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인용구 페이지를 운영한 것도 이제 햇수로 8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의 성격도 참 많이 변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인용구 페이지의 목적은 사실 일기장이었다. 그날그날의 감정, '나는 어떤 사람인가' 같은 고민이나 두서없는 단상을 올렸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시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기면서 조금 더 문학적인 글을 쓰려고 노력했더랬다. 작년부터는 #citation이라는 해시태그 아래에서 공학도로서, 대학원생으로서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배우는 점들을 기록하는 공간으로도 사용하고 있다.
그 모든 시간, 나의 사회적인 신분은 '이과'였다. 이과 주제에 글을 써왔다. 솔직히, 문학에 대해서는 고작해야 대학 교양 수업에서 주워들은 것이 전부. 등단은커녕 시 작법(作法)도 따로 공부해본 적이 없는 놈이 꼴에 "카이스트 시인"이라는 과분한 수식까지 들었다. 그래서 나는 '용구'라는 글 쓰는 자아를 돌아볼 때, 상반된 두 개의 감정이 동시에 든다. '이과 중에서는 꽤 잘 쓰는 축에 속하지 않나'라는 자부심과 '잘 써봤자 이과 안에서나 먹히는 정도'라는 자격지심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쓰는 시에 '이과 감성'이 묻어나는 것을 많이 경계했다. 이공계의 정체성을 최대한 버리고 내가 읽어온 많은 시인들처럼 문장과 감정에 집중하고자 노력했다. 말하자면 김인육의 <사랑의 물리학> 같은 글을 쓰는 것을 애써 피했다는 말이다. 물론 내 글을 읽는 이과 놈들은 신기하게 그쪽으로 계속 이해를 하더라. 언젠가 한 번은 문학의 뜨락에 들고 간 시에 "하루의 속도로 멀어져 가는 너를 / 나는 붉은 시선으로 쫓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적색편이를 의미하는 건가요'라는 해석에 질색을 하며 부정한 적이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이놈들아!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글에서조차 '속도'와 '속력' 사이에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 고민을 하는 이과 놈이 맞았다.
그래, 내 글에서는 이과 놈 냄새가 나더라. 그냥 내가 언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머리를 한번 거치는 형태임을 깨달았다. 시를 쓸 때도 꼭 언어유희를 집어넣고, 행과 음보를 강박에 가깝게 맞추고. 모든 글이 인과적 개연성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 글은 그런 틀 안에 갇혀 있거나, 그것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로 구분된다. 글을 "이지적으로 쓴다"는 평가가 딱 맞았다.
나는 그게 내 한계인 줄 알았다. 나의 글쓰기는 온통 논리와 계산된 연출로 이뤄진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우러나오는, 설명할 수는 없는데 필연적인' 표현은 내게 나올 수 없겠구나. 물론 술 먹고 쓰는 글은 좀 대충 쓰긴 해. 그게 더 좋을 때도 있고... 이상 같은 사람은 글을 어떻게 썼을까, 기형도는 일필휘지로 그 감각적인 문장들을 써 내려갔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조금 침울해졌다. 그러다가 최근에 발상을 전환하고 콤플렉스가 해결이 됐달까, 앞으로 써야 할 글의 새로운 가닥이 잡혔달까. 깨달음을 얻었다.
계기는 브런치였다. 브런치는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단순히 글과 일상을 공유하기 위한 SNS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애초에 글을 올리기 위해 소정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글을 제대로 써보겠다는 각오가 대부분 있다는 뜻이다. 브런치에서 책을 출간해주는 기회도 많은데, 나 역시 언젠가 저자가 되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니, 그런 쪽으로도 관심을 많이 갖고 합격 수기, 당선작들을 많이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 브런치가, 뿐만 아니라 출판사들이 기대하는 글은 어떤 특별한 경험이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물론 그 전문성이 어떤 학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15년 차 교도관, 계약직, 40대 미혼 여성 등 평범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나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해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글을 쓰는 주체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을 해보아야 했다.
나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글, 나만이 할 수 있는 글을 고민하다가. 그 고민을 연구실에서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야, 너 이과잖아... 너무 당연한 답을 외면하고 있었다. 사실 이걸 깨달은 것은 뜨락 술자리에서였다. 메밀전병을 자르다가 '사회주의 혁명의 열쇠는 죽창이다'라는 결론을 얻은 그 술자리 말이다.
"사실, 사회주의 같이 통제가 가능한 사회는 현실적으로 존재하기가 어렵죠. 카오스 이론만 봐도 상호작용하는 객체 셋이 있으면 그 미래는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로 변화하거든요."
여기서 카오스 이론이 등장한다고? 사실 나는 물리랑 서먹해진지 한참 되어서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쉽게 설명해보면 이중 진자를 상상해보면 된다. 하나의 추가 천장/받침대와 상호작용하는 모델에서는 굉장히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반면, 추가 두 개 이어진 이중 진자는 매우 난해한 움직임을 갖는다. 특히, 초기 상태에서의 아주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다른 동향을 이루는데, 대중에게도 흔히 알려진 이 '나비 효과' 현상이 바로 카오스 이론에 기반하고 있다.
뭐라더라, 변수가 늘어남에 따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뉴턴 역학을 적용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고 했다. 하물며 쇳덩이의 움직임도 예측이 어려운데, 다양한 가치관과 변칙성을 갖는 사람이 모인 이 사회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정말 '물리학과'만이 할 수 있는 기깔난 비유였다. 그런데 심지어 그 다음 말이 킬링 포인트다.
