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개강을 앞두고 문학의 뜨락 후배들과 학교 근처 민속주점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비수도권은 설 이후로 코로나19 방역수칙이 완화되면서 9시 이후로도 음식점 이용이 가능해졌다. 5인 이상 집합 금지는 언제 풀리려나...) 메뉴는 막걸리에 어울리는 모둠전. 안주가 나오기 무섭게 우리는 평소처럼 개소리를 시작했다.
나: 모두들 오늘도 안전하게 음주합시다잇.
A: 형, 전을 먹는 시점에서 이미 "안 전"하지는 않죠.
(후배 A는 문학의 뜨락 20년도 회장으로, 이런 쪽의 말장난에는 도가 텄다.)
B: 아니 ㅋㅋㅋ. 그럼 여기서 안 전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뭐 있어 ㅋㅋ
(후배 B는 원래 봄학기 교환학생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코로나 xxx.)
C: (메뉴판을 보며) 두부김치, 골뱅이소면 있고... 메밀전병은 전이라고 봐야 하나?
(후배 C는 무려 물리학과 학생회장을 했던 친구다.)
B: 일단 지지고 부쳐서 만드니까 전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아? 이름에도 전이 들어가기는 하는데.
나: 어라, 메밀전병은 약간 만두 같은 느낌 아닌가?
C: 그렇긴 하죠. 근데 깻잎전도 비슷하게 소를 싸고 있어서.
나: 그렇네, 아 근데 그... 그 뭐지. 어르신들 좋아하는 과자 있는데, 그거 약간 일본 이름.
A: 센베이요?
나: 어, 그거. 그게 한자로는 아마 전병일 텐데. 아닌가?
A: 맞을 거예요. 근데 그게 이 전병이랑 같은 전병인가? 전병의 정의가 어떻게 되지?
...
이후로도 전병은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이 조금 더 이어지다가,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는 학교 생활 근황으로 바뀌었다. 뇌과학 연구실에서 개별연구를 시작했다는 B, 개별연구를 하고 싶어도 양자이론 공부를 더 하고 가야 연구실에서 할 게 있을 것 같다는 C. 전자과와 물리학과를 복수전공하는 A는 아직도 물리학과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듯했고... 나도 대학원 이야기를 하면서 한잔씩 술잔을 나누다 보니 자리는 금세 무르익었다.
이쯤에서 문뜨 친구들 자랑을 조금 하자면, 술을 꽤 잘 마신다. 다양한 막걸리를 맛보기 위해 당도가 낮은 것부터 하나씩 정복해나가던 우리는 세 번째 막걸리를 시작할 때 난이도를 2배로 올리기로 한다.
A: ...저는 막걸리 안 흔들어 먹는 걸 좋아해요. 나: 흠.. 나는 막걸리 잘 흔들어먹어야 그 의도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 찌꺼기? 지게미라 하나? 그게 약간 숙취 유발자긴 하거든. C: 그래요? B: 와인이랑 막걸리랑 이렇게 좀 불순물 있는 애들이 알코올 해독하는데 더 오래 걸리는 거 같기도 해. 나: 오오, 설명 굳. 그래서 나도 그거 없이 맑게 마시면 좀 괜찮나 궁금하기도 하고... 어때? 흔들지 말까? B: 저는 상관없어요. C: 저는... 우주의 엔트로피를 늘리는데 저희가 굳이 더 기여할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흔들지 말자는 소리다.) 나: ㅋㅋㅋ 그럼 앞으로는 두 병씩 시켜서, 한 병은 맑게 먹고 한 병은 흔들어 먹어보는 거 어때. 차이 궁금하긴 한데. A: 좋네요. 대조군과 실험군.
B, C의 동의도 얻은 후 우리는 술을 두 병씩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들, 너무 거뜬하게 술을 들이켜댄다. 나도 좋다. 이게 뜨락이지! 내 지갑이 조금 불쌍할 뿐...
어느새 안주도 다 먹어서 다음 안주를 주문하기로 했다. 이전에 있었던 논의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메뉴는 메밀전병으로 정해졌다. B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메밀전병이 나왔다.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전병 세 개. 모둠전을 자르는 것을 내가 했기 때문에, 후배들이 각각 하나씩 메밀전병을 사이좋게 자르기로 했다.
