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요."
"서쪽 어디?" "중국 말하는 건가? 유럽?"
"그냥, 서쪽으로요."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너는 입을 열었다. 도서관에서부터 너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어폰을 꽂은 채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너는 영득이의 부추김에 못 이기는 척 우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연행당하듯 술자리로 향하는 너의 뒷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다행스러웠다. 밤길에 혼자였다면 너는 어느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으니까. 너의 뒷모습은 어쩐지 슬픈 구석이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하느라 나는 조금 뒤에서 따라 걸었다. 너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양옆에서 떠미는 성진이와 영득이의 끝없는 재잘거림을 맞춰주었다.
오늘은 네가 어떤 상상에 잠겨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피곤함과는 조금 다른 무거움. 내가 피우던 담배에 관심을 보였던 그날의 너와 많이 닮아 있었다. 너는 이따금 고개를 조용히 끄덕거리는 습관이 있다. 방금도 너는 쏟아질 듯한 각도로 시선을 기울이고는 반쯤 비운 맥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너에게만 들리는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앞에 앉아서 너를 관찰하고 있는 나를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서쪽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성진이가 물었다.
여느 술자리와 같은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다가오는 중간고사의 양심 없는 시험 범위에 대한 푸념과 휴학해버릴까 따위의 엄살 섞인 엄포, 종강 후의 여행 계획 등의 이야기 중에 나온, 사실 서로 궁금하지도 않고 내일이면 기억도 못 할 앙케이트. 여름에 일본 맛집 탐방을 할 거라고 이야기하던 성진이가 갑자기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을 하나씩 꼽아보자고 했다. 영득이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라고 답했다. 매춘과 대마 흡연이 합법이라나.
아이고 병신아, 뭐 이 씨발아. 부르짖으며 키득대고 밑바닥을 찍고 난 직후 들은 너의 대답은 솔직히 속된 말로 '갑분싸'였다. 아직 웃음을 채 닦아내지 못한 영득이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눈썹을 한 번 으쓱하고는 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만지작거리던 술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들었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조금은 과장된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행기를 하나 사는 거예요. 개인 경비행기. 그걸 타고 이제 어느 날씨 좋은 날에, 오후 5시쯤? 서쪽으로 나침반을 맞춘 다음에 그냥 끝없이 가는 거죠."
"그니까 왜 하필 서쪽이냐구"
"야, 그거지. 해넘이 보려는 거 아냐?"
영득이가 성진이의 질문에 대신 대답을 하자,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 맞아요. 근데 이제, 지구 자전 속도랑 딱 비행기 속도를 맞추는 거죠. 해가 지지 않고 계속 걸쳐만 있게."
"와, 그거 개쩐다. 근데 그럼 속도가 꽤 빨라야 되지 않나?"
"계산해봐. 지구 반지름이 육천사백 킬로니까. 지름은 육천…. 만이천팔백…."
이런 것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 물리학과 오성진. 이미 계산을 시작했다. 술기운에 더듬거리며 숫자를 읊어대는 성진이와, 그 모습을 놀리며 타박 주는 영득이를 잠시 보고 있다가, 너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뭐, 그렇게. 자전 속도로, 하루의 속도로. 서쪽으로 계속 날아보는 거예요. 태평양이 나올 때까지. 아, 태평양은 동해 쪽이지 참. 미국에서 출발을 해야 되겠구나. 그게 더 좋겠네요. 집 방향으로 오는 거 아니에요. 태평양을 건너보는 거죠. 석양을 향해서. 딱 일정한 높이에서 머무르는 태양을 계속 보면서."
왜 그러고 싶은 건데? 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쁘잖아요. 형, 영화 덩케르크 보셨어요? 놀란 감독 거. 그거 보면 마지막에 공군 비행사가 활공하는 장면이 나와요. 시동도 끄고, 완전 조용하게. 바람처럼 날아요. 저도 그렇게 가고 싶어요. 기름이 다 떨어지면 속도가 천천히 느려지면서 다시 하루가 흐르고, 멈춰있던 태양이 서서히 가라앉고. 저도 어둠 직전에 그렇게…."
그렇게 죽겠다는 거잖아.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라는 게 그런 뜻으로 말한 질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너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린 왕자 썼던 생텍쥐페리도 그렇게 마지막 비행을 갔다가 실종됐대요. 책 읽어보니까 그 사람도 어지간히 해 지는 거 좋아하던데, 아마 서쪽으로 날지 않았을까요. 그리스 신화 읽어보면 사후세계가 서쪽에 있더라고요. 그럼 태평양이 레테 강이 되는 거죠. 하염없이 날면서 조금씩 기억들을 정리를 하는 거예요. 소중했던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곱씹다가. 더 이상 노을에 눈이 아프지 않으면…."
말을 계속 흐리는 네가 왠지 원망스럽다. 갑자기 취기처럼 무언가가 확 치밀어 올라서,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다 들이켰다. 너는 알 수 없는 말을 자꾸만 한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 놓고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이 오늘은 왠지 거슬려서 혀를 씹는다.
“야, 계산해보니까 1 마하는 넘어야겠는데? 경비행기가 아니라 전투기는 되야겠다 인마.”
성진의 말에 너는 사뭇 놀란 척하는 표정을 잠시 짓더니,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반문한다.
“근데 그거 위도 높아지면 줄지 않아요? 지구가 원통이 아니니까….”
“엇 그러네, 잠시만 그럼 다시 계산해 볼게.”
“바보야, 그럼 뭐 극동풍 편서풍 이런 것도 포함해서 계산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가? 잠시만.”
영진이의 감독 아래 성진이는 다시 휴대폰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너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왠지 네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느 날, 해와 함께 사라지는 너의 모습을 상상한다. 내가 볼 수 없는 저 편 어딘가에서 천천히 고도를 낮추는 너를 생각한다. 어쩌면 너는 태평양의 어떤 섬에 착륙할지도 모른다. 그곳에선 화산 몇 개와 장미 한 송이가 너를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죽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는 괴로울 것 같다. 너를 데려간 태양이 다음날 무심히 떠오르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내게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너를, 나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너의 높은 낭만을 오늘은 외면하고 싶다. 내 곁에 머무르기를. 지금처럼 나를 마주 보고 네 많은 이야기들을, 내가 채 이해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계속 들려주기를.
성진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계산을 포기한다. 영득이는 큭큭 웃다가 내게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너는? 너는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 있어?”
나는 너를 본다. 나를 보고 있는 너를 본다. 주황빛 조명 아래 조금 붉게 달아오른 너의 얼굴을 잠시 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