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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Apr 23. 2022

내가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은 이유

번아웃, 재와 숯의 경계에서


1. 도움이 필요해요.


월요일에는 카이스트 스트레스 클리닉을 다녀왔다.


    말이 좋아서 "스트레스 클리닉"이지, 영수증에 적힌 진료과목은 노골적으로 내가 방문한 곳의 진짜 이름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월요일에 나는 정신과에서 한 시간의 상담을 받고 왔다.


    계기는 후배 영*이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근래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몇 주 전쯤 클리닉을 찾아 상태를 진단받고는 약도 처방받으며 도움을 받는 것을 옆에서 봤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고, 다만 영*이가 받은 몇 개의 심리 검사가 흥미로워 보였다. MBTI보단 훨씬 재밌어 보였달까, 대학 등록금 본전 뽑는 법 중에 "학교 지원받아 비싼 심리 검사 받아보기" 이런 내용도 어디선가 봤는데 나도 졸업 전에 뽕을 따야지 생각하곤 있었다. 그런데 요즘 내 생활이 너무 엉망이라서, 혹시나 이것이 병리적인 문제는 아닐까 고민을 하던 참이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정신과를 찾는 것에는 (아마 모두가 막연히 공감할만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환이 형 같이 주변에 심리학이라던가 상담치료 등을 공부하는 사람도 몇 명 있고, 정신과 진료 경험이 막 '빨간 줄' 그어져서 나중에 문제 되는 일도 요즘은(?) 없다는 것도 알았지만. 왠지 나한테 '정신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좀 많이 기분이 언짢을 것 같고, 내 문제가 현실이 되는 것 같고.. 그냥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어쭙잖은 자존심 때문에 병원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 같은 이유로 나는 그냥 보편적으로 '병원'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미련한 놈.) 더군다나 정신과는 뭐랄까, 예민한 예술가들이나 찾는 곳이라는 고지식한 선입견도 있어서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평생 발 들일 일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 카이스트가 "스트레스 클리닉"이라는 그나마 더 친근한 이름과 상시 대기 인력까지 마련하며 정신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유 역시 대충은 알고 있었다. 어디 하나는 고장 나서 졸업한다는 대학원. 허리 디스크나 알코올 중독, 불면증 같은 병 하나씩은 달고 산다는 이곳에서 스트레스 클리닉을 이용하는 대학원생은 제법 많았다. 어떤 연구실 구성원들은 아예 한 요일을 릴레이로 찾는다는 괴담도 돌고, 가깝게는 우리 연구실만 하더라도 수면제 처방 등을 위해서 클리닉을 찾는 분들이 계셨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심리 검사 체험하기'라는 구실과 함께 클리닉을 방문했다. 그런데 심리검사를 받으려면 한 시간가량의 초진 상담은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상담'까지 필요한가 잠깐 망설여졌다. 그리고, 그럼 상담도 받겠다고 답했다. 가까운 날짜로 상담을 예약하려 했을 때 다시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지 느꼈다.


    예약을 하고 3주 뒤, 그러니까 이번 주 월요일, 나는 조금의 망설임과 두려움을 안고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다음주 월요일 예약도 잡았다.



2. “용구 님은 지금 OOO인 것 같아요.”


클리닉은 10시 예약이었다. 


    최근에는 10시 출근 시간도 거의 맞춘 적이 없어서, 혹시나 3주를 기다린 예약을 지각해서 놓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요즘은 거의 새벽 3시를 넘어서 잔다. 알람은 8시부터 맞춰놓지만 보통은 9시 반이 거의 다 되어서야 눈을 뜨는데, 10시까지 나가야 한다고 침대에서 생각만 하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면 운 좋은 날에는 11시에 이른 점심을 먹으며 출근할 수 있었다. 그게 안 되는 날은 오전을 통째로 날리기도 했고, 심지어 어떤 날은 2시까지 기숙사 컴퓨터로 유튜브를 보다가 연구실 톡방도 조용하길래 그냥 재택근무를 가장한 무단결근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월요일에는 8시에 눈을 떴다. 나름 나가야 하는 이유가 있을 때는, 예를 들어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있을 때는 그래도 책임감을 갖게 된다. 가만히 누워있다가는 또 잠들어 시간 이동을 해버릴 것 같아서 곧바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사실 당일 아침까지도 내가 클리닉을 방문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20분 가까이 샤워를 하면서 그냥 요즘 내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부분, 고치고 싶은 내 모습을 머릿속으로 표현하려고 정리했다.


