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살아버렸네
인용구
자해의 목적으로 마셨던 술이
피부에 상흔을 남겼더라면
너는 그걸 보고도 비웃었을까
왜 이렇게 살쪘냐는 꾸중에
달리 할 말이 없어 쓰게 웃었다
죽을 각오로 술을 마시고
열한 시 겨우 눈을 뜨면
또 살아버렸네, 한다
방 같은 쓰레기장
울고 토한 흔적을 보며
어찌 또 살아버렸어, 한다
늘어난 뱃살은 생존의 흔적
나도 딱히 자랑스럽진 않아
그래도 너무 놀리지는 마라
또 술 먹고 싶어지잖아
본격 불효자 글. 내 몸무게 추이를 보니까, 대학에 와서 10Kg가 늘고 대학원에 와서 15Kg가 더 쪘더라. 그래서 결국 내 마음의 마지노선이던 100Kg의 체중도 초과달성해 버렸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잠도 규칙적으로 자고 급식만 먹으니까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건강 관리가 됐는데, 20대에 들어와선 불규칙한 생활에 야식도 자주 먹다 보니 결국 비만이 됐다.
잠을 못 자서, 야식을 먹은 탓에. 스트레스 때문에, 라할 것도 없이 사실 술이 제일 문제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음주다. 이렇게까지 매일 술을 먹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는데. 이십 대 초반까지도 그냥 술은 있으면 먹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술을 찾아서 먹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술 좋다. 맛있지. 또 술 먹는 자리에서는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좋아. 잔 부딪히는 거 설레. 술도 더 달아. 물론 '술자리를 좋아하는 거지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같은 겸양을 떨기에는 혼술을 너무 자주 하긴 한다. 애초에 그런 거짓말 못하겠어.. 술 좋아.. 의식해서 술을 먹지 않는 날이 아니면 기본적으로 술을 먹는- 요즘을 살고 있다.
근데 술 자체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임과 별개로, 술 먹는 나는 가끔 싫을 때가 있다. 술자리에서의 내가 싫은 것도 아니고, 사실 주위에 애주가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도 불만은 없거든. 쉽게 취하지 않고 미묘한 술맛을 잘 파악하며 즐길 줄 아는 스스로에 자부심을 느낄 때도 있는데. 가끔 그냥 진짜 내가 싫을 때가 있고 그 이유를 술에서 찾고는 한다. 웃기죠? 여기에 모순 하나 더하면, 그럴 때에도 나는 술을 먹는다. 어린 왕자가 만난 주정뱅이처럼... 무한동력 음주머신.
상태가 많이 안 좋았을 때는 약간 강제종료(?) 당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필름 끊길 각오로 술을 들이켜보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그거 잘 안 된다. (내가 너무 센 탓임...) 대신 다음날 엄청난 숙취를 겪는다. 숙취는 술자리의 여운이다, 라며 또 정신승리하고 순응하는 편이지만 이럴 때는 좀 반성하게 된다. 역시 과음은 나빠. 진지하게, 별로 똑똑한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시의 화자처럼 필사즉생의 각오로 혼자 뒤지지는 않는다. 그냥 처량하게 몇 잔 홀짝이면서 궁상맞은 글 쓰는 게 전부다. 참고로 2017년 이후로 술 먹고 토해본 적도 없다.
어쩌다 보니 소심한 자해수단이랑 취미가 겹쳐버려서. 언젠가 "술과 담배는 흔적이 안 남아서 좋다"-고 말하고 다닌 적이 있다. 개소리. 흡연자의 몸에 밴 담배 쩐내처럼, 술도 결국 다 살이 되어 조용히 내 몸에 누적되고 있었다. 다행히 부모님이 건강하게 낳아주신 덕에 지방간이라던가, 막 간수치가 높게 나와서 병원에 실려간 적은 없지만 (실제로 내 주위 애주가 중 몇 명은 응급실을 가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데미지가 쌓이고 쌓여 가시적으로 돼지가 되어버렸어.
이런 내가 싫은데, 싫어서 술을 또 먹는 일은 그만둬야지. 증오의 고리를 끊어낼 테다. 졸업 관련 일이 마무리되면, 몇 달은 그냥 1순위 priority로 삶의 정상화를 이뤄낼 각오이다. 여태껏은 대학원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변명이라도 가능했지만, 그 이후로도 삶을 챙기지 못하면 나는 그냥 알코올 중독 의지박약 한심한 인생이 맞다. 운동하며 살도 빼고, 피부과도 다니면서 목의 얼룩도 좀 지우고 (맨날 집중할 때 목 만지는 습관이 있어서 피부가 남아나질 않음), 좀 스스로의 외형에서부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되고 싶다. 책도 읽고 악기도 하나 진득하게 배워보고 싶고 약간 해보고 싶은 게 많은데, 일단 건강부터 챙겨야지.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 오래 더 좋은 사람으로 기능할 것 같아서 그렇다.
그래도 금주선언은 못하겠다. ㅋㅋ 그냥 행복할 때는 행복하게 술 마실래... 대신 술이 나쁜 소리 듣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좀 더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입니다. 술이 오직 선한 것일 수 있도록... 물론 술 먹는 양을 줄여나겠다는 다짐은 한다. 최근에는 문득 깨달은 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내는 방법이 술 먹자고 말하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스스로가 되게 유해한 인간처럼 느껴지는 거다. 나랑 같이 술 먹어주는 당신들이 그렇게 고맙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긴 한데, 꼰대처럼 맨날 술 권하는 이미지로 남고 싶진 않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술 좋아하는 일부 당신들은 알아서 나와 잔 맞춰줄 텐데 말이죠. 그쵸?
맨날 살 좀 빼라는 부모님 말에 좀 서러워서 글을 써봤는데, 이 글을 읽으면 부모님의 억장도 와르르할 것 같아서 좀 죄송하다. 농담처럼 '만약 요절했는데 사인이 술이 아니면 좀 억울할 거 같다'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아버지가 정색한 적 있음. 농담농담. 만수무강할 거외다.
별개로 35% 비만 인구*를 대신해서 조금 항변을 하자면, 우리 사회는 비만 환자에 대해 너무 가혹하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비만은 저소득층, 소외계층에서 더 높게 나타나는 심각한 사회문제이자 엄연한 질병이다.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 운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비만은 더 쉽게 발생하고, 이는 다시 말해 비만을 앓는 사람들은 삶의 질이 낮은 생활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을 비롯해서, 주위에서 비만인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선은 곱지 못하다. 자기 관리의 실패, 게으름의 방증, 의지박약. 이런 구박을 듣는 동안 비만인 사람의 자존감은 더 낮아지고, 스트레스를 받을수록 더 폭식과 폭음의 유혹을 느끼게 된다. 체중 감량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그냥 많은 응원을 보내주면 좋겠다. 실패하더라도 질타 대신에 격려를, 성공했을 때에 많은 칭찬과 축하를 보내주는 주변인이 우리 곁에 더 많았으면 한다.
*질병관리청 비만율 조사 (2012~2023), 2020년 이후 성인 남성 비만율은 45%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