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애를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빗댄다면
*이 글은 하늘꿈 선생님과 함께 했던 비전 글쓰기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나의 소명을 보는 것이 봄
소명의 길을 여는 것이 여름
갈 때를 알고 가는 것이 가을
그리고 삶의 결을 매만지는 겨울
한 해의 시작은 봄부터 세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왜 나의 삶을 계절에 비유함에 있어서 첫 순간을 ‘겨울’에 빗대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삶은 말 그대로 겨울에 시작했다. 그리고 가늠해 보건대, 내 삶을 겨울로 시작하여 15년씩 끊는 것이 가장 적절한 삶의 비유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일은 12월 1일, 마지막 달의 첫날. 모두가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나는 삶을 시작했다. IMF가 닥친 1997년의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모르고 유년기를 보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주공 아파트에서, 소파도 없는 거실의 벽에 기대앉아 엄마와 함께 작은 TV로 인간극장을 보던 것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표현하는 한 단어는 ‘따뜻함’이다. 정확한 상황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건을 개키던 엄마가 인간극장 주인공의 이야기에 빠져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어쩐지 또렷이 머리에 남아있다. 엄마는 민망한 듯 웃으며 나를 안아주었다. 엄마의 순수한 감수성은 온기를 통해 전달되었고, 나는 오감과 같은 감각으로 공감을 배웠다.
나는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다. 가족, 친척과 이웃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나는 불행을 모르고 컸던 것 같다. 또래 친구들을 만나고 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넓어져만 갔다.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나는 매일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앞서 살았던 현명한 어른들이 우리를 위해 남겨놓은 수많은 지혜와 문화, 아름다움을 마음껏 만끽했다. 살아있음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과 감정들이 나를 형성하는 시간이었다.
나의 겨울은 따뜻한 계절이었다. 보살핌의 계절인 동시에 축복의 계절이었다. 성탄절에 서로의 행복한 연말을 축복하듯, 신년과 설날에 보람찬 한 해를 축복하듯 내 유년기에는 나의 미래를 축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소박한 희망부터 거창한 꿈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는 주변 사람들 덕분에 나는 한계 없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꿈은 꾸는 것이다. 빌리는 것이다. 나에게 꿈을 건네주는 사람들이 내게는 너무도 많았다.
어릴 적에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나는 그래서 어떤 사람인가’를 고민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16살, 중학교 3학년 여름에 나는 경기과학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정말 평범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정체성이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마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씨앗이 땅속에 묻혀있다가 떡잎을 내놓는 것과 같았다. 내가 사과나무인지, 복숭아나무인지 또는 그 어떤 나무인지,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영재학교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쩌면 과고가 아닌 외고 입시를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높은 확률로 이공학도가 아닌 인문학도의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의 나의 모습을 후회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하게 감사한 길을 걷고 있다.) 다만 하나의 길이 열린다는 것은 그 외의 길이 닫히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경기과학고를 입학하면서 '문과'가 될 일은 없겠다는 사실을 안 것처럼, 경기과학고등학교에서 카이스트로 진학할 때에는 종합대학교에서 열려있는 몇 개의 가능성 –이를 테면 대학원 과정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선생이 된다든지– 과는 다시 멀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는 그것이 아쉬움으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그런 과정이 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나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삶을 진행하는 중이다. 충실하게 길을 걸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이다. 나의 참된 소명이 교육자라면 교사 자격증이 없더라도 교육자의 삶을 살 것이다. 어떤 모습에 다다르는 길은 수만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나를 알아가고 있다. 내가 가진 재능을 발견하고 한계를 마주치며, 내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과 그것에 이르는 방법을 고민하는 중이다. 청춘(靑春), 그 이름에 걸맞게 이 시절은 봄이다. 나를 보는 계절이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매일 아침 새로운 활기가 피어나는 것이 놀랍고 감사하다. 그러나 건강과 젊음이 언제까지나 거저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정하고 화려한 나의 봄을 낭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과연 나는 20대의 끝에는 나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발견하고 거침없이 뜨겁게 전진하는 여름을 맞을 수 있을까.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할 것이다. 계절은 운명처럼 지나가고 다가오니까. 30대와 40대는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가장 낮이 긴 계절 속에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 속에서 동지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같은 꿈을 꾸며 밤을 지새우는 친구들을 만나, 더 큰 나를 깨닫고 혼자서 해낼 수 없는 일들을 이루기를 바란다. 삶의 동반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그러면서 부여되는 새로운 책임감에 기꺼이 임할 것이다.
