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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Aug 03. 2022

아임 파인, 땡큐

잘 지내요. 감사해요.

    교수님은 10월 1일까지 논문을 완성하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논문을 못 쓰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죽은 것처럼 연구만 해보자고.
    교수님, 그럼 저는 계속 죽어있으면 되는 겁니까, 라고 뒤에서는 엄살도 부렸지만 나도 그럴 각오는 있었다. 이제 대학원을 입학한지도 3년 차. 이제는 뭐라도 나올 때가 됐다. 나보다 늦게 들어와서 먼저 떠나가는 석사 졸업생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진로 선택에 강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던 형들이 정작 나는 떨어졌던 학회에 논문이 붙어 번듯한 논문을 하나씩 들고나갔다. 학회 하나쯤이야 내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제출했던 논문은 참으로 부끄러운 수준이었고, 이번에 2저자로 도왔던 논문 역시 턱없이 기준 미달이었는데 그것이 떨어진 직후엔 어떤 부분이 문제였는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졸업한 형들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객관화도 못하는 놈이 무슨 염치로 자신감을 챙기겠는가. 나는 뭐가 그리 대단히 뛰어나서 박사 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싶긴 했다. 그냥 다 떠나서, '졸업'한 형들이 너무 부럽더라. 내가 선택한 대학원의 길, 과연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만큼의 시간과 괴로움의 가치가 있을까? 늘 하던 고민에 무게가 더 얹혔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전문연구요원 제도 변경에 흔들려 떠밀리듯 선택한 석박통합과정이었지만, 돌아간다 해도 나는 박사과정을 선택했을 것이다. 빈손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떳떳한 결과 없이 학위만 받는다면, 나는 품위를 Yuji할 수 있을까. 결국 나를 박사과정으로 떠미는 것은 전문연이 아니라 나의 초라함이다, 군 문제는 배수진일 뿐이다. 나는 박사과정을 선택함으로써 4년을 번 것이다, 떳떳한 결과를 만들기 위한.

     그 4년의 시작이다. 첫 술에 배부르랴, accept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제출은 '반드시' 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이제는 변명의 구실도 여유도 없다. 물론 과제팀이 그 사이에 또 몇 차례 바뀌어서 지금의 주제를 파기 시작한 지는 6개월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의 연구 주제에서 결과를 못 낸 것도 내 탓이요, 학회는 가까워지고 4년은 유한하니 교수님을 탓할 시간조차 아깝다. 이번에 꽤 마음에 드는 주제인 데다, 도와줄 동료들도 네 명이나 있으니 이번에는 무조건, 낸다.

      내야 한다- 가 맞겠다. 사실 우리 연구팀에서는 다가오는 학회에 stereo matching 문제로 논문을 내기로 했었는데, 내가 3D object detection 문제 쪽에 제안했던 '아이디어'를 조금 더 시도해보고 싶다고 버티다가, 어쩌다보니 팀 전체가 이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물론 문제 설정은 각자의 판단과 모두의 합의로 이뤄진 것이지만, 만약 내가 stereo matching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아마 원래의 목표대로 진행되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내 '아이디어'를 믿고 나를 1저자로 둔 채 서포트하겠다는 팀의 결정인데, 그만큼의 책임감이 나에게 지워진 셈이다. 문제는, 그때 나는 아직 아이디어의 feasibility, 말하자면 '말은 되는지' 조차 확인하지 못한 단계였다는 점이다.

    나는 게으른 인간이다.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실제로 옮기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사실 코드 구현은 하루 만에 마쳤는데, 그 주 내내 기반 프레임워크만 멀뚱멀뚱 들여다보며 코드 파악을 핑계로 머릿속으로 '정말 하기 싫네' 같은 생각을 했다. 바쁜 와중에 '스낵타운'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알게 되어 4달 전 그들의 첫 영상부터 가장 최신 영상까지 모두 확인을 했다. 결국 코드 구현을 들어간 것은 주간 성과 발표 전날이었는데, 마이티 토르에 빙의해서 수명을 깎는 심정으로 밤새 벼락치기를 하니 어떻게 구현은 마쳤다. (그것 봐, 하면 되잖아.)


