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1) - 우리는 MBTI 시대에 살고 있다.
또 MBTI가 유행인가 보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또 새로운 디자인에 똑같은 내용을 담은 MBTI 검사 결과 이미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MBTI는 유행을 넘어서서 하나의 시대가 된 것 아닐까 싶다. 우리는 MBTI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젠장.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나는 MBTI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 MBTI 맹신자들은 "혹시 INTP? ENTP?"라면서 나를 또 판단하려 드는데, 절대로 내가 INTP거나 ENTP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근데 검사를 해보면 열에 아홉은 (I 또는 E) NTP가 나오긴 한다. 젠장!! 사실 엄청나게 MBTI를 혐오하는 것까진 아니긴 한데, 자주 툭탁거렸던 (지금은 졸업한) 연구실 형이 "자신은 소개팅 받을 때도 상대가 ENFJ가 아니면 만나지도 않는다"며 노골적인 MBTI 사랑을 드러냈을 때 반발심리로 "MBTI가 세상을 망친다"라고 꼬집으면서 이게 시작이 됐다.
- 어떻게 인간 성격 유형을 4-dimensional Boolean space만으로 표현할 수가 있어요?
- 그거 과학적으로도 큰 의미가 없는 게, 심리학이나 통계학 전문가도 아닌 무슨 모녀가 뇌피셜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거 아시죠?
- MBTI 때문에 I-E는 인싸-아싸, F-T는 공감 능력자-사이코패스 이런 이미지 생기는 것도 너무 안 건강해요.
이러한 근거들을 들어가며 MBTI를 싫어할 이유를 찾다 보니, 어느새 반쯤 농담으로 주장했던 말들이 반쯤 진심이 되고 말았다.
물론 MBTI 재밌다. 나도 처음 접했을 때는 백 개에 달하는 문항을 답하며 검사를 해보고, "오, 나 완전 I랑 E랑 반반이네. T랑 F도 거의 반반이네." 하면서 막 의미 부여하면서, 막 나랑 궁합 좋다는 유형도 찾아보고 몇 시간을 재미 봤다. 원래 유사 과학이 재밌는 법이다. 고백하면 나는 직전 문장에서 MBTI를 유사 과학이라고 했지만, 이러한 성격 유형이 갖는 통계적 correlation은 유의미한 수준이라고도 내심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일반화는 해선 안 되지만 말이다.
MBTI는 분명 효과적인 수단이다. 신빙성을 떠나서, 본인이 생각하는 본인의 이미지를 4개의 척도에서 분류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ㅇㅋ 인정, Accept!! 그래도 작금의 MBTI의 활용 실태는 뇌절이다. 225화까지 연재된 <혈액형에 관한 간단한 고찰> 웹툰과 비교해서도 말이다.
차라리 혈액형은 위급 상황에서 의미라도 있지, 왜들 그렇게 서로의 MBTI를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다. TV에서도, 현실에서도, 사람을 만날 때 "MBTI가 어떻게 되세요?"는 거의 고정 질문이 되고 말았다. 알파벳 4개 주워 들었다고 그 사람에 대한 판독이 끝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이후의 대화에서도 끊임없이 "네가 I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라든가, "오잉? 너 F라고 하지 않았어?"라든가. 이미 MBTI로 구축된 이미지에 그 사람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이 이어지는 것에 염증이 난다.
그래, 내가 싫어하는 것은 MBTI 그 자체보다는, 초면에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질문을 주고받는 것에 가깝다. 뭐랄까... 너무 관계를 쉽게 접근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할까? 라떼는 말이다,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 스무고개를 열 번도 넘었다. "여가 시간에는 뭘 주로 하세요?" "좋아하는 책 있으신가요?"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 있어요?" 상대방과 공감의 영역을 찾아가기 위한 무수한 노력. 그 과정 자체가 대화였고, 서로에 대한 호감과 이해를 쌓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아, 이 사람은 집돌이구나.' '현실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구나.' 그러면서 상대방의 MBTI를 가늠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런 문답은 MBTI 검사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끼리는 그 결론을, 4글자 암호를 주고받는 것이다.
- 저는 INTP에요.
- 와. 정말요. 저는 ESTJ에요.
