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ler's identity
인용구
어떤 아름다움은 앎이 아닌 모호에 있습니다. 다음을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병실에서 고모가 깎아준 노란 과일 때문에 아빠는 밖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은 것을 여태 말하지 못했습니다.
붉은 산호 위로 아롱거리는 햇살. 바다의 저 바닥까지 사무치는 빛이 대신 말해주는 물의 투명(透明). 아름다운 것들은 때로 저편에서, 피안에서 우리의 세계로 스며듭니다. 고요한 종소리처럼 파랑(波浪)의 속도로 번져서 천천히 내려앉습니다.
나란 작자는 찬란히 산란하는 빛을 보고도 그 안에 존재하는 색의 개수를 물어야 합니다. 온 힘 다해 피워낸 꽃을 보고 핀셋을 들이밀어 요소마다의 역할을 찾습니다. 그렇게 닦달하고 닦달해서 얻어낸 대답으로, 헤집고 헤집어서 발견한 사실들로 무엇을 전달하려 했는지. 16,777,216이란 숫자와 찢긴 꽃잎에는 어떤 진실이 있는지. 혹시 나의 시는 언어의 점철로, 궁창을 어둡다고 말함으로 탁한 시궁창으로 흐리는 짓은 아니었는지.
규명할수록 빛을 잃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단어로 근사하는 순간 근사함을 잃는 것이. 미지에 굳이 의미를 지우지 않아야 생기는 이미지, 그동안 머물렀던 나의 우주는 어쩌면 실수. 너와 나 사이에 그은 선 너머에 무언가 있음을 믿기로 합니다. 분명한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무의식과 감각의 세계, 한 겹 너머 추상의 공간에 모든 신비가 있다고. 무한과 연속, 영원 같은 것들은 사실, 이렇게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선로 위로 강아지풀만 무성한 그곳. 남방노랑나비 두 마리가 뚝뚝 떨어지는 햇빛 맞으며 헤엄치는 궤적을 보고 얕은 숨소리를 떠올릴 때에. 잊었던 당신의 입술은 마침내 열릴 것입니다.
아빠는 주말에 고모부를 뵈러 갑니다. 나는 아직도 고모부의 아내를 부르는 법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창배 형은 꼭 행복해야 해. 미선이, 미경이 누나도. 고모는 형한테 아무리 나누어도 작아지지 않는 e를 줬거든. 누나는 원주율이 순환소수가 아니라는 증명이야.
복소의 세계를 아우르는 색상환의 나선을 그려 저편에 닿는 꿈을 꿉니다.
그곳에 단 하나의 _______만 더하고, 영영 사라져도 좋겠습니다.
문학의 뜨락에 멋진 후배가 있다. 전에 초승 글에서도 언급한 SJ라는 친구인데, 정모 때 합평하는 것을 보면 글을 읽는 시선 자체는 나와 많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모에 등장하는 글들을 읽고선 주거니 받거니, 서로가 하려던 말을 대신해가며 신명나게, 또 신랄하게 글을 비평하고 나면 아주 흥이 돋는다. 같은 관점을 공유하는 이 친구가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는 이 친구와 나의 지향점은 또 많이 다르다.
나는 글을 쓸 때에 있어 언제나 메시지에서 출발한다. 어떤 감상, 반성, 깨달음 같은 것을 기록하고 공유하기 위해 글을 쓰고, 시를 쓸 때에는 그에 맞는 이미지와 서정성을 부여하려 표현을 다듬는다. 그 과정에서 언어를 가지고 놀다가 언어유희를 발견하면, 글에 그걸 또 넣고 싶어 하는 유치한 욕망이 있다. 결국 나의 글은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데에 집중하고, 난해하거나 모호한 표현을 지양하려 하다 보면 좀 글이 쉬운 편이다. 그것이 나의 아쉬운 부분이다.
