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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Jul 03. 2022

우리의 이름은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을 만나다.


0. 97년생 구인용


    "인용구"라는 필명을 쓰고 있지만, 사실 내 본명은 구인용이다.


    인용, 구. 애초에 구 씨 성도 특이한 편에 들어가지만, 나는 살면서 "인용"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으로 아래 같은 DM이 왔을 때 솔직히 내가 느낀 감정은 호기심보다는 경계심에 가까웠다. 


구인용 + 구인용 = 십팔인용?! 근데 나 평소에 "짱"이라는 말 쓰는구나..

    이름, 성씨가 같은 사람도 처음인데 심지어 나이까지 같다고? 82년생 김지영도 아니고 97년생 구인용이 둘 이상 존재한다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나아가 독립 출판 얘기까지 꺼낸다는 것이 우연이라기엔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장난 같았다. 내 꿈이 출간 작가인 건 어떻게 알고.. 사기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에 들었지만, 나 원래 보이스피싱 같은 거 와도 좀 놀아주는 거 재밌어해서..ㅎㅎ 일단은 장단을 맞춰보기로 했다.

    근데 하나 고백하면, 나 사실 칭찬에 되게 약하다. 내 글을 읽고 메시지를 주시는 분들께는 황송함에 몸을 떨며 넙죽 엎드리는 편이다. 내가 쓴 글들, 브런치에 올린 글까지 다 읽어보았다고 말하는 구인용 씨에게 나는 이미 어느 정도 긴장을 풀어버린 상태였다. 아니 애초에 구인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쁜 사람일 수가 없다니까! 인스타그램을 살펴봐도 위험한 사람 같은 느낌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내게 연락을 주기 전의 게시물들을 꼼꼼히 읽어보니 진짜로 책 디자인에 관심이 있고 이름이 "구인용"인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DM으로 그분이 보내주신 자작시 하나가 너무 내 취향을 저격해버려서 나도 이 분이 더 궁금해졌다.


나의 흠과 너의 흠이 만나는 곳에도
그 틈에도 아마 싹이 트고 꽃이 필 것이다

흠은 흠이 아니고
그저 틈일 그곳에서
우리는 숨을 쉴 것이고
우리에게서도 꽃향기가 날 것이다


    아아,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지 말랬는데. 근데 나는 벌써 이 사람의 이름과 나이, 그 이상을 알게 된 것만 같았다. 글이 그렇다. 어느 정도 글쓴이를 읽을 수 있다. 보내주신 다른 글들에서도 예민한 감수성과, 기록하는 행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로 괜찮은 사람.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구인용 씨에게,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좋다고 답했다.



1. 같지만 다른 사람


    구인용 씨가 대전을 방문할 일이 있다기에, 차주 주말에 나는 학교 앞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약속은 잡았지만 당일까지도 사실 망설임이 컸다. 이것이 혹시 고도화된 장기 매매꾼의 전략이라면? 그보다도, 서로 얼굴도 모르고 메시지 몇 개 주고받은 게 다인데 어색하면 어떡하지? 생각해보니 그분은 내 글을 꽤 많이 읽으셨는데, 직접 보고 대화하면 실망하시는 거 아니야?

    그러던 하루는 그분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는데,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이어트 계획표 같은 것이었는데, 키 180 후반에 몸무게 90 중반, 나와 거의 유사한 성분표(?)를 가지신 것이었다! 이름과 성, 나이까지 같은데 키, 몸무게까지 비슷하다니. 이쯤 되니 거의 무서울 지경이었다. 장기 털이범이든 도플갱어든, 만나면 죽는 건 매한가지겠구나,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살짝 기대가 앞서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자 불안함을 설렘이 슬쩍 덮어버린 것이었다. 재미는 있겠다, 그렇게 만남의 날을 기다렸다.


    학교 근처 라멘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오는 길에 지갑을 못 찾아서 타고 가려던 버스를 놓쳤다.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고, 자전거를 타고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진짜로, X 나게 더운 날이었다. 땀나게 덥다고. 라멘집에 도착해서, 대충 땀을 닦고 숨을 고른 뒤 들어가 음식 없이 혼자 앉아있는 남성들과 한 명 한 명 어색한 눈맞춤을 했다. 명찰이라도 달고 올 걸, 후회를 하며 "저 도착했는데, 안에 계신가요?"라고 문자를 보내자 금방 답이 왔다. 구인용 씨는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민망해라.

    다시 함께 가게로 들어와 같은 라멘을 시키고 가장 먼저 한 것은 각자의 주민등록증을 인증하는 것이었다. 와! 97년생 구인용! 다행히(?) 생일은 다르네요 ㅋㅋㅋ, 하면서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각자 느꼈던 불안함과 기대감을 나눴다. 구인용 씨는 짧은 책 한 권도 선물로 가져와주셨다. 다행히 나도 문학의 뜨락 활동하면서 매년 만들었던 문집을 여섯 권(...) 가져가서, 선물을 교환할 수 있었다.

