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

[페낭은 처음이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벽에 새기는 일

by 변민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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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첫날에 갔던 Tugu Negara. 수도 KL에 위치하며 말레이시아가 독립할 때까지 있었던 세 번의 큰 전쟁 동안 순국한 분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추모탑이다. 첫 번째 1914-1918년은 영국과의 독립투쟁 기간을 의미하고 1939-1945는 일본과의 투쟁, 이후 1948-1960년은 "말레이시아 비상사태"기간으로서 말라야 연방과 말레이시아 공산당 사이의 내전을 의미한다. 사진 정면에 있는 친구는 여행 내내 의료 상자를 들고 다니면서 가는 곳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든든하고 고마웠던 친구!


2.jpg 탑의 각각의 사면체에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처음 위의 친구에게 설명을 들었을 때는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한쪽에서는 가족 모임을 하며 온 가족이 활짝 웃으며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고 현장학습을 나온 아이들이 탑 주위를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미소에 마음을 맡기며 잠시 무거운 생각을 내려놓았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잠시 묵념을 하는 사람들과 벽에 적힌 이름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밀려가는 사람들 사이로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기념비에 가까이 다가갔다. 우두커니 그곳에 서서 새겨진 이름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한참 넋 놓고 바라보다 곁에 야트막하게 자리 잡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망각이 기억 사이에서 늘 우량하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베네딕트 엔더슨은 그의 책 『상상의 공동체』에서 민족(Nation)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로 투쟁의 기억을 심어주는 것을 꼽았다. 비록 우리의 피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등으로 나뉘어 있지만 과거에 우리는 같이 등을 맞대고 함께 피를 흘렸던 동지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가 되기까지의 싸웠던 기억은 잊게 만들고 함께 공동의 적에 맞서 싸웠던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언제나 이름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흔히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희생을 이야기할 때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 나무"라고 표현하지만 '민족'(nation)이라는 단어에는 민주주의보다 더 섬뜩한 피냄새가 난다. 피는 피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피로 젖지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잊곤 한다. 배웠던 내용을 떠올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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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써놓은 역사 뒤로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다 뛰어노는 아이들을 되감아 봅니다. 이곳에 처음 돌을 쌓던 사람들의 마을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이란 단어 속에서 이름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끄집어 내봅니다. 기록해야 할 전쟁이, 기억해야 할 이름이 많은 이곳에서. 기적이 너무 흔해져 버린 세상 속에서 기적을 찾아는 헤매는 순례자가 전생에 비밀처럼 간직해간 이름을 나는 잠시 기억해냅니다. 허락되지 않았던, 내린 적 없던 함박눈 속 눈 한송이만큼의 기적을 나는 조심스레 바라봅니다. 언젠가 약속처럼 눈이 내릴 그곳에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벽에 새겨야 하는 일도 이름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탑이 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