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서기 2023년 6월 22일 (지난주 목요일), 교수님께서는 오전 10시 반에 긴급 랩미팅을 소집하셨다. 이유는 최근 부쩍 해이해진 연구실 출근문화 때문이었다. 우리 연구실은 원칙상 자율(自律) 출퇴근이지만, 암묵적으로는 10시~10시 반 출근이라는 규칙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10시 반이 되어도 랩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출근을 하지 않는 행태가 반복되면서, 교수님께서 결국 회초리를 든 것이다.
아침부터 질책을 받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나, 나도 교수님의 분노에 일조하였으므로 할 말은 없었다. 며칠 전부터 11시를 넘어서 출근하는 일이 잦았고, 특히 지난주에는 그냥 이른 점심을 때우고 들어가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놀랍고도 안타까운 것은, 12시가 넘은 시점에도 내가 근무하는 작은방(우리 연구실은 큰방과 작은방이 나뉘는데, 나는 작은방에 소속된 영광(?)의 6인 중 하나다.)의 불이 꺼져있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하필 작은방은 교수님 사무실 바로 옆에 있어서, 교수님이 애써 확인하지 않아도 출근 여부를 아실 수밖에 없다. 지각을 했는데 내가 작은방 1등 출근자라는 것을 알 때의 기분이란... 그때 교수님 방에 불이 켜져 있다면... 조만간 일이 나긴 하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수님께서는 랩미팅에서 작은방을 집중 공격하셨다. 그러나 석고대죄하고 있었어야 할 그 자리마저도 나는 랩장님의 긴급 소집에 출근길을 서둘러서 겨우 들어와 숨을 고르고 있었으니... 유구무언, 할없하않이다 진짜... 죄송합니다. 무튼, 결국 교수님은 강경책을 내놓았다. 그냥 앞으로 한 달 동안 랩 전체가 소위 9-to-6, '9시 출근 6시 퇴근'을 하기로 한 것이다. 솔직히 "회사 다니는 사람들보다도 어떻게 근무시간이 적을 수가 있냐"는 말에는 입이 삐죽 튀어나올 뻔했지만, 1시간 일찍 출근해서 4시간 일찍 퇴근하라고 하니 "그래~ 까짓 거 한 번 해봅시다!" -라고 호기롭게 승낙했다. (교수님이 동의를 구하신 적은 없다.)
그래놓고 그날 밤 술을 거하게 먹고 다음날부터 15분 지각을 해버리니(...) 랩장님이 엎드려뻗치라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다행히 교수님은 다음날에 출장을 가셔서 자리에 없으셨다.) 진짜 전설의 레전드다 용구. 반성의 의미로 주말에도 출근을 했는데, 옆방에 주말임에도 출근해 계신 교수님이 내심 우리에게 강하게 말씀하신 것이 맘에 걸리셨는지 "주말에는 출근하지 말 것, 평일에도 6시에는 퇴근해서 저녁 있는 삶을 즐길 것"을 강조하는 전체 메일을 보내셨다. 그러나 나는 응~ 안 속아~ 하면서 교수님 퇴근하시는 것을 보고 퇴근하고, 월요일에는 아침 8시부터 나와서 밤 9시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이럴 수가 사람들이 6시가 되자 정말로 대다수가 퇴근을 해버린 것 아닌가! 이런 말 잘 듣는 모범생들 같으니. (*칭찬입니다.) 결국 오늘 오전에 다시 한번 교수님이 재차 "6시엔 퇴근하세요. ※반어법 아님."이라는 메일을 보내시고 나서야 나는 의심을 거두고 '그래, 오늘은 6시 퇴근을 해서 나도 저녁이 있는 삶을 즐겨보자' -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나의 첫 9-to-6 출퇴근을 성공하였다.
(그래서 연어초밥은 언제 등장하냐고? 아직 한참 남았다...)
