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새끼, 그래 한 시상 재미났는가?
정지아의 소설 속에는 우리에게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들이 그려진다. 가끔 늙은 부인은 넋두리를 한다.(「세월」) 그 뒤에는 치매 걸린 아버지가 개나리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풍경(「봄빛」)과 백 살 된 치매 걸린 노모와 예순 살 먹은 막내아들이 함께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풍경」) 삶의 끝자락에 선 그들은 그 풍경이 그려졌던 시간을 회상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세월」이다. 그 속에서 노모는 치매 걸린 남편을 상대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전한다.
시방 워디 있소? 워느 질을 시방 허청허청 걷고 있소? 워느 질을 걸음시로 워느 때를 살고 있소? 오거리를 지남시로 그 길, 한겨울 얼음장을 알몸으로 밀치며 도강허던 지긋지긋한 시절을 살고 있소? 손바닥만헌 읍내, 워느 질에라도 이녘의 한때가 조작조각 흩뿌려있겄지라. 「세월」218쪽
개인의 삶에 대한 회한을 문학적 기반으로 취하는 것은 많은 작가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들의 회한에 많은 부분은 개별적인 꿈과 대결, 갈등 등이다. 하지만 정지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반적인 방법론을 벗어난다. 정지아 작품 속 풍경이 되어버린 인물들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적 사건들이 드러난다. 우리가 잊고 있던 여순 반란사건과 뒤이어진 빨치산 활동, 좌익활동 들이다. 다시 말해야겠다. 잊고 있었다기보다는 이념의 잣대로 인해 금기시되어 왔었다.
이녘이 준 삐라를 읽고 이녘 따라 동네걸음을 할 때도 나는 몰랐어라. 그것이 나라가 금허는 질인 중도 모리고 나라가 금허는 질을 가는 일이 월매나 고된가도 몰랐어라. 이녘 말만 철석 같이 믿고 그것이 사램답게 사는 질인 중만 알았지라 「세월」221쪽
그날 큰 형과 작은형은 군인들 틈에 끼어 무슨 이야긴가를 열심히 주고 받았고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밥을 먹은 그들은 어머니에게 두 끼 밥 값으로 적지 않은 돈다발을 안기고 떠났다. 그 행렬의 마지막에 큰형과 작은 형도 끼어 있었다. 세상일을 잘 알지 못했던 그의 가족은 큰형과 작은형이 무슨 좋은 구경이라도 가는 줄 아는 양 웃으며 손짓해 보냈다. 그것이 큰형과 작은형을 본 마지막이었고, 외딴집이 세상의 중심처럼 활기찼던 유일한 날이었다.「풍경」62쪽
매카시의 광풍이 옅어진 시대에 정지아는 조심스래 그 이야기를 소설에 담는다. 「풍경」에서 삼십년 넘게 치매에 시달린 노모의 상흔은 유년 시절 빨치산을 따라 집을 나선 첫째와 둘째 아들에서 비롯됐다. 「세월」에서는 좌익 활동을 했던 남편에 대한 넋두리 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모두들 오랜 세월 동안 언급조차 금기시되었던 이들이다. 주류 역사 속에서 벗어난 이들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문학은 그들을 껴안는다.
살아봉게 말이어라.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고라. 멫살부텀이었는가는 몰라도라. 엤 기억들이 시방의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서라. 앞도 뒤도 읎이. 말하자먼 제 꼬리를 문 뱀멩키 말이러라. 나는 말이어라. 갇힌 시간 속에서 살아온 날의 기억을 뒤씹는 한 마리 소가 된 것 맹키어라. 이럴 중 알았으먼 말이어라, 날 서고 아픈 기억 말고라, 되새기기 좋게, 되새기먼 함박웃음이나 벙글어지는 말랑말랑 보들보들, 그런 기억이나 맹글어서라, 요리 벹 속에 나앉아 따독따독, 이뻔 기억이나 따독임시로 따순 아지랑이로나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승과 작별했으면 안 좋았겄소이. 누군들 그리 살고 싶지 않았것어라. 그리 살고 싶어도 안되는 것이 세상지사지라. 「세월」234쪽
노망들기 전까지 어머니는 두 형의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가 제삿밥이라도 먹게 해주자고 하면 어머니는 불덩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 불덩이가 어머니의 몸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다 끝내 머릿속을 새까맣게 태워버린 것이다. 「풍경」62쪽
그런 어머니의 목숨을 질기게 붙들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그는 때로 궁금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습관이리라. 먹고 싸는 본능마저 사라진 후에조차 버릴 수 없는, 기다림이라는, 평생의 서러운 습관. 노망든 어머니의 삼십년은 기억을 쌓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잃어가는 시간이었다. 「풍경」65쪽
기억은 어설픈 축복이다. 과거에 역사가 그들에게 입힌 상처는 역사의 태엽을 뒤로 되돌리지 않는 한 회복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정지아가 적은 소설은 그 시대적 상처 하나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노년시절까지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노모 개인의 자서전이며 정제되지 않은 육성의 편지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그 고통 속에서도 삶은 이어져야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삶을 관통했던 사실들이 총알이라고 하면 지나친가. 이 부정할 수 없었던 진실의 진통제가 치매, 망각 같은 병리적 현상들이라고 하면 과장인가. 하나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가장 깊숙이 존재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 그들을 끝까지 옥죈다. 잊혀질 기억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월권이다.
