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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Jan 03. 2022

해가 짧은 것이 겨울이라서 그런 줄 알았다.

인생의 내리막에선 속도가 빠른 법이다.

    12월은 좀 바빴다. 연말이라 약속이 많았는데, 그중에 하나는 교수님과 한 IEEE Sensors 저널 제출 약속이었다. 연말까지 과제 관련해서 저널 하나는 내는 것으로 올해 초부터 약속을 했었는데,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12월에 접어들어서야 논문을 쓰게 됐다. 연구 스케줄도 좀 우습다. 6월까지는 학업이니 과제니 바빠서 못썼다고 하지만, 8월까지 다른 주제로 연구를 하다가 결국 엎어졌고 8월 말에야 센서 기반 행동 인식 문제를 다루게 됐다. 계속 컴퓨터 비전 쪽 연구만 하다가 센서 쪽을 들여다보니, 최신 논문들도 대충 한 2년 전에 비전에서 쓰이던 모델을 쓰고 있었다. 더군다나 몇 개 연구를 살펴봐도 딱히 두각을 나타내는 참신한 논문은 보이지 않길래 적당히 양식 맞춰서 쓰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퀄리티 나쁜 논문들 몇 개 들고 와서 나도 이 정도는 쓰겠다며 비웃어댔다. 큭, 국제 학회 하나도 붙어보지 못한 놈이 저널을 우습게 보는 것이야 말로 참 코미디였다.

    여담으로 저널과 학회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잠깐 설명하겠다. 학회 (Conference paper)는 마감일이 정해져 있고 보통 리뷰와 리부탈 후에 게재 승인 여부 (accept/reject)를 결정하며, 저널 (Journal)은 언제든지 투고가 가능하며, 편집자가 배정한 리뷰어와 수정 절차 (revision)을 거치며 논문을 다듬은 뒤 모아서 게재한다. 저널도 원고의 상태에 따라 major, minor 리비전을 거치며 만약 major 리비전을 거듭할 경우 게재를 불허하기도 한다.

    막상 연구를 들어가 보니 이 분야는 공식적인 벤치마크(benchmark, 모델의 성능을 비교하기 위한 데이터셋과 평가 기준)도 없는 것이었다. 논문마다 자기 입맛대로 데이터를 분류하고 나눠놓은 다음에 비교를 했다. 이 논문에서는 정확도 성능이 98%라고 표시된 모델이 저 논문에서는 93% 정확도를 나타냈다. 신호를 정규화하는 게 좋다고 해서 써보았으나, 정규화 하기 전보다 안 좋은 성능이 나왔다. 코드를 보기 좋게 올린 논문도 찾기가 힘들어서 결국 처음부터 모델 구현이니 벤치마크 설정이니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했다. (좋은 경험이기는 했다.) 그리고 제안하는 모델의 성능을 비교해보는데, 생각보다 아이디어가 효과적이지 않았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10월에 들어서야 모델을 폐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해봤다. 다행히 이번에는 꽤 유의미한 성능 차이를 보여 드디어 논문 작성 작업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것이 11월 중순이었던 것이다.


    일 년 내내 그토록 논문을 쓰고 싶었는데, 정작 쓰려니 이토록 쓰기 싫을 수가! 글쓰기에 대해서는 조금 자신이 있는 편이었만 한 문장 한 문장 뽑아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루 종일 한 문단도 쓰지 못한 날들도 많았다. 결국 12월이 되어서야 정말 마감에 쫓겨 이 악물고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직전에 7장 초본을 완성했다. 교수님과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한 달 내내 걸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연구실 사람들은 11월 CVPR 마무리하고, 과제 연간 보고 마치고 대충 한해를 갈무리하는 시점이었는데, 혼자 밤새가면서 구르려니까 죽을 맛이었다. 그 와중에도 노는 건 다 놀아야 하는 한량이어서 술자리는 꼬박꼬박 나갔다(...) 술을 먹지 않는 날은 연구실에서 밤을 새웠다. 졸업하는 룸메와의 마지막 한 달을 거의 서로 자는 모습만 보면서 지냈다.