    둘 다 낯을 가리는 편이라고 말은 해놓고선, 제법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구인용 씨는 나처럼 술을 좋아하고,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을 즐겨하는 사람이었다. 소위 "똥챔"을 즐겨하는 것까지 같았다. 한편, 구인용 씨는 나와 비슷한 점만큼이나 다른 점도 많았다. 나는 이공계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고, 구인용 씨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은 공익 근무를 하고 있다. 나는 수도권 출신이고, 그분은 충주 출신.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는 반면, 구인용 씨는 누나가 셋이었다.

    사실 그분은 내가 썼던 글을 통해서 대충 나에 대한 어떤 윤곽을 갖고 있었겠지만, 나는 그쪽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기했다. "이세계 구인용"은 나와 어떤 부분이 비슷하구나, 어떤 부분은 다르구나.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내가 원래 나의 독자님들에게 호감을 전제로 다가가기는 하지만, 구인용 씨랑은 초면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대화가 잘 통하고 즐거웠다.

    아마 인용 님이 나를 굉장히 존중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도 있겠다. 라멘도 맛있게 드셔주시고, 나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반가움을 반복해서 전했다. vice versa였다. 나도 되게 오랜만에 봐서 처음에 살짝 어색할 뻔한, 옛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비즈니스(?) 얘기를 하러 스타벅스로 향했다.  

  


2. 지은이 구인용, 엮은이 구인용


    콜드 브루 커피를 두 잔 시켰다. 밥은 내가 샀고, 커피는 인용 님이 샀다. 본격적으로 준비해오신 PPT를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분, 책 디자인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만드신 책은 학부 졸업 전시 작품을 모아놓은 도감 같은 거였는데, 표지 디자인부터 구성 편집까지 본인이 다 진행했다고 하셨다. 개멋있었다. 사실 PPT만 보아도 대충 만드셨다고 했지만 엄청 감각적인 느낌을 받았는데, 작업물들을 보니 정말 미쳤다, 싶었다. 기획 편집 디자인 혼자 다해. 1인 출판사야 그냥... 레전드. 계속 감탄을 하면서, 속으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같이 일을 하기는 애매한 사람이 있다. 능력이나 추구하는 방향성, 열정의 크기가 다르면 사실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만들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냥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이분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멋진 책 한 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히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나는 본업 (대학원생)도 있고, 이 분야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사뭇 본격적인 그분의 구상에 조금 압도되는 느낌도 받았다. 근데 자신도 급하게 작업할 생각은 전혀 없다며, 나더러는 글만 써주면 된다는 말을 듣는데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귀인이 찾아왔구나, 이런 분이 왜 나 같은 사람에게 연락을 주셨지...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인용 님이 그린 그림들이랑 쓴 글도 몇 개 더 보여주셨는데, 다 좋았다. 창작자 앞에서 창작물을 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라고 생각하는데, 수줍게 보여주시는 작품들 하나하나가 조금 더 인용 님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었다. 이런 사람이 내 글을 좋아해 주는 것도 너무 영광이었고. 또 내가 좋아하는 모습에 엄청 안도하시고 좋아해 주셔서 칭찬하는 맛이 있었다.


    "저희가 같이 책을 만들면 구인용, 구인용이 만드는 거긴 한데 구분은 되어야 하잖아요,"

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필명을 소개해주셨는데. 그게 또 재밌었다. 필명이 먹구름이란다. 먹고 구르는 게 꿈이라서 먹구름이란다. 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글에 살짝 습하고 어두운 기운도 있는데, 그래도 이름의 어원이 귀엽고 재치 있어서 좋잖아. (인용 님과 그날 말도 놓고 친구로 지내기로 했는데, 그래서 이제부터 그를 구름이라 부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뭐로 해야 할까? 원래 인용구라는 필명으로 몇 년을 살아왔는데, 내가 우리의 이름을 독점하는 건 또 별로 같아서... 하나를 새롭게 정해야겠는데 뭐로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추천받는다. 사실 구름이가 추천해준 필명은 "구박사"인데, 마침 연구실 사람들이 나를 가끔 그렇게 불러서 좀 킹받지만 그것도 괜찮아 보이고... 근데 박사 졸업은 할 수 있는 거냐고. 나는 "아이쿠" 같은 이름도 좀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논문을 쓰거나 하면 남들이 나를 '인용'할 때 "I. Koo et al." 이렇게 할 텐데, 아이쿠 귀엽지 않습니까? ...그냥 용구가 편하긴 해.