내 새끼, 그래 한 시상 재미났는가?
어매 나가 왜 세상에 나왔는 중 안가?
왜 나왔는디?
어매 뱃속에 있는디 되게 심심허잖애. 시상에 나가면 먼 재밌는 일이 있능가 글고 얼릉 나와부렀제.
내 새끼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재미난가?
이.「풍경」68쪽
다사다난한 젊은이와 늙은이까지 지난 소설 속 인물들은 이제 죽음과 삶을 동시에 보는 나이가 되었다. 망각 속에 한(恨)마저 습관이 돼버린 어머니었다. 웃음조차 잃었던 어머니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늙은 자식에게 묻는다. "내 새끼, 그래 한 시상 재미났는가?" 그들은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연좌제로 인해 평생을 고통받아야 했으며, 삶의 끝자락에서는 '고리대금업자 같은 세월의 수금'을 겪는다. 이러한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그들의 깊이를 이해할 순 없다. 그러나 이런 소설은 그들의 노추(老醜)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순 없게 만든다.
정홍수 평론가는 책의 표지에서 "그 같은 근대소설의 근복적 책무를 새삼 돌아보게 하면서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 단순한 모사의 기술이 아니라 인간 진실을 상상하는 절실하고 비범한 열정의 소산임을 다시 확인케 한다."라고 평했다. 칸트는 "지식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 없는 지성은 공허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리얼리즘에도 적용이 될 것이다. '지성'이 없는 재현과 '감각' 없는 글을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지성과 감각이 합쳐진 리얼리즘은 그러한 작품이 닿지 못할 곳에 도달한다. 이 정지아의 소설이 그러했다.
여기서부터는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다. 글을 마치며는 애초에 그러려고 시작한 파트였지만, 이전까지는 작품의 무게에 눌려 내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 느낌을 더 적으라는 피드백이 많았다.
이번 소설의 글을 마치며는 소설을 덮고 떠오른 도시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던 인물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역사 속 그들은 '산업화의 주역'이었다. 가난의 대물림을 막겠다고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일을 했다. 결국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하지만 IMF 이후 파티가 끝났다. 모든 게 무너지고 무너지며 쓸려내려 가며 비대칭하게 쌓였다. 아버지가 나온 회사를 아들은 들어가지 못했다. 이처럼 허리띠를 졸라 매며 키운 자식들은 N포 세대가 되었다.
그들이 찾던 파랑새는 평화시장에서 날아올라 낙수효과라는 최면에 걸린 채 두들겨 맞아 멍이 든 파랑새가 되어있었다. 위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현재(present)와 실제(real)는 유사해 보이지만 다르다. 현재는 때때로 실제의 것을 가리는 커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현재 유행하는 '힐링'을 싫어한다. 어설픈 이해와 위로는 사실 가장 큰 오해가 된다. 그러나 비관과 냉소도 위험하다. 냉소주의와 비관주의는 간편하지만 퇴행적이다.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부조리함을 방기하며 본의 아니게 키운다. 그러면 어찌해야할까. 나도 모르기 때문에 책을 읽는 중이다. '힐링'과 '비관' 사이 회색지대에 내가 찾는 길이 있지 않겠지 하며 땅을 짚으며 걸어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