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에서 몰락의 윤리 읽어내기

나는 사랑하노라,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by 변민욱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서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p.31)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call me ishmael). 후대에도 잊히지 않을 이 유명한 문구로 모비 딕의 막이 오른다. 이 소설의 해서은 그 독자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다양한 의미를 모두 담을 능력도 없거니와 당해낼 재간도 없다. 능력 내에서 다만 한 인물의 몰락에 대해서 다뤄 보고자 한다.


'여태껏 죽기 실패한 인간은 없었다.'라는 명쾌한 진리만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늘 비극에서도 특히 인물들이 택하는 몰락의 순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봄이 만개한 벚꽃이라는 아름다움으로 이를 탐닉하는 자에게 사색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면, 가을은 낙엽이라는 무수한 비애를 세상에 떨구며 이들을 사색에 잠기가 한다. 이 순환을 나는 꽃을 피우기 위한 소모적 윤회 과정 정도로 치부했다. 꽃은 찰나의 순간이 빚어낸 아름다움이었다. 나의 꽃이 길지 못할 거란 불길한 직감 때문일까. 나는 시간이 켜켜이 쌓일수록 꽃보다는 낙엽을 떨군 나무에게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찰나의 인간은 영속적인 자연에게 위로를 받는다. 그들은 연민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난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데 매번 실패한다. 나는 그들이 매번 빚어내는 아름다운 몰락인 앙상한 가지에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 글의 서론이자 결론이다.


에이해브의 섬뜩한 풍모와 줄무늬를 이룬 납빛 흉터를 보고 받은 충격이 하도 커서, 나는 이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섬뜩한 기분이 그가 몸의 일부를 의지하고 서 있는 거칠고 하얀 다리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상앗빛 한쪽 다리는 항해 중에 항유고래의 턱뼈를 갈아서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젠가 게이헤드 출신의 인디언 노인이 말한 적이 있었다. "에이해브는 일본 앞바다에서 다리를 잃었지. 그런데 돛대가 부러진 그의 배가 그랬던 것처럼, 에이해브도 항구로 돌아오지 않고 배에 준비해둔 다른 다리를 달았던 거야. 그런 다리를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p.170-171)


"그래, 스타벅. 그리고 모두 잘 들어주기 바란다. 내 돛대를 앗아간 녀석은 바로 모비 딕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의지하고 있는 이 죽은 다리를 가져다준 놈도 모비 딕이었다.······그래, 그래. 나를 파괴하여 영원히 의족에 의지하는 가엾은 신세로 만든 건 바로 그 가증스러운 흰 고래였다!" (p.215)


모비딕에서도 현실의 참혹함보다 몰락의 윤리를 택한 인물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바로 외다리 선장 에이해브다. 에이해브는 구약성서 열왕기에서 폭군으로 묘사되는 'Ahab'를 영어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소설에서 그가 왜 광기에 빠졌는지 직접적인 원인을 알려주진 않지만 그는 미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다리가 없어진 공허함을 사람들이 연민의 시선으로 채웠기 때문이다. 고래뼈로 만든 의족은 내게 비애로 가득 찬 와신상담이자 자가 모순으로 읽혔다.


한 발 한 발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쿵! 한 발은 그의 것이었다가

또각! 한 발은 그에게서 다리와 삶을 앗아간 고래의 것이었다가

쿵! 한 걸음은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한 것이었다가

또각! 한 걸음은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비참한 현실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무릇 깊고 진지한 생각은 망망한 바다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영혼의 대담한 노력일 뿐이며, 또한 하늘과 땅에서 가장 사나운 바람은 서로 공모하며 인간의 영혼을 배반과 구종의 해안으로 내던지려 한다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하지만 가장 숭고한 진리, 신처럼 가엾고 무한한 진리는 육지가 없는 망망대해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바람이 불어가는 쪽이 안전하다 할 지라도, 수치스럽게 그쪽으로 내던져지기보다는 사납게 으르렁대는 그 무한한 바다에서 죽는 것이 더 낫다.······ 그대가 죽아갈 바다의 물보라, 그곳에서 그대는 신이 되어 솟아오르리라! (p.152)


그러한 생애에서 그는 에피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로 변모한다. 비참한 현실에서 그려질 자신의 미래를 내다본다. 그러곤 스스로 만들어낸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쪼이게 된다. 하지만 여타의 가능성을 포기할 때 사람은 단순해지며 단호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모비 딕과의 정면 대결을 택한다. 그 또한 실패할 운명임을 자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몰락은 투쟁의 형식을 포기하는 순간 포기를 위한 또 다른 변명이 되어버린다. 그 전장에서 후퇴하는 순간 자가 모순은 자기연민의 증인으로 치열함을 비참함으로 바꾼다. 비록 대결 후 결과가 몰락일지라도 그 몰락에 고난이 있고 존엄이 있다. 그 길은 아이해브가 선택한 숭고한 몰락의 길이었다.

