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뽑힌 삶을 이야기하다

[북리뷰] 뿌리이야기를 읽고

by 변민욱




뿌리마다 특유의 냄새가 있어. 당신 겨드랑이처럼 습진 땅에 내려 물기를 흠씬 머금은 뿌리일수록 냄새가 짙고 깊지. 침묵하게 하는 냄새가 나. 억지로 침묵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침묵에 잠기게 하는 냄새.······입을 벌리고 냄새를 맡다 보면 뿌리가 혀로 번져오는 것이 느껴져. ······입을 벌려, 혀뿌리가 들여다보이도록 입을 ······ 더, 더 벌리고 냄새를 맡아봐. 짙게 간 먹물 같은 암흑이 냄새에 집중하게 하지. (p.14-15)


0. 글을 시작하며


남녀가 서사를 이끈다. 여자는 5년째 다닌 여행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실직했다. 남자는 나무뿌리로 오브제를 만드는 전위미술가다. 김숨은 이 둘의 대화와 독백으로 소설을 채워나간다. 하지만 곧 난관에 부딪힌다. 소재와 주제의 결합이 너무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그녀는 뿌리를 통해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부, 눈부신 산업화 그늘에 가려졌던 철거민들, 그러한 사회에서 태어난 입양아를 말하고자 한다.


"어째서 실뿌리 한 가닥까지, 모세혈관 같은 실뿌리 한 가닥까지 나무가 온전히 제자리에서 서 버티고 있을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한다는 생각은 못하는 거지?"

"이 나무가 얼마나 멀리서 날아왔는지 알아?"

"천이백 킬로미터······"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일 미터도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천이백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날아왔다고 생각해봐.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만 이동해도 시차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나무가 감당해야 하는 시차는 어째서 생각 못하는 거지?
(중략)
뿌리가 들릴 때 나무가 감당해야 하는 공포에 대해서는 어째서 생각 못하는 걸까."(p.38-39)

뿌리를 매개로 이들을 말하기 위해선 소재의 전형성과 결별해야 한다. 그래기 위해서 김숨은 사람보단 나무에, 이성보단 감성에, 냉철하고 명확한 분석보단 어렴풋이 닿을 듯한 감상을 믿고 글을 맡긴다. 이로써 뿌리는 의인화를 거쳐 작품 전체를 대표함과 동시에 전형성을 탈피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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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뿌리가 그리는 표정을 보라니까.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한 모나리자의 얼굴에는 행복감 83퍼센트, 혐오감 9퍼센트, 두려움 6퍼센트, 분노가 2퍼센트가 나왔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하고 오묘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83퍼센트나 되는 행복감 때문이 아니라, 9퍼센트의 혐오감과 6퍼센트의 두려움, 2퍼센트의 분노 때문이라고 한다. (p.23)


복숭아나무 뿌리가 그리는 표정을 보라니까.

저 표정을 좀. 뿌리가 사방으로 뻗치고 엉기면서 그리는 형상이 마치 얼굴이 짓는 표정 같지 않아? 땅 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저 표정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을 거야. ······저 복숭아나무 뿌리가 짓는 표정을 풍부하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슬픔일 거야. 33퍼센트의 공포와 19퍼센트의 슬픔 (p.23-24)


작품 속 그는 "지구 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풍부하고 절묘한 표정을 짓는 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나무뿌리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작가의 치열한 고민이 담긴 문장이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하고 오묘한 느낌을 주는 것은 83퍼센트의 행복감이 아닌 그 나머지 17퍼센트로 인해서다. 뿌리의 표정은 33퍼센트의 공포와 19퍼센트의 슬픔으로 빚어진다.


작가는 모나리자 그림과 뿌리의 연결을 시도한다. 원뿌리에서 곁뿌리들이 확산되는 수많은 경우의 수들을 생각해보면 뿌리의 표현은 정말 다양할 터였다. 그런 뿌리의 표정이 드러나는 때는 사실 뿌리가 뽑힐 때다. 모나리자와 뿌리를 통해서 개별화를 작가가 성공했다면, 나는 개인과 뿌리로 구성된 사회와 생태계를 보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급격한 산업화로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생태계와 인간 생태계(사회) 모두 '낙원구 행복동'이란 존재하지 않는 주소였다. 그 둘에게 현대사는 뿌리 뽑힘의 역사였다.



2. 가학- "고정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쉽지 않아"


그는 아무 뿌리나 오브제로 만들지 않는다. 그가 오브제로 선택하는 뿌리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천재지변의 화를 입었거나,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살던 곳에서 내쫓긴 철거민들처럼 하루아침에 굴삭기에 파헤쳐진 뿌리"다. 오브제를 만듦녀서도 그는 점묘를 위해 촛농을 사용한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촛농과 함께 그는 뿌리의 슬픔과 고통과 조우한다. 그 또한 뿌리 뽑힌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 소리에 섞여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멀리 보내졌을까?

