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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Apr 09. 2021

내가 당신에게 득이 되는 행동을 하는 이유


1. 나는 왜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가.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이로운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부탁을 들어주거나, 밥을 사주거나, 하다못해 지나가는 동안 문을 잡아주는 것처럼 사소한 행동도 포함해서 말이다. 때로는 그 이로운 행동을 위해 본인의 불편 또는 손해를 감수하기도 한다. 남에게 이로운 행동, 한자 그대로 풀면 '이타적(利他的)'인 행동을 우리는 한다. 그런 행동의 동기를 세 개로 나누어 보았다. 그러자 많은 것들이 분명해졌다. '나는 분명 좋은 일을 했는데 왜 기분이 좋지 않지?' '나는 왜 자꾸 호구 취급을 받지?' 이런 고민들에 대한 답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누구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할지에 대한 기준도 생긴 것 같다. 뭐 근데 이게 철학이나 심리학적 근거를 갖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내 맘대로 분류해본 거니까 재미있게 읽어주면 된다.

 첫 번째 동기는 "선의(善意)"이다. 선의의 행동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냥, 그 행동을 하면 내 기분이 좋거든요. 내가 착한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을 말한다. 선한 사람은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긍정적인 행동을 한다.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상대방에게서 어떤 감사 표현이나 보답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었기에 그런 행동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의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윈윈이다.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전체적으로 플러스의 가치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선의는 귀한 마음이다. 정확히는 희귀(稀貴:드물고 귀함)하다. 그건 박애에 가까운 마음이니까. '어라, 악의적인 행동만 아니면 다 선의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면 일단 끝까지 읽어보자

 두 번째 동기는 "호의(好意)"이다. 호의의 행동은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을 말한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서, 당신을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물론 그 행동 역시 내가 좋아서 할 수 있다. 기뻐하는 당신을 보면 나 역시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에는 "당신"이 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선의의 행동은 그 수혜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행했겠지만, 호의의 행동은 누구에게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행동은 어떻게 보면 '호감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상대방에게 화답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 내가 당신에게 호의를 보이면 당신도 나에게 호의를 표해주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감정에는 "나" 역시 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나"라는 주체가 관여되는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었다.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데 이기심이 존재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 행동은 순수하게 이타적일 수가 있는 것인지. 그래서 위선(僞善)이라는 말에 많이 찔렸고, 호의를 베풀 때에 기대를 품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정을 줄 때에 그 마음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괜찮은 사람-이 되겠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러나 선의와 호의를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런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니야. '너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야. 내가 호의를 베푸는 이유는, 나는 손해를 보겠지만 그만큼 네가 이익을 볼 테니까. 그럼 나한테도 기쁘니까. 왜냐하면 너는 내 사람이니까. 너를 내 안에 두고 나니 그 마음을 이기심이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어졌다.

 그리고 조금 더 당당하게 나를 챙길 수 있었다. 내가 호의를 건네는 대상에게 어느 정도 기대를 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은 유한하거든.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쓴 거고, 소모한 만큼 충전하지 않으면 나는 닳고 말아. 적어도 나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는지에 대한 확인 정도는 바랄 수 있잖아. 내가 자괴감을 느끼면 너도 괴로워할 테니까. 너도 내 안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나를 사랑할 자격이 있어. 너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어느 정도 평화를 찾았다. 박애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하면서 말이다. 나는 요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만족스러운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대부분의 관계에서. 눈치챘겠지만, 아직 세 번째 동기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최근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2. 너를 손절한 이유


 며칠 전은 너의 생일이었다. 페이스북에서 너의 생일을 알려주기에 오랜만에 톡을 걸어 축하 인사를 건네며, "밥 한 번 먹자"라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일날에 모여 같이 술도 먹고 즐겁게 시간을 보냈었는데, 같은 학교를 계속 다니면서 왜 이렇게 소원해졌을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밥 한 번 먹자"는 으레 지켜지지 않는 한국인들만의 형식적인 인사말이지만, 너의 근황도 직접 들을 겸 나는 저녁에 너를 불러내었다.

 메뉴는 배달 회덮밥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외식을 나가자 하기도 조금 신경 쓰이고, 기숙사도 서로 가까워서 휴게실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메뉴였다. "내가 사는 거야"라는 말에 너는 고맙다고 답했던 것 같다. 배달이 도착했다는 연락에, 너에게 미리 휴게실로 가 있으라고 톡을 보냈다. 나는 외투를 입고, 나가 계산을 하고, 기숙사 휴게실로 향했다. 너는 내가 도착하고 5분 후에 도착했다.