나의 여름은 세상에 나의 삶이 열리는 계절이 될 것이다. 내 삶이 사회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나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열매가 열리는 계절이 될 것이다. 동시에 작열하는 계절이다. 치열하게 나를 태우며 꽃 같은 불씨를 피워내고 싶다. 물질이 아닌 에너지를 만들어내서 주위를 감화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영향력이 닿는 구석구석마다 더운 온기가 돌고 빛이 들어 새로운 비전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나의 여름이 언제나 희망차고 햇빛 가득한 날들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장마 같은 시간은 분명히 있다. 좌절감에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우울에 젖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어둠의 시간은 내게 항상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내 아래 단단한 땅을 딛게 되는 순간이다. 그것도 한때이다. 냉소하지 않는다면 빗물이 마르고 다시 구름처럼 떠오르듯, 나도 하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갖고 매미처럼 빗소리를 묻을 정도로 힘차게 노래해야 한다. 열정은 자기 확신에서 출발한다. 나는 나를 믿기로 한다.
나는 내가 상록수 같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때는 늘 푸른 사람, 불변성을 지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단풍처럼 세월에 물들고 싶다. 삶이 이끄는 대로 변화하고 싶다. 그때의 내가 더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내가 일궈놓은 가정과 소중한 관계들이 내게 안정감을 준다면, 처음의 모습은 퇴색하겠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내 곁에 남아줄 사람들이 있다면. 괜찮다. 더없이 풍요로울 것이다. 물론 변화하되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싶다. 그저 늙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서 성숙으로 넘어가는 것. 젊을 때는 없었던 새로운 통찰을 갖춘 아름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세상에 익은 과일 같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 이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서투른 이별은 미련을 남기지만 준비된 이별은 여운을 남긴다. 물러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밀려나는 것은 끔찍하다. 가을은 갈 때를 고민하는 계절이다. 떨켜를 준비하는 나무의 마음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으로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아직 그들 삶의 봄에 있는 어린 후배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지혜의 말을 고르고 골라서 조심스럽게 전해주고 싶다. 나의 흔적이 낙엽처럼 그들 발길 닿는 곳에 놓여, 정겨운 향기를 내뿜기를 바란다.
물러서는 과정은 한 편으로는 다시 어떤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가을은 나의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내가 일군 것을 거두고, 나에게 필요한 것이 얼마만큼 인지를 가늠해 본다.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나는 내가 가진 것을 세상에 줄 수 있다.
환갑(還甲). 다시 겨울은 돌아온다. 그때부터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거저 살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삶이 나에게 남은 역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흔히 노후를 제2의 인생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에게 허락된 제2의 인생을 나는 어떻게 가치 있게 살 것인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나의 첫 겨울, 유년기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보살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명을 축복하고 그들의 계절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본다면 행복할 것 같다. 삶의 순환을 이해하는 시점에서 나는 비로소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헐벗은 가지를 드러낸 나를 투명하게 돌아보며, 후회나 속죄할 것이 남아 있는지를 가늠해 본다. 내가 평생 이루지 못했던 소원들을 세어보고, 새롭게 도전하거나, 겸허히 포기하며 미련을 없애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인생을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삶의 결을 매만지며 평화를 찾는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면, 무탈하게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
...그리고, 봄
5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아무래도 "비전 글쓰기"이다 보니, 힘이 잔뜩 들어가서 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처럼 오그라드는 느낌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글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때의 나는 참 멋지게 살 각오와 자세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의 젊음이 부럽습니다. (아직도 젊긴 합니다.) 글에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