    가장 큰 부분은 '생산성 저하'에 대한 고민이었다. 고백하면 요즘 연구실에서도 할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2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출근해서 그렇게 딴짓을 해댄다. 나랑 무관한 정치 연예 이슈를 한참 찾아보질 않나, 관심도 없던 웹툰을 찾아가서 정주행 하고, 갑자기 떠오른 대상의 나무위키를 열고 한참 링크 타며 돌아다닌다. 그러는 와중에 틈틈이 유튜브를 열어서 혹시 눈길을 끄는 영상이 추천되나 확인하는 탓에 크롬 창에는 유튜브 메인 페이지 탭만 대여섯 개가 쌓여있다. (구독하는 채널의 영상은 물론 이미 다 시청했다.) 주위 동료가 움직일 때나 겨우 코드 창 띄워놓고 읽는 척하는 게 전부다. 퇴근할 때 하루를 돌아보면, 최대한 너그럽게 생각해도 정말 아무 성과가 없었던 날이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있었다. 교수님이 내가 요즘 이러고 사는 거 아시면 바로 인건비 압수, 내 책상은 분리수거해 버리실지도 모른다.

    꼭 연구와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전반적으로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하지 못한다'는 게 요즘 내 일상이다. 아주 사소한 일들도 시작이 너무 힘들다. 이를테면 빨래를 돌리거나 씻는 것, 잠에 드는 것 같은 것도 정말 극한의 극한까지 미루다가 정말 도저히 안될 것 같을 때 겨우 해내거나, 아예 못하는 경우도 있다. 봄학기 기숙사를 옮기면서 침대 맞은편에 잔뜩 쌓아뒀던 짐은 풀지도 않은 채 한참 동안 보기 싫은 벽처럼 머물렀다. (최근에 치우긴 했다.) 지금도 책상 위에는 몇 주 전에 먹었는지 기억도 안나는 맥주캔이 찐득하게 붙어있고, 지난 주말에는 방을 나가는 게 어려워 끼니를 하루 종일 거르기도 했다. (내가 굶는 건 정말 심각한 거다.)

    말 그대로 1분, 10초도 걸리지 않는 일들을 해치우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처음엔 이 무기력증이 코로나 후유증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이건 두어 달 전부터 지속되고 있었다. 내가 원래 천성이 게으른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에는 벼락치기를 어떻게든 해서 내가 머릿속에 정한 기한까지는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는 편이었다. 당연히 완벽한 결과물을 내지는 못해도, 후회나 미련은 남을지언정 그것이 내 최선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만큼의 행동은 취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계속 해야 할 일을 알고, 불안해하며 스트레스 받으면서 결국 ‘실패’하는 일이 잦다.

    내가 왜 이렇게 루저가 된 건지 알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 ‘아무것도 하지 못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게 지속될수록 더 저능한 사람이 될 텐데. 무능한 사람, 자기 관리 못하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매력 없잖아. 뭔가 상태의 정확한 진단을 받고, 필요하다면 약을 먹든 목줄을 채우든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나는 이런 내 '증상'들을 털어놓았다. 사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한 일이기도 했지만, 선생님이 나를 마냥 '한심한 사람'으로 보지는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어서 조금 쉬웠던 것도 있었다. 말하는 동안 스스로도 문제를 더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구나 느껴서, 실시간으로 상담의 효과에 내심 감탄하기도 했다.. 물론 정말 초면이었기에 선생님 딴에서도 내 가정환경이나 학창 시절에 대한, 말하자면 나를 '탐색'하는 FAQ 질문도 중간에 하셨다. 그게 내가 하던 말의 맥락을 끊는 느낌이어서 좀 거슬리기도 했지만, 진단에 필요한 내용이라 생각하며 성심껏 답했다. 중간중간 화면을 보며 메모하시는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경청해주시는 게 느껴져 좋았다.

