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인용구
언제였더라
네가 좋아졌던 게
칵테일파티 효과의 확장
오직 너만이 일배속으로 움직이고
세상의 채도가 잠시 낮아졌던 날
아무말 않는 너에게 꼭 하고픈 대답이 떠올랐던 날
아마 그날, 너의 외로움이 나를 기다렸던 날
등꽃과 이팝, 눈을 감아도 봄이었던 밤
꽃의 무게로 주저앉은 가지 때문에
자꾸만 네 앞에서 무너지고팠던 날
나란히 걷는 동안 가늠했던 반환점들을 지워나간 날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작은 섬에는 끝없는 사막이 있고
그 사막 어딘가 반짝이는 우물이 있어
그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상상
어느 종교의 기원 사랑의 발명
그 섬에 닿는 파도이고 싶다
너의 쓸쓸한 등에 나를 부딪치고 싶어
그러나 네가 다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산산조각은 나의 몫이기를
부서질 때는 하얗고 싶다
파도처럼 모래를 적시는 파도처럼
있지,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평생 모른 척 해도 좋다
네가 가진 내 조각 하나를
영영 돌려주지 않아도 좋다
*칵테일파티 효과: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집중하는 화자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는 현상.
요즘 자꾸 꿈을 꾼다. 네 앞에서 무너지는 꿈. 눌러놓았던 마음을 전부 고백하는 꿈. 꿈에서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나를 용서해 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잘못한 것 없는 너에게 사과를 받아낸 것이 속상해 울면서 깼다.
꿈 깨, 야 하는데 나는 요즘 잠도 못자고 맨날 꿈만 꾼다. 언젠가는 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향으로 멀어지는데, 너는 한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너를 보는 나를 보여주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그런데 비틀거리며 멀어지는 너의 등을 보는데 어쩐지 가슴이 아렸다. 한번만 안아보고 싶다, 라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겨우 발길을 돌렸다.
그러니까 나는 너의 쓸쓸함을 좋아하는 것 같아. 너의 외로움이 꼭 내 것과 닮아있었다. 여럿 있는 술자리에서 혼자인 네가 신경쓰였다. 사빗이(さびしい) 고개를 기울여 앉아 무언가에 골똘하던 너의 모습을 나는 꽤 오래 쳐다보았고, 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살짝 웃었다.
그때 알게 되었지, 정현종 시의 의미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물에 물을 섞은 것처럼 무색한 사람들 사이에, 그 무료한 흔들림 속에 네가 굳건히 있었다. 망망대해에 홀로 외로운 존재 같았다. 그 때 번개같이 나를 관통하는 감정, 그리고 나는 두려워졌다. 얼마나 무서운 생각이 들었냐면, 네가 나의 종착지여도, 아니, 종착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렸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 말을 입밖으로 내는 것이 나의 파멸이 된다 해도 네 발 아래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이고 싶었다.
우리 한 번은 산책을 같이 나간 적 있다. 네가 나를 불러냈던가, 조금 기뻤는데. 걷는 동안 별 대화를 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침묵이 불편하지 않아서, 나는 그게 꼭 사랑 같았다. 멀리서 라일락인지, 등꽃 향기가 물큰히 풍겨오는데 그게 행복의 전부 같았다. 이팝나무 가로수, 조명 받아 흰 폭죽 같던 꽃들 아래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이쯤에서 돌아가자 하겠지, 생각했던 지점들을 지나칠 때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대로 동틀 때까지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두려운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 말이 턱깨에서 찰랑거렸다.
나는 내색한 적 없다고 생각하는데, 주위에서 다 티난대. 아마 너도 내 마음을 알 것이다. 미안. 지금처럼 모른 척 받아주기만 하면 된다. 착각하지 마, 나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단지 네가 내 평생 찾아왔던 것을 품고 있었을 뿐. 너의 황량하고 안락한 세계 어딘가에 맑게 반짝이는 쉼터가 있고, 그곳에 내가 두고온 소년이 있을 뿐이야.
너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보풀처럼 일어나는 마음은 잘 정리해볼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도 이렇게,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우고 하면 좀 살아갈만 하다. 이렇게 힘들어하면서도 계속 견디는 것을 보면, 너를 진짜 많이 좋아하긴 하나보다 내가.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 이영광, <사랑의 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