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내일을 기대하고 싶어서

나는 나를 응원하기로 했다.

by 인용구

서른 살이 되고 열흘이 지났다.


30대의 시작을 한번 복기해 볼까. 새해 첫날 눈을 뜨자마자, 기다렸던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의 피날레를 보았다. 제목이 “Stranger Things”인 이유는 끝까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10년 동안 챙겨 보았던 시리즈의 결말을 확인하니 정말 무언가가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렸던 배우들이 잘 자라 각자의 엔딩을 맞이하는데, 에필로그 장면들이 꼭 화면 너머로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아 조금 울컥했다. 여운이 남아 유튜브에 올라온 비하인드 씬 클립들을 찾아보고, 댓글을 읽으며 헛헛함을 달랬다. “너희들이 나의 해리포터였어.”라는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랬지, 나의 10대는 해포였고 20대는 스띵이었구나.


그리고 매일 사람을 만났다. 잔디와, 외가 친척들과, 동아리 후배들을 만났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을 나눴다. 2026년도 행복한 한 해 되시라, 응원하고 축복하며 따뜻한 연시를 보냈다. 오늘까지는 12월 3n일로 하고, 내일부터 진짜 2026년을 시작해야지—라는 말을 매일 반복하며 쭉 취해 있었다.


화요일은 <흑백요리사 2> 방영일이었다. 매번 엄청난 클리프행어로 끝내는 스튜디오 슬램의 악랄한 연출 때문에, 최신 화가 공개되는 5시에 맞춰 넷플릭스를 틀었다. 스포일러를 피하려면 민첩해야 한다. 그렇게 틀은 이번 주 <흑백요리사>도 역시나 재밌었다. 최강록은 “최강”이다. 나의 원픽 조림핑이 선전하는 모습을 보며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후덕죽 셰프님도 너무 멋있지. 팀전 때도 계속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열심히 보조하시는 모습을 보고 인상 깊었는데, 만드시는 요리마다 극찬을 받으며 엄청난 내공과 창의력까지 선보이시니 진짜 존경스럽더라.


두 시간 내리 <흑백요리사>를 보다가, 다시금 중요한 순간에 “스튜디오 슬램”이라는 글자를 마주하며 탄식을 내뱉고서야 마주한 감정이 있었다. 헛헛함이나 허탈함을 넘어선, 허무함이었다. 아, 정말 재미있었다. 그런데 내일은 뭐 보지? 누구 보지? 내일을 기대하며 설렐 무언가가 없었다.


음. 금요일에 LCK 오프닝 있구나. 대상혁은 봐야지. 그다음엔? 주말 지나면 또 <흑백요리사> 결승전 나올 거 아니야, 최강록 우승하는 건 봐야지. 그다음엔? 그다음엔. 그다음엔…….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내일을 기대하는 이유에 ‘나’와 관련된 건 하나도 없구나.


도파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삶. 매일 콘텐츠를 소비하고, 타인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정작 나의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도 없는 삶. 그것이 어쩐지 한심하게 느껴졌다. 용구, 이대로 괜찮은가. 머리를 내려친 듯 몰려온 현타에 잠시 정신을 못 차렸다.


고백하면 머리에 힘주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자기합리화’였다. 역시 자기합리화의 달인. 솔직히 내가, 엄청나게 한심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남들도 다 비슷하지 않나? 매일 웹툰 보고, 연속극 보고. 다가올 영화 개봉과 스포츠 경기, 게임 업데이트를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인생의 낙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지. 사랑하는 게 있다는 거니까. 최강록을, 페이커 이상혁을, 주위의 사람들을 응원하며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지.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게으르게 나를 방치한 것도 아니잖아. 매일 내 몫의 해야 할 일을 하고, 그것을 잘하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잖아. 그런 과정에서 성장도 있었고 성취도 있었으니, 너무 나를 한심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래 그럼. 그럼 그냥 그렇게 살아.


X발놈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어떤 문제의식을 느꼈으니까 현타가 온 거겠지. ‘정’과 ‘반’, 둘을 아우를 수 있는 ‘합’의 결론을 내느라 무작정 나간 산책이 끝없이 길어졌다. 나는 한심한가? 아니. 나는 불행한가? 아니. 그럼 나는 더 바랄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도 최강록이나 대상혁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긴 해. 그들만큼 대단하고 비범한 사람이 되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응원하고 싶어지는 사람. 현재의 위치나 주위의 인정과 상관없이 겸손하게, 꾸준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동경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도 분발해야겠다, 생각했다. 타인의 재능과 열정을 마냥 소비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나도 나의 소명을 다하여 가치를 만드는 삶. 본분을 다하는 삶은 주위를 감동시키고 좋은 영감을 준다. 그런 삶을 위해 노력하면 매일 잠들 때 부끄럽지 않을 것 같고, 현재를 사랑하면서 살았던 날들은 자랑할 과거가 될 것 같고. 사는 게 재밌겠다. 내일이 기대되겠다.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내가 느꼈던 공허함은 ‘목표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 모습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지금 마땅히 없어서. 하루하루 다가오는 즐거움에 만족하며 살아가고는 있다만, 어떤 성장의 지향점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내게 의지나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많이 쉬었거든. 오히려 바쁠 때는 이런 생각을 안 했었는데, 그땐 그냥 ‘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연말연시의 공백, 잠시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을 때 무언가를 해야겠다, 아니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든 것을 보면 나는 아직 공회전하는 철마의 심장을 갖고 있다.


정체된 자신의 모습에서 조바심이나 불안함을 느낄 필요는 없어. 다만 이제 다 쉬었으니, 새롭게 시작하자. 신년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취들을 쌓아 나가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몇 가지 단기 목표를 세웠는데, 또 공언했다가 실패하면 부끄러우니까 말 안 할래. (空言이 되어버린 公言을 아시오...) 목표를 달성하는 날에 후기를 쓰겠다. 작심한 지 4일째인데, 작심삼일은 면해서 이미 절반의 성공은 한 것 같거든요?! (시작이 반이다!) 응원 바람.


매일 사람을 만나다가 하루 쉬었다고 이렇게 우울해지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하고, 끝없는 자기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그래도 건강한 결론에 이르는 건 또 다행스럽기도 하고. 모쪼록 나도, 글을 읽는 당신도 파이팅이다. 최강록 우승하자!


아, 끝으로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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