"그렇다고 예측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라그랑지안 역학으로 바라보면 그 혼돈 속에도 질서가 있거든요. 우리가 그 동선이나 전체적인 모양을 하나의 깔끔한 답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현재를 관찰해서 그다음 순간에 대한 예측은 가능하다는 거죠."
와, 감동을 받았다. 이 무질서하고 혼돈만이 가득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어떤 질서를 발견하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는 그런 고무적인 메시지를. 과학적인 사실로 증명해내는 것이다. 이건... 정말 물리학과만이 체득할 수 있는 관점 아닐까. 그것이 물리학을 넘어서 삶에 대한 지혜로 이어지는 순간을 엿본 것 같았다.
정말, '이과'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언제나 자연에서 답을 찾는다. 과학적 지식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지만, 그것을 다시 삶으로 끌어오는 행위, 공학을 통해서 실질적인 쓰임을 얻게 된다. 전공 지식에서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지혜를 도출해낼 수 있다면, 그 또한 공학의 한 형태 아닐까. 예를 들어 물리는 존재와 그 존재에 작용하는 힘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이고 화학은 '상호작용'을 미시적인 관점에서 고찰한다. 그것을 인간과 사회, 관계에 적용시켜 해석해본다면 충분히 인문학의 영역에 대한 비유로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다. 나는 글을 공학의 수단으로 써보려고 한다. 나의 전공 분야인 컴퓨터 비전에서 다루는 문제는 삶의 어떤 부분과 닮아있는지, 그 분야에서 등장하는 방법론은 어떤 인사이트를 제시하는지. 그것을 글로 풀어내 보려고 한다. 이전에도 얘기했지만, 컴퓨터 '비전'은 세상을 바라보는 공학적 '관점'을 연구하는 분야니까... 완벽하지. 아마 그 과정은 나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본디 제대로 어떤 것을 이해하려면, 그 지식을 단순히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면화하여 나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내면화. 생각해보면 글은 정말로, 그것에 최적화된 도구이다. 나의 글의 목적은 언제나 '이해'에 있었다. 이해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에 나는 글을 썼다. 나의 생각과 감정이 틀린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누군가에게 공감받고 싶다는 생각에 글로 정리하고 가끔은 포장했다. 시를 쓸 때에는 난해하고 문학적인 글보다는 쉽고 의도가 분명한 글을 지향했다. #citation도 나의 고단한 연구실 생활을 누군가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쓰고 있다. 동시에 나는 글을 쓰면서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찾고, 비유를 만들며 나도 나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이해하면 그것에 애착이 생긴다. 글 덕분에 나는 나를 더 사랑할 수 있었고, 당신과 연결될 수 있었다.
구독하고 있는 박사 과정을 밟았던 작가님이 최근에 브런치 게시물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나는 너무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되어서, 이제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내가 '이렇다' 하면 사람들이 이런 줄 알고, 내가 '저렇다' 하면 사람들은 저런 줄 안다. 내가 아는 지식도 오직 나만이 아는 지식이고, 내가 모르는 부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오직 나뿐이다." 이 말을 듣는데 너무 외로운 거야, 박사라는 게. 나는 되도록이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같은 이해를 공유했으면 좋겠다. 내가 어떤 연구를 하는지, 요즘 다루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며 나는 왜 괴로워하고 고민하는지. 여전히 이해받고 싶다. 그렇기 위해서 컴퓨터 비전을 조금씩 글로 설명해보려 한다.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통용되는 이야기를 담아서.
진짜로, '연구나 열심히 할 것이지, 글이나 쓰고 자빠졌네'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는데 이 과정이 나한테도 유익한 게 맞는 것 같다. 막상 글을 써보려니까 그 문제를 내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검증하는 데에도 한참이 걸리더라. 정확한 지식을 전달해야 할 것 아니냐. 글을 쓰기 위해서 논문을 다시 읽었다! 그렇게 문제를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다시 공부하니까, 그제야 제대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더라고. 애초에 '비유'라는 행위는 굉장히 이지적인 행위다. 서로 독립적인 것 같은 두 개의 개념 안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는 행위니까. 컴퓨터 비전과 삶을 연결 짓기 위해서는 각각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길이 미친 듯이 글어지고 있다. 뭐래, 글이 길어졌다. 아무튼, "이과지만 글 쓴다"가 아니라, "이과라서 글 쓴다"가 가능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훨씬 글쓰기에 자신감이 붙었다. 또, 이제 무엇을 배우더라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 쓰임과 의미를 고민할 것 같다. "쓰임"ㅋㅋ. 공부를 많이 했던 사람이지만, 앞으로는 그 지식으로부터 내가 창출할 수 있는 가치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사실, 글을 길게 쓴 것은 나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누구나 각자의 전문성이 있다.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생각보다 감동적일지도 모른다. 바둑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나도 <미생>을 보며 감동을 받았는걸.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의 언어로 읽고 듣고 싶다. 그렇게 당신과 삶에 대해 이해를 넓혀가고 싶다.
P.S. 먼 길 돌아와 내가 쓰려는 글은, '칼럼'이다 결국. 이미 엄청 연구된 장르였네.ㅋㅋㅋㅋ 앞으로는 그래서 칼럼도 좀 자주 읽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