    요즘 특별히 느끼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 말고도, 그냥 보편적인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당연하게도 연구 관련 얘기가 나왔다. 올해 3월에 학회 투고를 하고 싶었는데, 연초에 밤새가며 연구실에서 살았는데도 결국 논문을 못 냈고 2월 중반부터 패배감만 엄청 느꼈다. 그렇다고 그때 정말 '의미 있게' 열심히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GPU를 바쁘게 돌린다고 내가 부지런한 게 아닌데, 아이디어를 구현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프로세스를 충분히 전략적으로 하지 않았다. 글러먹은 아이디어를 갖고 '성능이 안 나오는 것은 조작 변인 문제일 수도 있다'며 의미 없는 숫자들만 만지작 거린 시간도 길었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직접 뜯어보기는 귀찮아서 입력만 바꿔가며 중요한 부분을 블랙박스로 내버려 두기도 했다. 그런 식으론 논문 못 쓴다는 걸 사실 그때도 알고 있었는데, 그냥 마음 한 구석에서 포기한 부분도 있었다.

    혼자서 머리를 박고 있는데, 그걸 공유하고 조언을 구하기 전에 내가 조금 더 스스로 해보자는 생각을 갖다가 결국은 그냥 혼자 가라앉고 말았다. 사수 형은 바쁘니까, 지도교수님은 지도(map) 하나 던져주지 않으니까, 라며 핑계와 원망만 일삼으면서, 결국 마찬가지로 내 부사수에게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미안해..

     스스로 좀 유능해지고 싶었는데, 성과를 내서 누군가를 이끌어줄 수 있는 위치가 되고 싶었는데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연차만 쌓여간다. 물론 아직 대학원 생활 반도 안 했고, 지나온 시간보다 다가올 시간이 많은 것도 안다. 열심히 해서 잘할 수 있다면 열심히 하고 싶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열심히 해야 훌륭한 선배, 연구자가 되는지 모르겠다. 매일 논문을 한편씩 읽는다고, 하루에 실험을 꾸준히 1트씩 해본다고, 논문이 써지나?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니까 그냥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순간 '훌륭한' 연구자는 집어치우고, 그냥 '무사히' 졸업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내가 있었다.


    "... 물론 연구라는 게 원래 가시적인 성과가 금방 금방 나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요. 보이지 않게 차곡차곡 쌓이는 게 결국 step function 같은 도약을 만드는 걸 아는데, 지금 1년 넘게 성취 없이 흘려보내니까 살짝 번아웃이 온 것 같아요."

    내가 말하자 의사 선생님이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맞아요. 용구 님은 지금 번아웃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 같아요."



3.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


    번아웃 증후군, 나는 번아웃이 그냥 "하얗게 불태웠어..." 같은 느낌의 어떤 단기적인 상태라고만 생각했다. 내 주변에서 번아웃을 겪었다는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하루 이틀 잠수를 타더니 어디선가 잘 휴식을 취하고 와서는 금세 예전의 워커홀릭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번아웃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나요? 저 거의 두 달이 넘어가는 것 같은데"

    "두 달이요? 절대 긴 거 아니에요. 그럴 수 있어요. 일을 열심히 했는데 보상이 없는 것 같고, 성취감이 없으니까 불안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런 시간이 지속되면 번아웃이 자연스럽게 올 수 있어요."


