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 곁들인 흔해진 소통이란 단어에대한 짧은 단상
나는 종종 눈과 귀가 있어도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음을 느끼곤 한다. 타인과 대화를 해보면 이는 여실히 드러나고야 만다. 내 시력은 상대방을 직시하지 못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편견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자주 오차를 저지른다. 우리가 '소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하모니보다는 각자가 생각하는 음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협화음의 오케스트라 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운송하는데 만족하고 만다.
'눈이 있어도 모든 것을 볼 수 없다'의 대우 명제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눈이 없더라도'정도일 것이다. 카버의 대성당은 맹인에게서 보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눈과 귀가 있지만 친구뿐 만 아니라 아내와의 소통조차 매번 실패한다. 이런 그가 결혼에 대해서도 "어린 시절 연인이었다는데 그걸로 충 부하지"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소설 속 그는 어쩌면 사회에 수많은 '그' 또는 '그녀'의 자화상인 셈이다. 이런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 로버트라는 아내의 맹인 친구가 찾아온다.
눈이 멀었다는 게 뭘까 생각해보면 영화에서 본 것들만 떠오른다. 영화에서 맹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웃는 법이 없었다. 때로 그들은 맹인 안내견을 따라가기도 했다. 우리 집에 맹인이 온다니, 학수고대 할 일은 아니었다.(P.287-288)
로버트가 사고(事故)로 인해 맹인이 되었다면 그는 오히려 사고(思考)로 인해 맹인이 된 사람이다. 로버트를 봤을 때 그는 대뜸 "기차 여행은 어떻게, 좋았습니까?" "그런데 어느 쪽에 앉으셨나요?"라고 묻는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볼 수 있음'을 자신한다. 하지만 맹인 또한 "오른쪽이었소 실로 사십 년 만에 처음으로 타본 기차였소."라고 답하며 그 또한 볼 수 있음을 반증한다.
이 대화를 남자가 단순히 맹인을 놀리려다 실패한 장면으로 볼 수도 있다. 어렸을 때 마주 보는 친구와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워지는 말다툼을 벌인적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오른손을 들어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오른손을 들면 친구는 자꾸만 내 기준에서 왼손을 들었다. 마주 보는 친구를 거울에 비친 상이자 나와 동일한 존재여야 한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내 나는 대화를 포기하고 친구에게 바보라며 역정을 내기 시작한다. 실상은 내 오른쪽은 당신의 왼쪽이며, 나의 왼편은 당신의 오른편이다. 하지만 요즘도 내 대화를 돌아보면 그 수준은 유아기를 지나지 못한 듯하다.
시각은 언어라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질 때 그 태생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소설 말미에서 남자는 TV 속에 나오는 장면을 로버트에게 설명하는 중이다. 해골까지는 여차여차 설명해낸다. 하지만 이제 남자는 대성당을 맹인에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는 계속 실패한다. 대성당은 네모난 창문과 뾰족한 지붕 그리고 벽화로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설명은 컨테이너 집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성당의 느낌에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느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좋아.” 그가 말했다. “좋아, 같이 한번 해보자고.”
그는 내 손, 펜을 쥔 손을 찾았다. 그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
“괜찮아.”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맹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았다.
“감았나?” 그가 말했다. “속여선 안 돼.”
“감았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계속 눈은 감고.” 그가 말했다. “이제 멈추지 말고. 그려.” 그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그는 말했다.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편견에 사로잡혀버린 시력을 포기할 때 역설적으로 상대를 지각할 수 있다. 로버트는 그에게 대성당을 함께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그에게 로버트는 눈을 감으라 말한다. 속여서는 안 된다. 정말 눈을 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소통이 비로소 이뤄진다. 또한 소통까지 이르는 순간을 저자는 서술하지만 그 이후는 구태여 적지 않는다. 쓰지 않음으로, 썼다고 자신하지 않음으로 그는 오히려 소통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쓴 작가가 된다.
-소통 그 불가능성의 미학에 대하여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건 알겠어. ······ 대성당을 짓는 데 한평생 바친 사람들이 그 작업을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더군. 그런 식이라면 이보게.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p.305-306)
소통은 우리 사회 속에서 무수하고 하염없으면서도 희미한 단어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나갈수록, 글을 쓸수록 소통은 과연 가능의 차원에 존재하긴 하는 단어인지 의문이 든다. 당신은 내가 쓴 글을 본다. 그동안 많이 읽었다면 내가 어떤 부류의 책을 좋아하는지 안다. 또 어떤 방식으로 써 내려가는지 어떤 펜을 사용하는지까지 알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모른다. 내가 그 책을 읽고 어던 느낌을 받았는지 모른다. 서술 방식을 통해서 어던 느낌을 살리려 했는지 그 펜으로 어떤 심경을 써내려 갔는지 당신은 모른다. 더불어 나는 당신이 글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모른다.
소통은 불가능을 구현하려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흔하디 흔하게 쓰이는 것처럼 쉬이 쓰여서도 안 되며 더욱이 성공했노라고 자신해서도 안된다. 왜 소제를 대성당으로 했는지 나는 생각해봤다. 인용한 문장처럼 불가능처럼 보일지라도 쌓아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소통은 대성당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래서 대성당을 우리가 볼 때의 그 느낌처럼 알 수록 난해하면서도 아름답다.
소통의 세계는 현실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듯하다. 독서를 하며 깨우친 자그마한 깨달음이다. 도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깊게 파내려 가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포기해서는 안된다. 불가능성의 미학은 나아가는 허망의 거듭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쉼 없이 시도하면서도 쉬이 말하고 자신하지는 말아야 한다. 당신이 손에 넣었다 확신해 부르짖는 그 순간 그녀는 도망쳐 사라질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