태어난 자리에서 뿌리 뽑혀 얼마나 멀리······ 야멸차고 매정했을 손아귀에 의해 뿌리 뽑혀 몇 킬로미터나······ 십 킬로미터? 이십 킬로미터? 삼십 킬로미터? 아니면 그보다 더 멀리······.

서른세 살이 되어서야 알았어. 돌도 안 지난 나를 입양하셨다니까,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것 같아. 버려지는 순간 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지 않았을까? 뿌리 뽑히듯 뽑혀 버려지는 순간 알지 않았을까?


이런 과거를 가진 그에게 점묘의 시간은 곧 뿌리와 대화하는 시간이다. 이로써 나무뿌리는 단순한 사물로서의 뿌리의 기능을 넘어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는 여자가 실뿌리를 모두 잘라냈을 때 자신의 사지에서 그것이 잘려나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며,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 보내진 사업가는 뿌리로 만들어진 오브제를 보며 눈물을 짓는 것이다.


고정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쉽지 않아.

그 어떤 사물이나 존재를 어딘가에 고정시킨다는 게, 내게는 불가능한 일처럼 어렵게 여겨져. 옷에 단추를 매달아 고정시키는 것조차 말이지. 벽 못에 액자를 걸어 고정시키는 것조차, 옷걸이에 모자를 걸어 고정시키는 것조차, 심지어 시선을 한 곳에 고정시키는 것도.

그래서일 거야. 그만 박아도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꾸 박게 돼. 하나 더, 하나만 더, 딱 하나만 더······ 불안하니까 계속 박게 돼. (p.44)


그는 뿌리를 고정하는 데 집착을 넘은 절박한 도착증적 증세까지 보인다. 하지만 뿌리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심지어 자신의 감각마저 고정하는 것이 그에겐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 그는 땅에서 들린 뿌리에게 "허공은 죽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느낀다. 탄생에서부터 뿌리내리지 못한 그에게 고정이란 이질감이 느껴지면서도 갈망하는 단어이자, 그의 사전엔 존재할 수 없는 단어다. 그러므로 나무뿌리를 고정하는 행위는 공허한 구현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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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일까 ······.


뿌리를 보던 나는 갑작스런 의문에 휩싸인다.

내가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일까 ······.

신기하지 않아? 수백수천 번을 해도 모자란 그 질문을 수만 번을 해도 모자란 그 질문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에게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야.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서도 말이야. ······여기 있는 게 ······없지 않고 있는 게 ······그냥 당연한 건가? 어떻게 그게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지?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는 것이지? ( p.34-35)

소설 속에선 갑작스럽지만 사실 갑작스럽기보다는 인류가 유사 이전부터 고뇌하던 문제다. 다만, 우리가 늘 망각하고 있던 질문을 작가는 인물들을 통해 독자에게 던진다. 이 질문은 소설을 관통하며 각각의 뿌리 뽑힌 인물들과 반응하며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먼저 이 질문을 떠올린 '나'다. 그와 헤어진 이후에도 그녀는 '관성'처럼 그의 작업실을 향한다. 관성은 소설 속 그녀와 현실의 대다수 사람들을 이끈다. 타성에 이끌린 삶이 관성처럼 이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정작 내면의 질문은 듣지 못한다. "내가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일까 ······. " 관성에서 벗어나 이 질문이 들려오는 시점은 작품 속 여자가 다니던 여행사가 문을 닫은 것과 같은 강한 반작용에 의해 그 상태를 벗어날 때다. 비록 종군위안부나 어린 시절 입양이라는 사건에 비해서는 사소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질문을 떠오르게 하기 위해선 충분한 사건이었다.


소설 속 남자가 마주한 이 질문은 탄생에 관련된 질문이 된다. "내가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이지?" 불투명한 것 투성이인 그의 탄생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은 그의 탄생이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는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서 그는 양부모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도 무엇인가 해갈되지 않음을 느낀다. "자라는 동안 부모님이 날 한결같이 사랑하고 아끼는ㄷ도 이상하게 놀이공원에 버려진 느낌"만 들뿐이다.


