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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코다테에서 마주친 쉼표

숨 고르기의 필수성에 대해서

by 김산

10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내 매니저가 이직한다는 소리였다. 생각해 보면 내 삶에서 내 동 직급의 사람의 퇴사는 겪어본 일이었지만, 내 상사가 사라지는 일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 상사와 일하는 게 좋았다. 왜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가, 이후 나랑 맞지 않는 매니저와 일하면서 다시 반추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 전 매니저와 잘 맞았다고 생각했을까, 왜 현 매니저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가. 막연하게 느낌으로만 알고 정확하게 언어화하지 않은 것들은 절대 정리되지 않는다. 뇌에 힘을 주고 정리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불만과 불평만 가득한 일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딱 그때의 내가 그랬다. 머리에 힘을 주고 정리를 할 여유도 없었다. 내 삶에 불평만 가득하게 쌓여 갔다. 요가를 가도 머리를 비우지 못하고 회사에 매여 있었다. 삶에 직장이 빠르고 깊게 스며들었다. 결국 내 인생을 직장과 직장 스트레스가 잡아먹어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1년 내내 직장 생활은 어려움으로 가득했지만, 딱히 일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닌, 진짜로 이 일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자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추락했다. 이렇게 계속 살건가?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하코다테를 가기로 결정한 건 굉장히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눈을 싫어하고 추운 것도 매우 싫어하는데, 사실 올해 여름 내내 삿포로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고 이미 내가 보고 싶던 라벤더밭은 없을 시기였다. 게다가 휴가를 가서 또 이동에 시간을 쓰고 싶지도 않았고 힘도 없었다. 그냥 볼 게 많지 않은 조용한 동네에서 조용하게 회복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다 우연히 인스타 광고로 하코다테를 추천하는 포스팅을 보고 하코다테 직항을 끊었다. 즉흥적으로 4일의 휴가를 썼다. 비행기표를 2주 전에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는 첫 2일간의 숙소는 온센이 있는 곳에 조식과 석식 포함으로 끊어버렸다. 밥을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았던 탓이다. 이후 2일은 시내로 잡았다. 대충 갈만한 곳들을 지도에 찍고 그렇게 날아갔다.


놀랍게도 휴가를 쓰기 전날부터 회사생각이 점점 줄어들다가 비행기를 타는 동안 아예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은 여행 난이도도 높지 않기 때문에 걱정도 별로 되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온천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5시경 도착한 하코다테는 눈발이 날리고 이미 어두웠다. 버스를 타고 내려서 한참을 걸었다. 유노카와라는 온천 지구에 숙소를 잡았는데, 여기는 걸어가기는 아주 수월하진 않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는 매우 깨끗하고 넓었다. 가자마자 밥을 먹고,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노천탕은 바다를 향해 있었다. 이미 해가 떨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쏴아 쏴아 하는 바다의 소리가 들렸다. 칠흑 같은 어둠과 파도소리, 따뜻한 몸과 차가운 바닷바람에 식는 머리. 스트레스라는 것이 뭔지, 주말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인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스르륵 사라진다.


다음날 아침에도 밥을 얼른 먹고 온천욕을 한다. 아침이 되니 바다가 보인다. 가볍게 노천탕을 즐긴 후 샤워를 꼼꼼히 하고 나와 지도에 찍어둔 곳들을 한 곳 씩 가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심지어는 내 메인 카메라도 들고 오지 않았다. 그런 부담까지도 모두 두고 오려고 이번에는 아버지의 오래된 디카를 가져왔다. 18년도 넘은 디카이다. 내가 중학생 때 쓰던 그런 디카. 다행히 이 디카는 SD카드를 쓰는 버전이라 충전기와 충전지만 사도 사용이 가능했다. 무척이나 가볍고 플래시도 내장이라 편했다. 덕분에 가볍고 도난 부담도 없이 다녔다.