[사진 출처] 감농 메밀전병. (광고 아님)
A와 C가 나름 공평하게 전병을 4토막 낸다. 이때 들어오는 B, 우리가 나머지 하나를 자르면 된다고 하자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전병을 자르는데, 아무 생각 없이 끝부터 가위질을 시작해서 다섯 조각을 만들고 마는 것이었다.
탄식이 터져 나온다. 이제 한 사람이 세 조각씩 먹어도 한 조각이 남고 만다. 사실 누가 한 조각을 더 먹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딱 나누어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과생의 본능이라, 우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B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사건의 전말을 깨달은 B 역시 본인의 행동에 깊은 탄식을 내뱉는다. 잠시의 침묵 후에, A가 상황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나: 앗, 그러네! 그럼 어떤 것이 더 '우월'한 거지? 김밥은 보통 꼬다리를 선호하기는 하는데.
A: 김밥은 가장자리에 밥이 적고 재료가 많이 들어가서 속의 밀도가 더 높기 때문 아닐까요. B: 그렇다면 여기 상황은 반대로 꼬다리가 한쪽이 닫혀있으니까 속이 덜 들어가겠네요.
C: 대신 가운데 부분은 양쪽이 열려 있으니까 구조적 안정성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겠고요. 나: 그러네... 둘은 애초에 위상적으로 다르네... 꼬다리는 어떻게 보면 '쌈'이고, 가운데는 '말이'잖아.
위상수학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머그잔과 도넛이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안다. 마찬가지로 메밀전병의 피 역시 가운데 부분은 어떻게 움직여도 하나의 구멍이 존재하는 까닭에, 중간의 메밀전병 역시 머그잔과 동상(同相)이다! 한편 메밀전병 꼬다리는 접시나 사과와 결을 같이 한다. 나는 과장된 탄식을 내뱉으며 말한다. "평등이 이토록 이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니, 역시 사회주의 낙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참고로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 근데 뭔가 '사회주의 낙원'이라는 단어는 되뇌기만 해도 입꼬리가 올라간단 말이지.
이게 다 심영 때문이다.
그때 우수한 C가 놀라운 발상을 제시한다. "오, 전병을 십(十) 자로 자르면 평등하게 자를 수 있겠습니다."
실로 그러했다. 그렇게 자르면 (이상적으로 분할했다고 가정할 때) 모두가 합동인 형태로 나눌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젓가락으로 집어먹기에는 구조적 안정성이 무척 떨어지겠는걸, 나의 지적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워한다.
메밀전병 4 분할의 새로운 패러다임
A가 잔뜩 씁쓸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원래 결과적 평등은 전체의 하향 평준화를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법이지요." 언제나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A이다. 우리는 한참 웃다가, 조금 더 고민을 해본다. 메밀전병 하나를 조금이라도 더 4등분에 가깝게 나눌 수는 없을까? 물론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막걸리를 여섯 병 가까이 비워가는 상태였기에 평소보다 저능(?)해진 상태였다. 텐션이 떨어지기 전에, B가 적당한 타협안을 내놓는다. 그는 모둠전에 포함되어 있던 산적 꼬치를 집어 들고, 메밀전병 꼬다리에 구멍을 뚫기 시작한다.
B: 이렇게 하면 적어도 위상적으로 동일하게는 만들 수 있겠군요.
C: 그래요, 사실 그게 중요한 거죠. (뭐가 중요한 건데)
A: 좋다. 사회주의 낙원에 도달했네요. 와, 건배. 나: 그래! (꼬치를 집어 들며) 이 꼬치가, 죽창이야말로 사회주의 낙원으로 가는 열쇠다!
A, B, C: 죽창!!!
그렇게 우리는 죽창, 아니 줄창 술을 마셨다. 사실 이 날 술자리의 하이라이트는 이것이 아니었다. 이 날은 내가 써야할 글의 방향성을 찾는 날이었거든... (?!??! 죽창 얘기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