6-to-9, ‘ ’의 시간
저녁 메뉴는 4500원짜리 GS25 혜자도시락 (너비아니와 닭강정)이었다. 점심 먹으러 나갔을 때 미리 사놓았지롱. 6시에 이른 전문연 퇴근 인증을 하고 기숙사로 향한 나는 기분 좋게 유튜브를 시청하며 도시락을 먹었다. 그다음에는 뭘 하지..? 뭐 하지... 그래, 밀린 빨래를 할 것이다. 근데 그거 뭔지 알지, 왜 빨래 돌리는 날에는 입고 있던 옷 빨기 전에 딱 운동해서 땀 쭉 뽑고 바로 세탁기 탁 넣으면 기분 좋은 거. 그래서 빨래하기 전에 운동이나 하고 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해가 떠 있으면 좀 덥잖아요. 결국 어영부영 유튜브를 더 보다가 9시가 넘어서야 밖으로 나섰다.
기상청의 예고와는 다르게 오늘은 하루종일 비 올 기색이 없었다. 장마라더니 오늘은 덥기만 하더라. 습하긴 했음. 그래도 밤이 되니 선선하고 괜찮아서 좀 걷기로 했다.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았단 것이다. 갑천변을 걷기에는 요새 벌레가 많아서 싫었고, 오늘은 목이 좀 아파서 노래방도 가기는 좀 그렇고... 영화를 볼까? 지금 극장에 걸린 것들 너무 보고 싶은 게 많긴 한데. 근데 영화표 값이 너무 비싸서 좀 괘씸하달까...
어느새 운동은 뒷전, 외출에 의미를 두고 콘텐츠를 구상하던 내가 문득 외롭다-라는 생각이 든 것은 기숙사에서 채 200m도 걷지 않은 시점에서였다. (애초에 운동할 생각은 딱히 없었다. 뛰면 땀나잖아; - 아까는 땀 쭉 세탁기 탁 어쩌고 하더니;;) 외로움? 심심함을 견디기 힘들어진 나는 일단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보통 하루에 두 번 한다. 점심시간에 한번, 저녁시간에 한 번. 밥 먹으러 이동하는 길에. 엄마가 받지 않길래 아빠한테도 걸었다. 이건 가끔 한다. 엄마한테만 너무 자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가끔, 부재중 전화 와있을 때 또 가끔... 아빠한테 걸었더니 엄마가 받았다. 엄마 폰은 TV에 연결해서 드라마 보고 있다고. 그래서 엄마랑 통화했다. ㅋㅋ. 평소에도 대단히 많은 얘기를 주고받는 것은 아니지만, 저녁 먹고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전화를 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1분 남짓의 통화를 끝내고, 그냥 엄마 아빠는 같이 있어서 좋겠다, (서로는 아무 생각 없는 것 같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니 할 게 없었다.
그러고 나니 할 게 없었다. (강조의 의미로 두 번 썼다.)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주위의 친구들, 생각나는 사람들이라고는 죄다 퇴근 안 한 대학원생 아님 대전에 없는 사람들이고. 일단 다 고추 달린 놈들뿐이라 갑자기 전화를 하면 서로 어색, 민망하기만 하겠다. 일찍 퇴근하니, 할 게 없었다. 저녁이 있는 삶. 그러나 그 저녁을 함께 보낼 사람은 없는. 애인도 없고, 돈 쓸 일도 없고. (애초에 돈도 없고...) 이거... 좀 별론데??!?!!
위기의식이 태풍(저기압 바람)처럼 휘몰아쳤다. '이딴 게... 이딴 게 life? 졸업 후에 매일 겪게 될, 퇴근 후의 허무함?' 갑자기 매일 밤마다 술 마시며 인터넷 방송 보다가 졸리면 잔다는, 취업한 친구 녀석의 이야기가 남일같이 생각되지 않으면서 기분이 확 우울해졌다. 진짜로 나 퇴근 후에 할 게 이렇게 없나? 롤, 유튜브, 넷플릭스. 작은 모니터 화면 하나 보면서 애써 히죽거리다 잠드는 게 나의 일 밖의 일상, 나의 6-to-9인가? 이건... 일상이 아니야. 일하(下)야 일하.. 연구실에서 하루 종일 있을 때는 그래서 괜찮았나? 일 하느라 일하를 경험하지 않아서?
