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love is to live, to buy.
그날 술자리의 주요 안건은 연구실 형의 연애 상담이었다. 상담보다는 고민, 혹은 넋두리에 가까웠다. 함께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몇 년째 교제 중이던 여자친구가 점점 철없게만 느껴진다는 말, 기대고 기대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그게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말. 당장 본인도 바쁘고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의 관계를 따져보았을 때... 이미 '잠시 따로 시간을 갖기로 했다'는 말에서 한 연애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말하는 형의 모습에서 느껴졌던 것은 지긋지긋함이나 후련함 어느 쪽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정, 또는 여전히 어떤 부분에선 깊기만 한 사랑, 한 마디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 진부하고 사사로운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결코 쓸데없거나 남 일 같지는 않은, 사랑 이야기. 형이 담배를 피우러 간 사이, 잠깐 고개를 들고 ‘사랑이 뭘까’ 생각해봤다.
전부터 사랑을 규명해보고자 하는 시도를 여럿 했었고, 질문이 들어올 때 써먹을 만한 문장들도 몇 개 생각해내기도 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자신처럼 느끼는 것이다.
사랑은 감정이나 행동이 아닌 태도이다.
사랑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름이 생기는 것이다.
그날은 직전의 대화 때문인지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한 것을 연구실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
“…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거든요, ‘운은 준비와 기회가 만나는 것’이다. 비슷하게 사랑은 기대와 만족이 만나는 거 아닐까 싶어요.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바라고, 그것을 그 대상이 만족시켜주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죠. 그 지점은 관계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결국 기대가 있어야 하고, 만족이 있어야 하고. 그 둘이 만날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가끔 상대방에게 그 사람이 저에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기대하기도 해요. 그건 불행이에요. 짝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인 거예요. 결국 그것이 진짜 사랑이 되려면 상대방이 더 노력하든지 제가 기대를 줄이든지 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제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건네주는 사람들도 있죠. 너무 감사하고 미안하지만, 제가 그 사람들을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갑자기 떠오른 표현이었지만,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열심히 들어주는 동료들 덕분에 나는 신이 나서 말을 막힘없이 쏟아냈다.
“이게 꼭 막 연인 관계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지금 보니까 되게 보편적인 문장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예를 들어 저는 제 컴퓨터를 사랑해요. 제가 컴퓨터한테 요구하는 기능이 있고, 그걸 잘 수행해주니까. 연애는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이 이제 그 기대-만족 지점을 조율해나가는 과정 아닐까 싶어요. 상대방을 더 알아가고, 그러면서 내가 필요한 것,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알아가면서 이제 사랑이라는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 가늠해보는 거죠.”
마침 주인공인 형이 돌아와서 나의 발언 시간은 끝났지만, 좋은 표현이라며 글로 써도 되겠다는 주변의 말에 나도 내심 동의하며 휴대폰에 메모해두었다. 사랑은 기대와 만족이 만나는 것이다. 연구실 형의 연애가 끝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당신의 기대가 버거워서, 당신이 내게 만족을 주지 못해서, 내가 당신에게 기대하는 게 더 이상 없어서. 그러나 기대와 만족의 비대칭은 섭섭함 또는 미안함을 낳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결국 사랑은 끝이 난다. 사랑은 타협이었다. 당신과의, 나 자신과의 타협이었다.
자판 앞에 앉아 이 생각을 글에 담으려 노력해봤는데, 시에 담기에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함축하기에는 너무 많은 해설이 필요해서, 어느새 단상에 불과했던 문장은 이론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발견한 사랑의 면모는 다소 경제적인 개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대와 만족, 다른 말로 수요와 공급 아닌가?! 결국 사랑은 '값'이 있다. 작은 기대와 그만큼의 만족을 주는 관계도 분명 사랑이지만, 그 비용은 통상적인 연인과의 그것과는 같지 않다. 연인끼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할 것을 약속한 관계인만큼 서로의 기대에 만족을 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렇게 주고받는 감정이 커지는 만큼 그 관계는 귀해진다. 물론 기대하는 것의 내용이 다를 뿐, 우정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관계도 결국 값이 존재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세속적인(?)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럴 때는 조금 씁쓸해진다. 크큭... 사랑도 결국 "거래"잖아? 드라마 <가을동화>의 명대사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 얼마..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가 엄청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랑이 조금 더 숭고한 것이라고 믿었다. 대가나 조건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해타산 같은 거는 아무래도 좋은.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믿음은 원빈의 중2병 대사보다 더 철없고 추상적인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사랑에는 값이 있다. 사랑은 비용이 든다. 돈과 시간, 마음과 정성을 쏟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 느낌을 줄 수 없다. 물론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값을 매길 수 없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듯, 사랑 역시 그렇다. 사랑에는 분명한 가치가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사랑은 당신을 내 안에 들이는 것이다. 당신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일부를 내놓아야 한다. 그 '거래'를 사랑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그리 세속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이 '가치'의 설정이 사람마다 달라서, 다시 말해 가치관의 차이가 결국 줬다고 생각한 사랑과 상대방이 받은 사랑의 괴리를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연애는 둘의 일치하는 가치관, 또는 "같이관"(ㅈㅅ)을 형성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 엄청난 말장난이 생각났는데, 어떻게 보면 이 사랑가격론(?)의 적절한 요약이 아닐까 싶어서 그것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사랑함은 살아감과 다르지 않다.
To love is to live, 사랑은 사는 것이다.
사랑은, 사는 것이다.
나를 지불하여 당신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