SJ는 이미지에서 출발해서 이미지로 끝맺는 글을 쓴다. 작가보다는 글을 매개로 하는 화가라는 인상을 받는데, 두루뭉술하고 환상적인 이미지, 구체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잘 쓰고, 난해하지만 좋은 인상을 남기는 예술가의 문장을 구사한다. 작가의 의도가 직접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고,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을 허락한다. 말하자면, 조금 더 모던한 글을 쓴다.
어느 쪽이 더 잘 쓴 글이냐, 누가 옳으냐 하면 답이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요즘 SJ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크다. 옛날에는 나에게도 문예지 투고를 종용하며 빨리 등단하라고 치켜세워주던 추종자들이 있었는데, 그것도 옛말. 용구의 시는 퇴색한 장르가 되어버렸다. 재밌네요. Fun하긴 한데 좀 뻔하네요. 또 용구 했네요, 그것에 그친다. 솔직히 억까임; 내가 들고 가는 글이 객관적으로 못 쓴 글이면 애초에 들고 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오랫동안 나의 글을 보아왔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겠지만, 동시에 내가 쓰는 글이 한 지점에 고여버렸다는 뼈아픈 말이기도 했다. 한편 SJ의 글은 언제나 호평을 받는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내가 아무리 억까를 해대도 말이다. SJ의 글이 많은 현시대의 동인들에게 좋은 감상을 남기는 것 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부러움과, 나도 심오한 글을 쓰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졸업 준비로 바쁜 지난주에도 거의 열 시간을 이 글을 쓰는 데에 할애했다. SJ가 지난주 정모 때 들고 온 <파랑의 속도>라는 작품에서, "천천히 내려앉습니다"라는 구절의 주어는 도대체 무어냐고 시비를 걸다가, 닦달해서 얻어낸 대답이 "구체적으로 하나를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는 답변이어서, 그때 좀 내가 못됐다고 생각이 들어서. 사실 그 모호함에 사실 아름다움이 있는 것인데, 하는 반성을 했다. 나의 시는 치밀하게 조직되어 모든 단어 선택에 분명한 논리가 있고, 역할이 있고,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시는 좀 뜬금없어도, 말이 안 돼도, 된다. 아름다우면 그만이다. 그것이 시적 허용이다.
너무 꼰대같았던 나의 글을 반성하면서, 난해함 속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오래 고민해서 남긴 적은 글이다. SJ의 글에 대한 인정과 반성을 담아서, 좀 SJ같이 써보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시작(詩作)의 방법론은 여전히 나의 틀 안에 있긴 하다. 아직 정답이 없는 문장을 쓰는 것에는 여전한 벽을 느껴서, 대신 긴 고민 끝에 벼려낸 심오(?)한 문장들로 해석의 난이도를 크게 높였다.
따라서 평소의 내 글보다 난이도가 높았다면 의도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전달되는 감정이나 이미지가 있다면, 혹시 메시지까지 가늠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글을 성공으로 두고 싶다. 문학의 뜨락에서는 참 오랜만에 이 주의 글로 뽑혔으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기쁘다.
시는 다소 불친절할지라도, 브런치에 적는 시의 해설이나 배경에서까지 신비로운 척 컨셉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에서 의도한 내용들을 낱낱이 해체해서 풀어 설명해볼텐데, 이미 시에 대해 나는 충분히 해석을 마쳤다, 정답공개는 원치 않는다, 하면 이후로는 읽지 않아도 좋다. 사실, 노란 과일의 의도나 16,777,216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지 못해도 시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면 그만이긴 하다. 수능문제 풀이식 해석을 하면 오히려 팍 식어버리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사실 아래는 안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허투루 쓴 표현이 하나도 없는 만큼 좀 아까워서? 기록용으로 쓰기는 해보려고 한다. 좀 어려웠다, 설명이 듣고 싶다, 하는 분들도 아래를 읽기 전에 시를 다시 읽으며 조금 더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주면 기쁠 것 같다.