생각이 많아졌다. 나의 6-to-9... 좀 뜬금없긴 한데 혹시 그거 알아요? 6이랑 9가 따옴표 기호랑 닮은 거.
위에 요거 66 닮았잖아요.
(진짜 글 막 쓴다;) 그래서, 그냥 나의 6____9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엄청 심각해져서는... 고민을 하다가 "연애를 하면 된다"-는 답을 내렸다. 그리고 고작 그런 까닭으로, 외로움을 가장한 심심함을 이유로, 연애를 꿈꾸는 나를 자책했다. 저질. 이기적이야! 그렇지만... 편하게 통화할 수 있는 사람 한 사람,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아무런 의아함 없이 '응 나도 사랑해'라고 대답해 줄 한 사람, 내가 먼저 찾지 않아도 나의 6-to-9를 궁금해할 한 사람을 원하는 게 죄야? 아니잖아! 그래서 이거 사실 구인용 글입니다. 연애할 사람 찾아요, 선착순 1명. 농담입니다. DM 주세요.
(그래서 도대체 전자레인지 돌린 연어초밥은 언제 나오냐 하면, 곧 나온다.)
홈플러스 연어초밥을 맛있게(?) 먹는 법
이런저런 생각으로 싱숭생숭해진 내 눈앞에 갑자기 번뜩이는 생각이 있었다. 정확히는 생각이 아니고 번개였다. 진짜로 하늘이 번뜩임;;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길래 꽤 먼 곳인가 보다 생각은 들었는데, 금방이라도 빗줄기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무튼 그때 번뜩인 생각이 뭐였냐면, 갑자기 술을 먹고 싶었다. 짜잔! 이럴 줄 알고 점심에 GS25에서 도시락 살 때 미리 사놓았지롱. 밖에서 먹으면 비싸니까... 돌아가는 길에 홈플러스에서 안주나 하나 사가야지,라고 생각하고 동선을 틀어 홈플러스를 향했다.
오늘의 운동(?)
홈플러스에 도착한 시각은 대략 9시 40분. 그곳에서 나는 오늘의 안주를 발견했다. 사실 돈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던 산책이었기 때문에, 정말 가격이 좋은 친구를 만나지 않으면 둘러만 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내 눈길을 잡았다.
13990원이었던, 8390원 마트 초밥
사실 이 녀석을 보자마자 순간 울뻔했다. 고작 10번의 젓가락질로 소모될 녀석이 내가 먹은 저녁 혜자도시락의 3배 이상 비쌌다. 분명 오후 4시 제조되었던 순간에는 그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고오급 음식이, 하루가 채 흐르기도 전에 20%, 30%. 가격이 떨어져 결국 내 눈앞에서 40% 할인 스티커까지 붙은 것이다. 덕지덕지 붙은 바코드 라벨에서 오는 참담함이 있었다. 팔리지 않아서 스스로의 가치를 낮추는, 소유된 적 없는 물건의 감가상각. 그것은 마치 연차가 쌓일수록 자존감이 떨어지는 대학원생, 또는 솔로 n년차의 모습 같았다. Exponential decay를 가정할 때, 너의 반감기는 8시간도 안 되는구나. (ln(0.5)/ln(0.6) * (-5.666) = -7.68) 그 시간까지 버티지 못하고 오늘이 지나면 폐기될 이 불쌍한 녀석을 내가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앞에서 서성이는 직원분을 주시하며 혹시 50% 할인까지 떨어지지는 않을까 나는 주저했다. 8390원 앞에서도 망설이다가 초밥을 꺼내든 나는, 한심하게도 행복했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지만, (초밥 10pc는 배불러도 들어가니까^^) 이 정도면 꽤 고급 술안주가 아니냐며. 5시간 전에 만들어진 삐쩍 마른 초밥을 들고 말이다. 솔직히 음식점에서 누구 접시 위에 올라가 있던 초밥을 5시간 후에 먹을 거냐고 물으면 기분 나빴을 텐데, 그런 생각은 애써 지웠다. 내가 이 초밥에서 느끼게 될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냐, 아니면 과거 먹었던 같은 초밥의 맛을 회상하며 느끼는 착각이냐, 이런 생각도. 애초에 이거 회 상한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에 코웃음 치며.