    내 생활을 완벽하게 요약하신 의사 선생님은 이어서 내가 요즘 식욕은 어떤지, 기분은 어떤지도 물어보셨다. 먹는 것은 요즘의 몇 안 되는 낙이요, 은은한 자기혐오는 가끔 고개를 내밀지만 즐거운 시간도 종종 보낸다고 답했다. 그러자 번아웃이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다행히 그런 상태는 아닌 것 같다고 하셨다. 수면시간도 사이클이 늦어졌을 뿐이지 수면 시간도 충분하고 중간에 깨는 현상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럼 약을 먹을 필요는 없는 거죠?"

    "약 먹는 게 나쁜 건 아니에요. 필요하면 처방해드릴 수 있어요."

    "번아웃에도 약이 있나요?"

    "있죠, 무기력감에 도움이 되는, 그러니까 활력을 주는 약이 있어요."

    "그런데 약을 먹으면 약간, 의존하게 될까 봐, 아님 부작용이 있을까 봐 조금 걱정이 돼요."

    "그런 문제는 전혀 없어요. 그냥 영양제?라고 생각하셔도 될 정도로 무해해요. 물론 약을 꼭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마음 편히 생각하세요."


    약은 나중에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받아보기로 했다. 일단 많이 안도했다. 우울증이나 수면 장애도 아니고, 번아웃은 그냥 '지쳤다' 이거 아닌가? 심각한 수준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나의 무기력감이 전문가가 보기에도 실체가 있는 문제였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어차피 나의 문제라 변명, 핑계거리도 되지는 못하지만 내가 힘들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아주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민망함이랄까, 부끄러움도 찾아왔다. 정말 아픈 사람들도 문 밖에 줄을 서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너무 사소한 문제로 엄살을 부린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번아웃 증후군도 만만하게 볼 문제는 아니라고 하셨다. 이전에는 잘 해내던 일을 최근 들어서는 수행하지 못하게 된 것이니까, 그것은 분명한 '문제'니까, 어떻게 하면 불편함 없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보면 된다고 하셨다. (따뜻해...) 또 한편으로는 일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의 주의력 결핍 증상의 경향으로도 보인다며, ADHD 관련 검사지도 초진 심리 검사지와 함께 주셨다. 이번 학기부터 1인 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니, 보호자나 감독자의 관리 없이 모든 걸 스스로 해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전까지 문제로 나타나지 않았던 ADHD의 증상이 발현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었다. ADHD가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기피하는 것'이 있다고... 그렇다면 번아웃 상황과 맞물려서 더 큰 무기력증으로 나타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다음 주 상담에서 심리검사 결과를 같이 보고 이야기하면 더 나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스트레스 클리닉, 맛집이라 사람이 몰리는 거였다.


    번아웃을 극복하는 방법은 말씀해주신 바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잘 먹고, 잘 자고, 즐거운 일을 하고, 조금씩은 마음을 다잡아 목표한 바를 이뤄내면서 성취의 감각을 되찾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쉬는 것은 사실 몇 주 전부터 쉬고 있었다. 애초에 연구실에 출근해서도 그게 일 하는 거냐, 쉬는 거지. 그런데 그 시간도 '잘 쉬는 것'은 아니었다. 에너지를 새롭게 생산하는 시간,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시간이 아니라 온통 소모의 시간이었다. 시간과 집중력을 낭비하며 지칠 때까지 쓸데없는 짓만 하는. 그런 시간은 조금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내가 즐겁게 할 수 있으면서, 성취감도 느낄 수 있는 취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역시 글쓰기였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요즘의 나한테는 대단한 노력의 결과물이자 큰 성취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닌데, 7시간 가까이 시간을 들여 7000자 이상의 글을 쓰고 있다. 사실 쓰고 싶은 글은 정말 많다. 미완성 글도 열 개 남짓 쌓여있고, 작년부터 쓰기로 다짐했던 컴퓨터 비전 관련 칼럼은 목차는 거의 책 한 권 분량으로 완성해놨다. 그러나 워드 파일을 열고 빈 창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거 할 시간에 연구나 더 하지' 같은 괜한 부담감을 느껴서 그만두곤 했다. (그러면서 또 게임은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꾸준히 하지)