- 오…. 우리 둘 다 T네요.
... 딱할 지경이다. 16개 유형 중에 15개 유형이 당신과 하나 이상의 알파벳을 공유한다.
MBTI는 아이스 브레이킹, 그러니까 어색함을 덜고자 하는 하나의 콘텐츠로서 의미는 있겠다마는, 딱 거기까지다. 졸업한 연구실 형처럼 특정 MBTI에 대한 강력한 기호가 있는지 않는 이상, (나는 그것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사례로 보지만) MBTI는 Bㅔ리 TMI다. 당신의 MBTI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당신과 친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상대방의 MBTI에 따라 대화 전략을 수정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세상에는 낯가리는 E도 있고, 술자리 좋아하는 I도 있잖아. 결국 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세계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MBTI는 하나의 척도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영양가 있는 척도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MBTI의 4개 기준이 얼마나 서로 orthogonal하고 좋은 basis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당신은 세상을 인식할 때 감각에 의존하시나요? 직관에 의존하시나요?"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술 좋아하세요?" "마블 영화 챙겨 보세요? 팀 아이언맨? 팀 캡틴?" 등이 있겠다. 이들이 나의 basis를 이루는 벡터들이고…. 아, orthogonal이니 basis니 해서 죄송합니다. 이들이 나의 근간을 이루는(?) 독립된 주요 관심사들이고, 그 질문의 대답에 따라 나는 순식간에 엄청난 내적 친밀감을 형성하고 눈을 반짝이며 당신을 보게 될 수도 있다. 내가 만든 척도에서 나는 ISTJ다. ISTJ는 Iron man - Soju – The McDonald's – Jjikmeok을 의미한다. (억지스러운 건 넘어가 줘라; 끼워 맞추느라 힘들었다.)
MBTI가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표현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진 않겠다. 다만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준비한 질문을 듣고 싶다. 질문은 던지는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당신이 나에게 궁금해하는 것, 당신이 평소에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를 여러 예시를 들어가며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16개 유형 중 하나가 아닌, 유일하고 특별한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다. 한 줄 요약이 불가능한, 둘만의 대화를 만들어가면 참 재미있지 않겠나.
내가 본 클립이 많지는 않은데, 유퀴즈에서 다비치한테도, 김영하 작가한테도 MBTI를 물어보더라. MBTI 설마 유퀴즈 고정 질문됨? 에반데;; 아무튼, 김영하가 내놓은 답변이 명답이었다. 영상은 유튜브에 있으니까 직접 보기를 권한다. 내가 불만만 늘어놓을 때 MBTI라는 유행의 도구를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이게... 작가?
요즘 인스타 스토리에 올라오는 MBTI 검사 앱이 '남들이 보는 나'에 대해서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는 것 같긴 하더라. 물론 질문들이 너무 노골적으로 그냥 MBTI 유형에 맞춰서 재미는 없어 보였다. 나도… 유행이라길래 해봤지….
MBTI가 유행인지 벌써 한참이 되었는데 갑자기 MBTI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서 당황한 사람들도 있겠다. 혹시 당신이 MBTI를 제법 믿는 사람이라면 늦었지만 사과를 전하고 싶다. 나에게 MBTI를 물어보는 당신에게 어떠한 악의도 없었다는 것을 나도 안다. 사실 이 글은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위한 초석에 가깝다. 내가 정말 불편한 것은 MBTI가 아니라 우리 시대가 자꾸만 애먼 데서 갈구하는 편리함이다. 벌써 꼰대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일침'은 하루에 하나로 충분하니 이건 나중에 다른 글로 다루도록 하겠다.
나도 나름 사회화가 된 인간이라, "MBTI가 뭐예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어떻게 사람의 성격 유형을 4-dimensional boolean space에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로 시작하며 쏘아붙이고 그러진 않는다. 아마 적당히 그날 내 컨디션에 따라 MBTI 하나를 대답하고, 예의상 당신의 MBTI도 되물어볼 것이다. 만약 내가 MBTI를 싫어하는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한다면 그건 당신과 제법 친해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길게 얘기할 수 있는 화젯거리를 던지기 위함에서 비롯한 것이다. 물론 그것도 당신이 T일 때에 한정된 얘기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