전체적으로 총평을 내리자면 하코다테는 작다. 할 게 많지 않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2박 3일로도 충분하다. 나는 4박 5일을 다녀왔는데, 관광만을 위해서는 그렇게까지 이 도시에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동네는 작고 큰 건물도 많지 않다. 그래서 굉장히 잔잔한 소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다른 건 몰라도 케이블카를 타고 야경을 보러 가는 것은 꼭 추천한다. 도쿄와는 다른 의미로 야경이 아름답다. 잔잔하게 점멸하는 빛들이 밝히는 지형이 위로가 되는 곳이다. 11월에는 해는 약 4:30에 떨어지니, 하루의 시작을 당기는 것이 좋다. 날씨는 하루에도 계속 변한다. 바람막이와 목도리, 경량 패딩이 필수이다. 또한 하코다테는 첫 개항지이기도 했어서, '추억의 마니'에 나올 법한 일본식과 서양식이 합쳐진 양식의 건물들을 구경하기 좋다. 종교 시설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 있다는 인상도 받았다. 정교회, 수녀원, 신사, 불교 법당 등을 한 장소에서 다 볼 수 있다.


어쩌다가 그랬는지 여행하는 동안 자기 계발에 대한 알고리즘이 타고 들어와서 좀 보게 되었다. 한번 나락을 갔다 온 사람이 하는 강의였는데, 평소에 그렇게 관심 있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의 말이 머리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이 왜 어떻게 성공했는지 물어보고 관찰했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내 삶에서 닮고 싶다고 생각한 롤모델들이 꽤 많았고 그들이 어떤 과정으로 그 자리까지 갔는지를 찾아본 적은 있지만, 그들이 어떤 태도로 그런 삶을 살았는지를 뜯어보려고 하진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내가 존경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왜 존경스러운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쪼개 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고, 한국에 돌아와 삶을 정리하면서 좀 더 구체화하다 보니 어느 순간 큰 깨달음이 오게 되었다. 이 부분은 다음 편에서 조금 더 써 보겠다.


그 외에도 쉼의 중요성에 대해 뼈저리게 느꼈다. 이전에 여행은 항상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여기 가서 이것을 보고, 이런 것을 찾아와야 한다. 거의 답사였다. 그래서 쉰다는 생각을 잘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쉬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삶의 하나의 부분으로 매몰되는 것을 단절시킨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삶의 중심이 뭔지, 나의 중요 가치가 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힘든 마음, 지친 마음에 매몰되어 자꾸 썩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단순히 나를 분리조치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회복이 많이 된다. 사실 나는 너무 지쳐서, 과연 내년에 내가 전시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작업을 병행하는 게 가능할까 고민했다. 근데 하루 이틀 쉬고 나서, 아, 사실 나는 정말 전시를 하고 싶구나. 나는 정말 작업을 하고 싶구나. 내가 이게 간절했지만, 올해는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았어서 마음이 더 힘들었구나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의욕이 샘솟았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그리고 직장 생활에서의 나 또한 객관화하게 되었다. 나는 관계지향형 사람이 맞다. 내 전 매니저와 나랑 잘 맞는다고 생각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전 매니저는 일을 통으로 주는 스타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통으로 맡기면, 나는 그것을 관계적 신뢰로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의 신뢰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을 한다. 일을 잘할 자신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과 잘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 상사를 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는가. 어떤 매니저는 분배형일 때도 있고, 누군가는 마이크로매니징을 할 때도 있다. 그것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나랑 맞지 않는 매니저가 온다고 해서 회사를 매번 그만두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생각의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이것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어떻게 이 그림을 바라봐야 이것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프레임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아까 언급했던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본받고 싶은 멘탈리티를 찾게 되었고, 그 이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이 모든 생각들을 정리하고 나를 정돈할 수 있었던 이유는 쉬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어쩌면 과신했다. 쉬지 않아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앞으로는 조금 더 정량화해서 내 상태를 추적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스스로 계량할 반응이나 계수를 만들고 그것에 따라 내 스트레스 및 체력 상태를 점검하고 필요하면 휴가를 쓰고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하코다테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첨부한다. 좋은 쉼이었다. 특히 온천의 매력에 빠졌다. 여행 이후 축농증이 도져서 고생을 좀 했지만. 머리는 전보다 맑다.

SAM_1016.JPG 비행기에서 촬영한 하코다테의 풍경
SAM_1467.JPG 츠타야에 다녀오던 밤, 눈이 펑펑 내렸다. 눈 내리는 밤 플래시를 켜면 참 아름답다.
SAM_1021.JPG 유노카와 숙소에서 찍은 풍경. 잔잔한 산이 편안하다.


SAM_1461.JPG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서 바라본 하코다테 야경. 야경이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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