    운동도, 여가도 이제 '일하기 싫어서 자꾸 딴짓한다'는 죄의식 없이 그냥 건강한 생활로의 복귀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기로 했다. 연구도 의식적으로, '이게 무슨 소용이냐' 같은 의심은 빼고, 해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며 다시 하루의 목표를 설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 주에도 '아 오늘 이것밖에 못했네'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없지 않았지만, 의사 선생님도 조급해하지는 말라고 하셨다. 문제를 파악했다고 바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자기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도 않다고. 그래도 이번주는 분명 지난주의 나보다는 생산성이 좋아진 것 같다는 확신도 들었다. 나아질 수 있다, 나을 수 있다. 그런 희망이 오랜만에 들어 기뻤다.


    내게 낭비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은 안다. 11월의 학회에 논문 두 개를 낸다면 나중에 올해를 돌아봐도 크게 불만스러울 것 같진 않고, 일단 교수님의 요구에 부응하려면 최소한 한 개는 내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얼른 회복해서 분발해야 한다. 잘하고 싶다. 열심히 할 거다. 그러나 동시에 솔직하게 고백하면, 내가 요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연구 외적인 요소들이 많다. 그런 것들을 놓으면서까지 모든 걸 갈아 넣지는 않으려고 한다, 당장은. 사실 여태 나는 내가 준수한 연구자는 못 되어도 인간으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연구 외적으로는 곁에 두기 유익한(?) 사람이라고 자평했는데, 과도한 연구 스트레스가 인간으로서의 나를 깎아먹고 있구나-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일단 사람부터 되어야겠다. 그래야 연구 능력도 발전할 것 같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나 내가 일과 시간에 도서관이나 헬스장 같은 곳으로 사라져도, 갑자기 글 업로드 주기가 짧아져도,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냥 용구가 요즘 이런 쪽으로 노력을 기울이는구나 양해해주십사 한다. 연구실에서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아도 얘 딴에서도 요즘 노력하는 중이구나 기다려주면 좋겠다. 물론 나 시키는 일은 진짜 잘하거든요, 오히려 그거라도 해내면서 무언가를 '달성'해야 해요. 나에게 맡겨야 하는 일, 부탁할 일이 있으면 부담 없이 찾아주기를 바란다. 우리 랩 파이팅.

    가족 친구들도,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재촉하지도 말고. 기다려주면 나 잘할 수 있다. 같이 맛있는 거 먹고 하면 응원이 된다. 주말인데 출근했냐고 좀 묻지 좀 마라; 교수님 한 분으로 족하다...

강조되고 반복되는 소리는 용구를 지치게 해요



    아무도 관측하지 않는 나의 모습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는 나의 역사도 나를 구성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제법 긴 요즘이다. 그 시간을 놓았더니 너무 많은 삶을 흘리고 말았다.    


    병원을 찾아서 번아웃이라는 진단을 받기 전부터, 나의 활력이(화력이) 많이 시들었구나 생각은 하고 있었다. 타닥타닥 요란하게 생색내면서, 매운 연기 같은 글을 뱉어내면서 어떻게든 타오르던 장작의 시간이 있었는데, 요즘은 글도 많이 안 쓰고 사람들도 피해 다니면서 조용히 죽어가는 모닥불처럼 혼자 꺼져가고 있었다.

   

    불이 꺼지고 남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나는 재와 숯의 기로에 서있다. 흩어져 사라지는 재가 될 것이냐,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숯이 될 것이냐. 당연히 숯이 되고 싶다. 검은 모습에 굴하지 않고 하얗게 타오를 수 있는, 조용히 오래 온기를 품는 숯이 되고 싶다. 그것이 어쩌면 성숙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번아웃 후의 내가 숯이 되려면, 나무의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 스스로를 다잡고,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흘려보내지 않으리라. 응원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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