 잘했다.
*PS.
뭐야...? 왜 살지 푸념하려고 시작했다가 생각의 역변을 겪었엌ㅋㅋㅋㅋㅋ.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상충한다. 앞의 세 문단을 끙끙대며 썼는데, 쓰다가 한 10분 넋놓고 뒤에 글을 후루룩 썼다. 완전 의식의 흐름이네; 이런 글도 올리는 까닭은 이게 이 페이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