그녀의 고모할머니에게 당도한 이 질문은 단순한 개인의 고통의 차원을 넘어 민족적 아픔으로 승화된다. "내가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이지?" 가족들은 그녀를 외면하며 사후에도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쉬쉬한다.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려 하지 않고 다만 그녀가 등록하여 정부 보조금이라도 받았더라면 혼자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라 아쉬워한다. '생활'은 그렇게 지극히 일상적인 단어에서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단어로 변모한다. 작가는 해결의 층위로 나서며 그녀에게 손을 건넨다. 생장점에서 뿌리가 자라나듯 시나브로.



4. 공감과 공존


이러한 인물들을 관통한 해결책으로 김숨은 '공존'과 '공감'을 제시한다. 뿌리는 뻗어나가는 모양새에 따라 '심근성'과 '천근성'으로 나뉜다. 천근성 뿌리는 표면에 얕게 뿌리를 내려 수평으로 뻗어나간다. 이에 반해 심근성 뿌리는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깊고 단순하게 뿌리를 내힌다.


이 소설 속에서 각각의 인물들을 이 뿌리 유형에 접목시킬 수 있다. 고모할머니와 남자는 그 사연으로 인해 포도나무나 천이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식된 메타세쿼이아 같은 천근성 인물이다. 반면 동네조차 떠나본 적이 별로 없는 나는 호두나무와 같은 심근성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 중요한 점은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보다는 두 부류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로에게 의지하며 김훈이 말했듯 인간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고, 인간만이 인간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인간만이 인간을 위로할 수 있는 당연하면서도 당위 명제의 실현이다.


수평을 지향하는 천근성 식물과 수직을 지향하는 심근성 식물을 밀식하면 뿌리의 모양과 성장의 특성이 달라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심근성 식물만 심었을 때는 경쟁하듯 키 재기를 하면서 서로 도태시킨다는 것을, 천근성 신물만 심었을 때는 영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말려 죽인다는 것을 (p.31)


그녀의 가족들이 은폐하려고만 했던 진실을 망각하지 않고 껴안으며 '남귀덕'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녀를 늦었지만 가슴에 새길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공감과 공존의 시작이다. 그러한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현생에서 이루지 못했지만, 이뤄져야 했던, 이루어지길 바라는 환상의 장면이다. 나와 고모할머니는 손을 마주 잡는다.


"당신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어······."

죽는 순간에 고모할머니가 손에 꼭 그러잡고 있던 게 뭐였는지 알아? 가제수건도, 보청기도 아니었어. 내 손······ 내 손이었어. 내가 그렇게 고백할 때마다 어머니는 질색을 하면서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무라지만, 내 손이 기억하고 있는 걸······ (중략)······ 일흔두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던 날 밤, 그녀의 손이 이불을 들추고 더듬어오는 걸 다 느끼고 있었어. 잠든 척 시치미 뚝 뗀 채 다 느끼고 있었어.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찾아 더듬더듬······ 더듬어오는 것을."(p.67)




글을 마치며


며칠 전 TV에서 '알쓸신잡2'란 프로그램을 보았다. 제주도에 간 그들은 제주도가 '제주도의 푸름 밤'에서 처럼 아름답고 낭만적인 섬이기 이전에 차별과 억압의 땅이었음을 이야기했다. 감사함과 함께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와 같은 일을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만 나도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 '뿌리 이야기'를 읽고 있던 와중이었다. 나 또한 나의 발아래 내린 뿌리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학업을 위해 상경했지만 나의 20년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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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 또한 원뿌리를 찾아 나서면 여타 제주도 학생들처럼 초등학교 시절 독서퀴즈나 독후감을 쓰려고 읽었던 '순이 삼촌'과 '다랑쉬 오름의 슬픈 이야기'가 있었다. 다랑쉬 오름은 작지만 아름다워 오름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오름의 여왕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물론 아름다운 오름이지만 그 아름다움 속의 비애도 함께 느껴진다. 이 오름의 아름다운 갈대밭은 예닐곱 개의 무덤을 안고있다. 4ㆍ3사건 중 마을 사람들이 다랑쉬오름으로 피신을 하던 중 토벌대에 의해 몰살당했다. 20가구 정도가 살던 다랑쉬 마을은 4ㆍ3사건 이후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유해발굴 사업 중 다랑쉬 굴에서 유골 11구가 발견되었다. 그중엔 아이들의 유골도 있었다. 나는 오름을 보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 이면에 위치한 '그 많은 제주도 도민들의 삶의 터전이 어떻게 저기까지 내몰렸을까'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전에 읽었던 정지아의 '봄빛'과 같이 생각해보면 뿌리 뽑힌 삶은 나의 도처에 있을 것이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야기를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서도 전 인류로 시야를 넓히더라도 이토록 고통스러운 인생이고 이토록 절망적인 역사가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소심하게 바꿔 적는다. 인생은 아름다워야 할 것이며 역사는 발전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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