     코드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시각은 오전 3시였다. 방으로 돌아가서 잠시나마 눈을 붙여야지, 생각했는데 창 밖으로 비가 내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연구실 건물 휴게실에서 밤을 새우기로 했다. 불편한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는데, 갑자기 동주 선배가 생각나더라.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일본 유학 생활은 아니지만  대학원 생활이,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이뤄져 있음을 떠올리고는. '생각해 보면 어린  동무를 / 하나, , 죄다 잃어버리고' 같은 구절에서 졸업한 학부 친구들과 석사 졸업생들도 생각하다가.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이르러  시가 마음에도  쉽게 씌여지는구나,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침잠하면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번에 논문은 확실하게 낼 수 있을까? 이번에 내서 떨어지면, 그걸 또 감당할 수 있을까? 그걸 4년 동안 반복할 수 있을까? 그걸 4년 동안 시도하다 보면, 한 번은 좋은 결과가 있을까? 그럼 끝일까? 애초에 이번에 내는 것 조차 못하면 어떡하지? 나... 10월에 죽나(?!) 분명 나름의 성과가 있었던 하루였는데, 막 개운하고 스스로가 기특하다기보다는 다음날 아침 마주할 실험 결과가 두려웠다.

    그럴 때면 자기 방어적으로 튀어나오는 생각이 있다. '사실 지금 느끼는 이 조바심과 불안함, 스트레스, 이건 다 내가 대학원을 와서 생긴 것이다. 만약 내가 학교를 나와 사회에서 월급 받으며 생활했다면 느낄 필요도 없는 자괴감, 열등감이니까. 내가 못난 것이 아니라, 상황이 힘든 거야. 나는 충분히 유능한 사람이다.' 그래. 내가 이거 좀 못한다고 해서 폐급 쓰레기인 것이 아니다. 카이스트 전교 꼴찌도 짱이다. 나는 이미 짱이다... 이런 유형의 위로를 가끔 건넨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막연하게, 조금은 다른, 당연한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논문을 못 낼까 봐 걱정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교수님도 별 신경 안 쓸지도.) 오히려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것으로 힘들어 할까봐, 나의 안녕함을 더 걱정해준다. 내가 일적으로 조금 못나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은 계속 나를 사랑해주겠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이 말이, 굉장히 나를 크게 울렸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지금 내 주위의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준다. 나의 불행을 기대하는 사람이 없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나 이미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꼭 '충분히 유능한 사람'이 아니어도, 연구자로서의 부진함이 내가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는 큰 흠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큰 안도감이 들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애초에 적을 두고 사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니까,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될만한 위로이지 싶다. 그런데 가만히 더 생각해보니, 예전의 나는 저 말을 믿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A가 나를 사랑하고 있나?'를 오랫동안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확인하고 싶어 했다. 지금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엄청 표현해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들에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나의 감정을 맡길 정도로 가까웠던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가 생긴 것이 안정감을 준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들과 생긴 거리감이 씁쓸하지도 않다. 힘든 시간이 끝나고 나니 지금이 옳은 것 같다. 혼자라고 해서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면 얼마든지 응원과 다정함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다시, 갈구하지도 않는다. 평생을 따라다니던 애정 결핍이 드디어 해소된 것 같다. 좋다.

    나는 하나만 잘하면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는데, 정작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나에게 사랑받는다. 내 사람들 그 중심에는 늘 내가 있다는 사실을, 내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 주변 사람들도 걱정시키는 일임을 다시 되새긴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어둠을 조금 내밀고 기다려볼게. 아침은 시대처럼 올 테니까.

    논문을 쓰기 위해 10월까지 열심히 해볼 심산이다. '죽은 것처럼' 하진 않을 거고, 건강하게 살아서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그래야 10월 이후로도 꾸준히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 솔직히 제출이야 어떻게든 한다. Accept 될 논문을 쓴다는 각오로 해보고, 기한에 못 맞추면 다음 학회 내고. 4년 길잖아. 이번에 못해도 이듬해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과 내공이 쌓여있지 않겠나. 이번에 문학의 뜨락 MT에서 민석이가 한 말처럼,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하는 것이 아니다."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한 것처럼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는 않겠다. 참고로, 책임감을 느끼는 용구는 강하다. 공저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는 잘하고 싶다. 할 수 있다.


    그날 이후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이 말을 주문처럼 되새기면 자기애가 뿜뿜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괜찮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How are you" 하고 나의 안녕함을 물어봐주는 사람들 덕에 나는 "I'm fine"이라고 답할 수 있다고, "Thank you"라고. 아임 파인, 땡큐.

...and you?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안녕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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