     아무튼, 구름이랑 나랑 쓰는 책이 조만간 나올 것 같다. 미안, 뻥이다. 혹시 좀 설렜습니까? 그러면 기쁘겠는데... 사실 첫만남이기도 하고, 아직 전혀 책의 메시지나 구성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정해진 것이 없어서 책이 나오는 날은 까마득한 먼 미래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대학원생으로서의 현생이 너무 바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도 급하게 할 생각이 없다며, 몇 개월이 되든 몇 년이 되든 좋은 책 한 권 만들어보자는 구름이가 되게 고마웠다. 충성충성, 당신의 팬이 됐어요. 당신의 펜이 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3. 이름이 가져다준 인연


    그렇게 그날 가벼운 만남을 갖고, 나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나는 구름이에게 학교 구경도 시켜줬다가, 동방에서 후배들 글도 몇 개 보여줬다가, 같이 노래방 갔다가 저녁 먹고 술까지 먹었다. 아주 풀코스 데이트를 해버렸다. 고백하면 저녁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선약도 있었는데 그걸 펑크내고 구름이랑 놀았다. 솔직히 아주 살짝 부담스럽긴 했는데, 대전에 아는 친구 집에서 자기로 했으니 저녁까지 있어도 된다면서 술도 먹자고 들뜬 구름이를 보니까 그냥 '에잇 그러지 뭐' 해버렸다. 술 잘 먹는다는 말에 좀 나도 설레기도 했고.. 닉값은 해야 할 것 아니냐, 구인용 주량 확인 들어갑니다잇.

    그렇게 하루 종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구름이랑 많이 친해졌다. 얘기를 많이 나누면서 구름이가 어떤 과정을 겪으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도 조금 더 가늠해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이 알게 될 수도 있구나, "깊이"라는 말이 섣부르게 쓰인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구름이는 자기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었다. 나도 몇 년째 알고 지낸 친구들에게도 안 하는 이야기도 몇 개 했다. 그래서 그냥, 단순히 든든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생긴 것보다도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같은 꿈이 있고, 서로의 글을 열심히 읽어주는 좋은 친구.

    구름이는 글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이었다. 동아리 후배들의 글을 몇 개 엄선해서 보여주는데, 천천히 읽고 되게 깊이 공감을 해주더라. "잠깐 OOO 씨가 된 것 같았어."라고 말하면서 글의 여운이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있는데, 그 모습이 되게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그들이 잠깐 되었다는 구름이가 참 좋았고. 이 친구가 내 글도 저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읽어주고 공감해줬다고 생각하니 몸둘 바 모르게 고마웠다. 노래방에서는 마이크를 두 손 모아 쥐고 한음한음 되게 열심히 부르더라. 와중에 선곡도 나이스였다. 선우정아의 <삐뚤어졌어>라는 곡은 그 자리에서 내 플레이리스트에도 추가해버렸다.

    내가 원래 사람을 잘 좋아하는 편이기도 한데, 무튼 구름이에게 하루 종일 비호감의 요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나와 다른 부분도 많고, 두 눈 부릅뜨고 미워할 이유를 찾는다면야 흠이라 부를 부분들도 찾겠지만...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술 먹다가 이런 얘기까지 했다. (아, 둘이서 거뜬하게 세병씩 마셨다.) "내 이름 사실 특이하다고만 생각했지,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는데. 그래도 이름 덕분에 너를 알게 되어서 기쁘다." 구름이도 자신이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닌데, 나 같은 캐릭터는 없었다면서 뭔가 전부터 늘 갖고 싶었던 친구의 모습으로 내가 나타나서 기쁘다-는 얘기를 했다. 아이고, 황송해라... 나 이런 말 들으면 좋아 죽는다.

    그래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소중한 인연 하나를 만든 것 같고. 내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친구가 잘 지내기를, 나와도 잘 지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평생을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아오던 사람이 이렇게도 친구가 될 수 있구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 생긴 것이 너무 신기했고, 또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앞으로의 작업이 기대가 된다. 구름이도 말한 것처럼, 뭔가 서로를 알게 되면서 막연했던 꿈에 한발짝 더 다가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좋은 소식으로, 좋은 책으로 찾아올 테니 기대 바란다.


    P.S.) 97년생 구인용을 만났다는 얘기를 주변에 하면 사람들이 일단 만남이 성사되었다는 것에 놀라고, 하루 종일 같이 놀았다는 것에 또 놀란다. 나도 놀랐다. 근데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겠다. "여자야? 이제 사귀는 거야?" 하면서 흐린 눈으로 놀리는 놈들은 진짜 머가리에 뭐가 들었나 싶긴 하다. 사랑은 연애할 때만 쓰는 놈들, 말해봤자 이해도 못할 테니 그냥 말도 사랑도 그들에게는 아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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