결제를 하는데 직원분이 홈플러스 포인트 가입이 되어있냐고 물어보셨다. 기억이 안 나서 적립은 필요 없다고 했더니, 굳이 가입을 시켜주시려 하더라. 그런 데에 시간 뻇기는 것도 싫어서 거절하려 했는데, 신라면 5봉을 100원에 가져가라는 말에 순간 전의를 상실하고 개인정보를 넘기고 말았다. 그래도 나, 오늘 번호 따였음. 생일도 물어보시더라. 하하. 사실 봉지라면은 기숙사 방에서 끓여 먹지도 못한다. 그래도 받아서 쟁여두면 나중에 술안주로 뿌셔뿌셔처럼 먹으면 되겠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학교로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을 더 서둘렀다. 덥고 습한 상온에 초밥을 오래 노출시켜 봐야 좋을 것도 없고. 사실 방에 들어가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냥, Fig. 2에 있는 저 포개진 가격표시의 이미지가 너무 시적으로 다가왔다. 결국은 시 대신 이딴 일기나 쓰고 있지만. 사실 이것만으로는 좀 약했는데, 부지런히 천변을 따라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너무 시적으로 미친 발상이 떠올라서... 그건 바로, 방금 내가 폐기 직전에 구출한 이 초밥 친구들을 갑천에 방류해 주는(?) 일이었다. 기껏 산 초밥을 강에 쏟아버린다니, 정말 미친 짓이잖아?! 당장 하자.
그러나, 실행에 옮기진 못 했다. 연어초밥만 샀으면 했을 텐데, 광어는 바다 생선이니까...
방으로 돌아온 나는 재빨리 초밥을 냉장고에 넣고 빨래를 돌리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9-to-6에 대해 쓰며 초밥과 술을 먹었다. 그리고 6-to-9를 쓰다가, 남은 연어초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왜냐고 하면, 돌아오는 길에 갑천에서 미친짓을 하지 못한 나의 소심함에 대한소심한 반항이다. 정신 나간 짓을 해보고 싶었다. 아니, 덥고 습한 여름밤과 열평형을 이룬 초밥은 좀 불쾌하니까, 그래서 냉장고에 넣긴 했는데. 또 차가운 밥은 먹으면 서러운 부분이 있다고. 그러면 어떡해, 전자레인지 돌려야지... 연어는 또 원래 익혀서도 먹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 여러분도 궁금해서 해보고 싶다면10초 미만으로 돌릴 것을 권한다. 나는 삼각김밥 돌리듯 20초 돌렸는데, 그랬더니 비주얼은 스팸 얹은 쌀밥에 맛은 진짜 그냥 참치마요 삼각김밥 김 떼고 먹는 느낌이더라.
근데 그냥 하지 마세요.
아무튼, 다사다난했던 나의 첫 9-to-6 출퇴근날의 "저녁 후의 일상"이 지나갔다. 연애에 대한 강한 위시를 연어로 풀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나의 6-to-9를 위한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 사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늦게 퇴근하는 거임. 바쁜 게 좋은 거지~ 이거 글 올리고 실험 돌린 거 결과 확인해서 밤새 또 하나 넣고 자야 됨 지금;; 벌써 2시네 아. 내일 출근 어떡하냐. 혹시 이거 여기까지 읽은 사람 있어요? 에.. 이런 누추한 일기에 귀한 시간 써주셔서 죄송합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좋댓구알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