 밥을 먹는 동안 기대했던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잘 지내지? 이번 학기 몇 학점 듣는댔나? 동아리는 아직 하고? 나의 질문에 너는 단답형으로 답을 했다. 너의 시선은 계속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도 질문이 떨어져서, 그냥 네 티셔츠의 그림을 보며 밥알을 씹었다. 드물게 이에 닿는 참치 회가 차가웠다. 밥을 다 먹고 나는 한참 너를 기다렸다. 원래 먹는 속도가 느렸던 너는 가끔 킥킥대며 핸드폰에 타자를 입력하느라 더 지체가 되고 있었다. 나도 핸드폰을 보다가 그냥,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갈게 그냥." 너는 아, 그래? 그래라. 라는 짧은 답을 줄 때마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먹은 그릇과 쓰레기를 치워서 나갈 때에도 나는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인사 없이, 너를 손절하기로 했다.


 위의 이야기는 그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다소 많은 각색을 거쳤다. 물론 본인은 알겠지만. 너와 나를 동시에 아는 다른 친구들은 모르도록 쓰는 것이 나의 마지막 예의다. 좀 심란하겠지, 심란해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고. 나한테도 사과랍시고 따로 연락할 필요는 없다. 그게 너의 예의인 거야.

 내가 그 친구를 손절했던 이유는 내가 그에게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밥값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를 좋아했던 내 마음이 아깝다는 생각이. 사실 그날만의 일은 아니었다. 꽤 오래전부터, 그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몹시 씁쓸했다. 같이 있었지만 별로 정을 나누지 못한 기분.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게 나았겠다는 후회가 들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거기서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이 친구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구나. 호감 없이도 꽤 오랜 시간을 너를 신경 쓰며 관계를 지속해왔구나.

 비단 이 친구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나는 호감이 없을지라도 누군가를 만날 때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아냐, '최선'이 아니라 '최소한'은 하는 편이다. 일정을 조율하고 식당을 알아보고 총무를 자처하고 n빵 할 때는 적당히 버림 해서 내가 조금 더 낸다. 상대방이 후배라면 대개 내가 사고. 절대 시간과 돈이 많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게 나한테는 몸에 배어있다. 그게 나한테는 예의다. 

 그렇다.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세 번째 동기는 "예의(禮誼)"이다. 예의는 내가 좋아서, 당신이 좋아서, 이런 긍정적인 감정을 떠나서 관계에서 사람이 갖는 책임감을 말한다. 선의, 호의와는 다르게 '뜻 의(意)'자 대신 '옳을 의(誼)'자를 쓴다. 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게 맞으니까. 후배가 선배에게,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갖추는 것만이 예의가 아니다. 선배로서의 도리, 친구로서의 도리. 나와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맺게 된 사람에게 갖는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가 예의다. 

 나는 정이 많은 편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부터, 어느 정도의 호감(정)을 마련해간다. 관계라는 게 정을 주고받아야 돈독해지는데, 그러려면 먼저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냐. 눈치 싸움하는 것이 나는 더 힘들어서, 그냥 내가 먼저 주고 말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호의를 표하면 어떤 사람은 그만큼 부응해주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돌아오는 호의를 느낄 수 없다를 떠나서, 예의조차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 정이 떨어진다. 사실 예의로만 사람을 대해도 관계 이어갈 수 있거든. 예의나 선의나 받는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을 테니까. 애초에 서로의 마음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사람의 동기보다는 그 행동에 따른 나의 이익을 더 신경 쓰거든 보통.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예의라는 세 번째 동기를 인지하지 못했다. 불필요한 관계들을 대하며, 이들에게 자꾸 손해를 감수하며 맞춰주는 이유가 내게 아직 정이 남아있기 때문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더 이상 이 관계에서 기대하는 것이 없었다. 내가 호의로 그들을 대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 그들의 호의를 갈구하지 않았다. 다만, 나만큼의 예의만은 갖춰주기를 바랐다. 그 말은 나도 그들을 예의로 대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었다.

 나는 제법 예의를 과하게 차리는 편인 것 같다. 나는 최소한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나를 착한 사람으로 착각하고는 한다. 그게 좋은 거라 믿었지만, 그건 나의 마음과 자원이 무한할 때나 가능한 얘기고. 마음에도 없는 사람한테 너무 지출이 많았다. 감사할 줄도 모르는 이들, 남 좋은 일 하느라 자꾸 나의 시간과 돈, 감정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러니 호구 소리를 듣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고 예의로 만나는 사람들을 분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또 일방적으로 인간관계 막 쳐내고 선 그으면 그건 못된 거지. 적당히, 소중한 사람들에게 소홀하지 않도록, 나한테 이만큼의 예의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예의로 대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고민해 보아야겠다.


 또 글이 엄청 기네요. 재밌게 읽으라 해놓고는, 생각보다 무겁게 글이 흘러버려서 여기까지 읽어준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짧게 요약드릴게요.

 예의를 호의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봤습니다. 종업원이 당신에게 웃어준대도 그게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거죠. 절대 그런 착각을 하지는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저의 마음속에 있는 예의와 호의조차 구분하지 못했었네요. 여태껏 '선의'와 '호의'라는 키워드 만으로 이타적 행동을 분류했는데, 돌아보니 '예의'라는 책임감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던 관계가 많았습니다. 이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만큼이나,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마음에도 솔직해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관계의 자세를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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