사실 1연 초장부터 말장난이다. 아름다움, 앎(아름)과 다음(다움). 물론 말장난에 그치는 문장은 아니다. 모호함의 미학을 이야기하겠다는 초석을 깔면서, 처음부터 수학에 대한 제재를 깔아보았다. 하나, 둘, 셋, 다음을 말할 수 있는 자연수가 수의 전부가 아니듯. 다음을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이상의 세계, 유리수와 무리수, 나아가 실수를 넘어선 허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미리 예고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제재가 고모의 이야기이다. 어렴풋한 깨달음, 다음을 말할 수 없는 것의 일례로 고모의 병문안을 갔을 때의 분위기로 느꼈던, '살아있는 고모를 뵙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라는 말 못 할 자각이 등장한다. 고모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사실 이제 고모의 얼굴이나 목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병문안을 갔을 때 고모가 깎아주셨던 과일의 맛은 여전히 생생하다. 고백하면 그 과일은 원래는 복숭아였다. 나는 원래 물복(물렁한 복숭아) 파인데, 그날 먹었던 딱복(딱딱한 복숭아)만큼은 정말 맛있었다. 시에서는 이를 노란 과일, 즉 참외로 각색했는데, '병실에서 고모가 깎아준 노란 과일(=참외) 때문에 아빠는 밖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참회의 눈물)'로 어떤 언어적 아이러니와 복합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어서 연출해 보았다.
붉은 산호 위로 아롱거리는 햇살-은 직진성을 가진 빛이 물속에서 일렁이는 모습이 미학적이라고 생각해서 끌어온 이미지다. 무질서함, 유동성을 지닌 빛도 아름다운 것처럼, 어쩌면 해석이 분명한 문장보다 모호함과 불명확성을 가진 문장들이 더 문학으로서의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의 저 바닥까지 사무치는 빛이 말해주는 물의 투명(透明). 투명을 굳이 한자로 강조한 이유는 투명이 사무칠 투(透)에 밝을 명(明)을 쓴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어서 그랬다. 투명함은 무색, 공허한 성질이 아니라 사무치게 밝음이다. 무언가를 가리지 않고,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 숭고함에 대해 좀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었다.
* '바다의 저 바닥까지'- 같은 발음으로 운율감을 형성하는 것은 그냥 내 취향이다. 아래 '찬란히 산란하는'이라던가 '근사'의 중의적 활용, '미지에 굳이 의미를 지우지 않아야 생기는 이미지'에서도 사용했는데 이건 좀 취향이 갈렸다.
생각해 보면 산호 위로 아롱거리는 빛, 물의 다정한 성질을 드러내는 빛은 물속 세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편에서, 피안에서 우리의 세계로 스며드는 것이다. '피안'이라는 단어가 낯설 수도 있는데, 불교 용어로 "사바세계 저쪽에 있는 깨달음의 세계,"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아니하는 관념적으로 생각해 낸 현실 밖의 세계"를 뜻하는 단어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이것 역시 실재의 세계를 벗어난 허(虛)의 세계, 형이상의 세계를 암시하며 큰 주제인 "오일러 항등식"에 대한 맥락을 부여하고 있다. 파랑의 속도로 퍼져서 천천히 내려앉습니다-라는 부분은 SJ의 <파랑의 속도>에 대한 샤라웃. 무엇이 천천히 내려앉는 것이냐 물으면, 구체적으로 하나를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3연과 4연은 내가 시를 쓸 때 활용했던 분명하고 치밀한, 계산적인 문장들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시에서조차 비문을 참지 못하는 인간, 모든 표현과 비유에 논리와 역할을 부여해야 하는 인간. 작자(作者)는 '놈'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지만 글 쓰는 나를 중의적으로 표현한 좀 뻔한 활용이었고. 무지개나 프리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연속적인 스펙트럼, 다채로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데 우리는 고작 '일곱 빛깔 무지개' 따위의 표현으로, 빨주노초파남보 색을 규정지으면서 그것을 축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16,777,216은 컴퓨터 헥스 코드로 표현할 수 있는 #000000~ #FFFFFF, 16^6의 색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쪼개고 쪼갠다 해서 빛에 존재하는 모든 색을 표현할 수는 없다. 다각형을 깎고 깎아도 원이 되지는 않는 것처럼, 원주율의 자릿수를 100의 자리까지 외운다고 해도 π와 같아질 수는 없는 것처럼. 근사하는 순간 근사함을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어떤 것들은 아무리 좋은 비유로 사영(projection)한다고 해도 결국은 그 본질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나의 친절하고 직접적인 표현으로 점철된 시는 장대한 궁창(弓蒼)의 드넓고 푸름을 고작 어둠으로 치부하여 시+궁창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는지. 하는 이야기였다.