너는 이미 나를 때려눕혔고, 나는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너는 달아나 숨어 벼렸다. 부대자루 뒤에서 나와라! 나는 너에게 닿을 만큼 긴 총은 갖고 있지 않다. 나와라. 나와서 에이해브의 인사를 받아라. 이리 와서 네가 내 방향을 바꿀 수 있는지 보라. 내 방향을 바꾼다고? 너는 내 방향을 바꿀 수 없다. 그렇다면 네가 너 자신의 방향을 바꿔라. 그 점에서는 인간이 이겼다. 정해진 내 목표로 가는 길에는 쇠로 된 선로가 깔려 있고, 내 영혼은 달리기 위해 벌써 그 선로의 흠에 끼워져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골짜기를 건너고, 흠이 새겨진 산들의 심장을 꿰뚫고, 급류가 흐르는 강바닥 아래를 지나 나는 똑바로 돌진해 나간다! 철길에는 장애물도 없고, 구부러진 모퉁이도 없다 (p.222-223)


'성공' 하나가 유일한 가치로 우상화된 세계에서 몰락은 자칫 실패로 비춰지고 만다. 성공을 좇고 실패를 쫓아내느라 사실 우리는 진정 그들의 앞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혹시 야누스 아닐까. 사회가 진보할수록 우리는 점점 몰락할 권리를 상실해간다. 더 많이 가질수록 고소공포증이 심해지는 이유와 같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종종 인간을 패배할 수밖에 없는 장기판의 말의 처지에 놓이게 한다. 허구를 현실로 착각하지도 말아야겠지만 현실을 허구로 오인해서도 안된다. 그곳에서 몰락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 결과가 실패이고 패배일 수 있겠지만 그 선택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몰락해야 하는가? 그리고 몰락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이 질문이 남는다. 에이해브는 이 모두를 보여주었다.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까지도.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관도, 관대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관대도 내 것일 수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고래여, 나는 너한테 묶여서도 여전히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다. 그래서 나는 창을 포기한다."


이 한 문장에 사로잡혀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몰락하는 자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하나를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고래는 선장을 삼켜버리지만 그가 내렸던 선택과 그 길만은 파멸시키지 못한다. 몰락하면서도 에이해브는 몰락한 왕국의 왕이 됨으로써 생을 다하고 존엄을 지킨다. 그래서 그는 패배하면서 이긴다. 소설 속의 패배한 그를 바라보는 시선과 실패에 대한 나의 감정이 부조화를 일으키며 난반사한다. 성공을 부르짖는 창에 맺히지 못하고 이내 현실과 괴리를 느끼며 현기증이 인다. 에이해브가 전력을 다해 포기한 창에 당신의 가치관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가 바다의 심연 속으로, 고래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갈 때 그 가치관의 일부 또한 몰락의 운명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바다라는 거대한 수의는 5천 년 전에 굽이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결치고 있었다. (p.628)


이 책은 나에게 '몰락은 실패로 점철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위 글은 나의 응수다. 독서가 표류하고 있는 삶에 답을 줄 수 있다는 희망에 나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독자가 던진 질문에서 허위와 가식을 도려낸 더 날것의, 체온에서 우러난 질문을 내놓는다고 믿는다. 답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그 답은 나의 체온보다 더 뜨겁거나 차갑다. 한 발 짝 물러설 수밖에 없는 그 답은 고로 나의 것이 되지 못한다. 이렇듯 고전은 답을 독자에게 순순히 건네기보다는 퀴퀘크의 관이 솟구쳐 나의 부표가 되어주듯 그렇게 삶의 부표가 되어줄 의문을 떠오르게 해줄 것이다. 답은 당신의 달라진 삶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는 결국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시대의 동어반복이 된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라 적었다. 김훈이 그 칼에서 들은 대답을 나는 모비 딕에서 느꼈다. 모비딕은 사랑도 꿈도, 세상의 모든 명사를 삼킬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모비딕은 나에게 주어이자 서술어가 된다.




글을 마치며


글을 쓰면서 정말 의외의 곳에서 다양한 칭찬과 비난을 듣는다. 하나하나 감사하다. 사실 에이해브에 내 고3 시절을 대입해서 읽었다. 나에게 과분한 관심, 칭찬과 덕담은 언제나 넘치는 비난, 냉소와 냉담으로 바뀌어왔다는 것을 나는 기억한다. 욕심이겠지만 표현을 정제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근본적으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열한 번째, 스물 한 번째 글을 쓰면서도 흰 종이에 대한 막막한 공포는 없어지지 않는다. 확실히 보이는 것처럼 낭만적인 취미는 아닌 듯하다. 글 쓰는 분들은 공감하시리라 믿지만 머리는 무수한 문장을 만들어내면서도 그 문장을 주저한다. 놀랍게도 이 기능을 정말 동시에 해낸다. 머리는 그래서 글을 쓰면서 피해자이면서 손에 대한 가해자가 된다. 손은 머리의 압제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펜만 연신 돌려댄다.


그래도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어 중언부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계속 쓴다. 흰 종이의 공포에 맞서며 자학과 자유의 글쓰기를 오가며 그래도 나는 어제보다 내가 성장할 거라 믿는다. 아니, 적어도 진실해져야겠다느 소심한 다짐을 한다. 그래도 언제까지 내가 글을 무한정 쓸 수 있을 거란 천진난만한 꿈은 접은 지 오래다. 다만 그때 내 또 하나의 몰락이 빚을 내 표정을 위해 노력하려 한다. 타인에게 나는 스 흔적이 일으킨 스펙트럼일 뿐일 테니. 스물 한 번 째 글은 이러한 생각을 하며 썼다.


위의 글에서 적은 문장보다 깨우침을 주는 문장이 많이 있는 책이다. 다만 많은 것을 담으려다 매번 실패했기 때문에 한 가지 관점만 갖고 글을 썼다. 읽으며 독자 분들만의 모비 딕을 찾으셨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당신께 감사드린다. 내 글이 아니라 우리의 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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