    그러나 결국, 끝을 냈다. 퀄리티는 모르겠고 일단 끝은 냈다. (부끄러울 정도로 개발새발 쓰지는 않았다.) 교수님께 초고를 보내고, 오후 4시에 퇴근을 했다. 노래방에서 2시간 소리를 지르다가 방에 와서 게임을 잘 때까지 했다. 그다음 날부터... 연말이 딱히 기억에 없다. 연구실에 출근을 해도 별로 한 게 없다. 저녁 약속을 잡고. 썼던 논문 한 번 다시 읽으면서 수정하고, 다시 3월의 ECCV 목표로 새 주제 잡아서 논문 한 편 읽고. 헬스장 가고. 어라? 이렇게 써보니까 또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냥 정말 죽도록 출근하기가 싫었다. 크리스마스 끝나고 화요일에는 아무 이유 없이 출근을 안 했다. 쉬는 것에 정당성을 갖추려 백신 추가접종을 맞을까 했는데, 연구실 톡방도 조용하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길래 그냥 방에서 하루 종일 유튜브를 보다가 동아리 후배들이랑 술을 먹었다.


    연말의 뒤숭숭한 분위기에 편승해서, 번아웃이니 슬럼프니 이름을 붙여가며 일주일을 액괴처럼 보냈다. 11시에 적당히 침대에서 흘러나와 점심을 먹고 출근했다. 7시쯤에 저녁을 사 먹고 그대로 퇴근을 했다. 랩에서만 넷플릭스 드라마를 두 시즌이나 정주행 했다. 이거 랩 사람들도 가끔 읽는다는데 완전 큰일 났다. 저 노답이에요. 혼내지 마세요... 그런데 이렇게 노답 생활을 하니까 느낀 게 있었다. 하루가 짧았다. 한 것도 없는데 너무 빠르게 시간이 사라져 있었다. 해가 짧은 것은 겨울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삶의 내리막에선 원래 속도가 빠른 것 아닌가." 오... 순간 엄청난 위기의식이 들었다. 그러네, 나 지금 아주 스무스하게 추락하고 있구나. 보람찬 하루를 보내는 날은 하루가 길었다. 고단한 하루를 돌아보며 그날의 성과들을 되짚어보면, 뭔가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루가 짧았다는 말은 내가 진보(進步)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주저앉아서 하루를 흘려보냈다는 뜻이고, 성장 대신 침체를, 풍화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제동장치를 걸어야 할 시점이다.

    반성은 하는데 엄청 죄스럽고 부끄럽고 그렇지는 않다. 야, 어떻게 사람이 맨날 보람찬 하루를 보내니? 바쁘게 일했으면 적당히 쉬는 시간도 있어야지. 그리고 내가 여태 굴려온 것이 있으니까 이 정도 추락한다고 밑바닥을 뚫지는 않아. 그냥 재밌게 미끄럼틀 한번 탔다고 생각하자. 지금의 가속도를 추진력 삼아 다시 열심히 올라보는 거다. 그래, 비행(飛行)을 위한 비행(行)이었다고... 역시 나는 무시무시한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다.

    다행히 나는 연초에 놓여있다. 이루지 못할 한 해 계획과 다짐을 세워도 아무도 비웃지 않는 시기. 이미 몇 차례 공염불을 반복하며 게으름이 천성임을 확인한 나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만큼 그만큼의 도전을 하는 것이 인간 아니겠어요? 일찍 일어나서 긴 하루를 살아볼 것을 다짐해본다. 2022년 달력을 샀거든요, 거기에다가 매일매일 할 일 적어놓고 좀 열심히 살아봐야지. 3월 ECCV 제출 꼭 해내고 만다 얍! 기합 넣자 얍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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