무한이나 영원, 연속 같은 관념들은 그 단어를 직접 빌어쓰지 않더라도 종종 우리에게 온다. 병실에서 느꼈던 어색한 침묵 속에서 찰나동안 영원을 상상했던 것처럼, 어쩌면 그런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시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애초에 우리의 유한하고 분명한 세계의 것이 아니다. 저편에서 스며드는 빛처럼 그들은 무의식과 감각, 추상의 세계에서 비롯하는 것이기에 어렴풋하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해서 이미지를 제시해 본 것이 6연이었다. 더 이상 열차가 다니지 않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선로 위에 무성하게 자란 강아지풀. 그 위로 연약한 나비가 무자비한 뙤약볕 속 실바람에도 나풀거리며 꿋꿋이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 그런 풍경에서 우리는 끝이 없는 것과 결국 끝나는 것, 끝난 후에도 이어지는 것들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유한하고 유약한 존재들이 보여주는 어떤 강인함과 불멸성을 말이다.
다시 고모의 제재로 돌아와,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고모부,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가족으로 남아있는 그분과 고모의 자리를 대신한 그의 새 부인을 생각하면 드는 복잡한 감상이 있다. 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던 사촌들을 생각하면 느껴지는 애틋함과, 그들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감정. 고모의 얼굴이, 목소리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형 누나들에게 남아있는 고모의 흔적을 생각하면서, 저편의 세상을 생각해보곤 했다.
아무리 나누어도 작아지지 않는 e는, 미분해도 그대로인 e^x의 성질을 말하면서 동시에 고모가 나의 아빠에게, 어릴 적 나에게도 끝없이 베풀었던 사랑을 의미한다. 창배 형은 언행과 표정에서 그 선한 품성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이다. 형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늘 다정할 수 있는 것은 고모에게 물려받은 사랑 때문일 것이다. 원주율이 순환소수가 아니라는 증명이다-라는 말은 좀 더 해석이 어려운데, 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반복'의 이미지가 정작 원주율에는 없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세대의 반복, 엄마를 닮은 딸. 그러나 운명으로 얽힌 그 둘의 삶이 꼭 굴레처럼 반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나들은 고모보다 행복하게, 건강히 오래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축복의 마음을 담았다.
e와 pi를 소개하며 결국 오일러 항등식에 도달해버렸다. e^(πi) + 1 = 0. 가장 아름다운 등식에 대한 소개를 나무위키에서 긁어오면 다음과 같다.
오일러 수라고 불리는 e는 미적분을 대표하는 수이고, 허수 i는 복소수를 대표한다 할 수 있습니다. 원주율 π는 기하를 대표하고, 0과 1은 어떤 정보를 나타내는 데 필요한 최소 단위에 해당합니다. 이 중요하고 대표적인 숫자들이 단지 +와 =만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수식을 이룬다는 것은 마치 한 줄의 시가 수많은 상황과 감정을 함축하고 있듯이, 이것은 자연의 신비를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한 줄의 시와 같이 느껴집니다.
- 유튜버 "DMT PARK"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을 이해해 보자> 영상 중
복소의 세계를 아우르는 색상환의 나선을 그려 저편에 닿는 꿈을 꿉니다. 그곳에 단 하나의 _______만 더하고, 영영 사라져도 좋겠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했지만, 이 문장에 대해서만큼은 더 말을 얹고 싶지 않다.
오일러 항등식이라는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소재를 끌어와 시를 적는 것에 부담이 좀 있었다. 그러나 그 수학적 의의와 미학에 미칠 만큼의 개인적인 의미를 담아냈는가-에 대해서는 좀 부끄럽지 않은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글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