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것에 지지 말기
나는 롤(리그 오브 레전드)이라는 게임을 꽤 오랜 시간 했다. 겨우 골드 랭크에 머무르는 사람으로서 결코 롤을 잘하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만, 매일 첫 승리 보상을 챙기며 현금 투자 하나 없이 모든 챔피언을 구매했을 정도이니 롤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허비)한 사람인 것은 맞다. 엄마 미안ㅎ. 요즘은 게임을 혼자 돌리는 일은 많지 않고,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자주 돌리는 편이다. 사실 다 실력이 고만고만한데, 내가 성격이 더러워서 친구들한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많이 한다. 그걸 묵묵히 들어주는 좋은 녀석들이라 다행이다.
그중에서도 "냉동여름" (닉네임이다. 그 친구의 명예를 위해 살짝 바꿨다.)이는 사실, 객관적으로 못한다. 이 새끼는 실력이 안 는다. 농담이고, 내가 맨날 면박을 주는데도 나랑 놀아주는 고마운 파트너다. 서포터로는 꽤 쓸만한 실력을 갖고 있고, 포지션도 안 가리고 챔피언 폭도 넓어서 그냥 다양하게 조합해보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 친구의 가장 좋은 점은 쉽게 "GG"를 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GG (Good game)는 '좋은 게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게임이 끝날 때 상대방에게 하는 인사다. 유사한 말로는 WP (well played), ㅅㄱ (수고하셨습니다) 등이 있다. 이렇게까지만 설명하면 게임을 안 하는 사람들은 '엥 냉동여름 친구는 게임 끝날 때 인사도 안 해요? 예의 없는 친구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게이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GG를 친다'는 말은 항복과 같은 말이다. 게임이 끝날 때 하는 인사를 게임 중에 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졌으니 게임을 여기까지 하죠. 돌을 던지는 것, 킹을 넘어뜨리는 것과 같은 게임 포기의 표현인 것이다.
여름이는 쉽사리 항복하는 법이 없다. 적들이 우리 진영 안방까지 들어와도, 아군이 전의를 상실한 채 상대에게 계속 죽어줘도, 본인의 캐릭터가 쓸모 없이 일곱 번 쓰러지고 여덟 번째 일어나도 말이다. 나도 원래는 잘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어차피 질 게임을 계속하는 게 시간 낭비고 감정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항복 버튼을 누르곤 했는데, 여름이 때문에 (덕분에?) 게임을 더 이어가는 일도 많았다. 물론 여름이의 고집으로 게임을 이어가서 우리가 상황을 뒤집고 역전승을 거두는 일은 손에 꼽게 적었다. 그럴 때마다 역시 시간 낭비였다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나는 여름이가 쉽게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 낭만적이잖아, 보통 드라마는 그런 순간에 쓰여지거든. 역전승을 이뤄낼 때의 쾌감은 진짜 어나더레벨이었다.
오늘은 '지다'라는 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봤다. 게임을 지다. 해가 지다. 꽃이 지다. 모두가 어떤 '끝'을 이야기하는 단어였다. 그것도 새드 엔딩이었다. '-지다'라는 어미도 느낌이 죄다 힘이 빠진다. 사라지다. 잊혀지다. (*잊히다가 맞는 표현이기는 하다.) 망가지다. 쓰러지다. 우울해지다. 등등. 아무래도 피동 표현이다 보니 약간 수동적인, 어쩔 수 없는, 타의적인 표현이라 그런 것 같다. (물론 행복해지다-처럼 긍정적인 표현에도 사용 가능하긴 하다. 여전히 능동적인 느낌은 아니지만)
지는 것은, -지는 것은 그 대상의 의지와는 무관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존재보다 더 거대한 무언가에 휩쓸려. 진다, 우리는. 그게 조금 슬퍼서, '지다'라는 표현을 대체할 조금 더 희망적인 표현을 찾아보았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이다. 해가 지는 것은 태양이 우리에게 빛을 거두고 어둠 속에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준 지구 반대편을 비치기 위해 잠시 우리를 떠나는 것이다. 꽃이 지는 것은 아름다움이 끝나고 땅에 떨어져 썩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무 속을 흐르며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새로운 존재에게 공간을 남겨주는 것이다. 넘어지는 것은, 딛고 있던 땅의 단단함을 실감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는 것에 희망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퍽, 시 같았다. 마음이 따뜻해 졌다.
그런데 '패배한다'라는 의미의 '지다'는 대체할 표현을 찾기가 어려웠다. 패배는 너무나 명확한, 말 그대로 패배여서. 그것에 긍정을 부여하는 것이 뭐랄까 변명 같았다. '정신 승리' 같았다. 그런데 나는 다른 수많은 '지는 것'에 대해서는 잘만 긍정하지 않았는가. '지다'라는 말에 지지 않았다. 압도당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니 '지다'에서 희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꽤. 의미 있었다.
좋아하는 영어 시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Rage, rage against the dying light." 아, 이건 해석하면 맛이 좀 덜 사는데. 그리고 전문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토마스 딜런의 시이다.) 말하자면 '지는 것에 지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운명의 놀음말에 불과하다. 모두가 태어나 삶에 대한 나름의 계획과 기대가 있었겠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마음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인생 최대의 성취를 이룬 바로 다음날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는다 해도 항변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토마스 딜런은 그것에 순응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분노하고, 저항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불멸과 영원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운명 앞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시에서도 "Though wise men at their end know dark is right"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지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 내에서, 우리의 의지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이겠다. 허무함 속에서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주고 연결되고 잠시라도 기억되기 위해서 분투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죽는 존재이기 때문에, 필사적(必死的)이어야 한다.
지지 말자. 지더라도, 지치더라도. GG 치지 말자. 좋은 교훈이다. 그래야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굿 게임이 된다. 오늘 롤을 접속하는 사람들은 긴장하는 게 좋을 것이다. 사전에 포기를 지운 하이머딩거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