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다시 읽다
2016년 12월부터 체류 이주민 숫자가 최초로 200만을 넘겼다. 2017년 10월 말 현재 체류 이주민은 2,135,049명이다. 국적별로는 중국 출신이 47.4%(1.011.237명), 베트남 7.8%(166,956명), 미국 7.1%(152,343명), 태국 5.8%(124,657명), 우즈베키스탄 2.9%(62,027명) 등의 순이다.
(출처: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 10월호)
외국인 임금노동자의 51%가 ‘단순 반복적인 일’에 31.7%는 ‘약간의 실무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일’에 종사한다 ‘전문지식과 기술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응답은 8% 정도다. 특히 장시간 노동과 고용불안을 겪고 있는 임금노동자는 한해 전보다 더 증가했다.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지난해 20만 8600명에서 올해 23만 9400명으로 14.8%로 늘었다. 또 상용직 노동자는 51만 5천 명에서 49만 3천 명으로 2만 2천 명(4.3%) 줄어든 반면 임시·일용직은 28만 7천 명에서 30만 6천 명으로 1만 9천 명(6.8%) 증가했다.
(출처:2017년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
저기 난장이가 간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어머니⋅영호⋅영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이젠 한국 문학의 성좌가 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지도 40년이 넘었다. 그 사이 바깥세상은 많이 변했다. 최저임금이 법으로 보장되었으며 노동조합들이 창설되었다. 난장이의 자손들은 공장에서 벗어났다. 키가 몰라보게 자랐다. 그들은 은강시를 떠났고 더 이상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인들에겐 여전히 난장이가 필요했다.
국내 낙원구 행복동이 철거되고 난장이가 사라지자 그들은 바다 건너 난장이들을 찾았다. 40년 전과 비교해서 변한 것이라곤 바깥세상과 난장이의 피부색뿐이었다. 더불어 제도의 이름뿐이었다. 산업기술연수생 제도가 고용허가제로 변해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과 이익을 좇는 거인들의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또 하나 그들 편에는 누구도 서있지 않았다는 점도 변치 않았다.
우리는 난장이를 난장이라고만 부르지 않았다. 그들을 호칭하는 '이주민'나 '외국인' 뒤에는 당연하게 노동자가 붙었다. 우리는 그들을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이웃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노동자로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의 편견 어린 시선 속에서 살고 있다.
20일 통계청과 법무부가 발표한 ‘2017년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를 보면 외국인의 건강보험 가입자 비율은 73.3%였다. 산재보험 가입 비율은 60.6%에 그쳤고,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에 가입한 비율도 각각 20.6%와 32.5%에 그쳤다. 고용보험과 국민연금의 경우 가입 예외 대상에 포함되는 외국인이 있을 수 있지만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의 경우 외국인도 의무가입 대상이다. 통계청 쪽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한 외국인이 많아 가입률이 낮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외국인 가운데 11.6%, 귀화허가자 중 15.9%는 지난 1년 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실감했다고 답했다. 이들 가운데 외국인 44.6%, 귀화허가자 35.8%는 병원비가 부담스러워 진료를 포기한 적이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출처:www.hani.co.kr/arti/PRINT/824427.html)
두 사람에게 이 사회는 괴물덩이리였다. 그것도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괴물 덩어리였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저희 스스로를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으로 보았다. 기름은 물에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도 합당한 것은 못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두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묻혀 굴러간다는
사실이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육교 위에서 中 p.146)
그들이 꿈꾸던 시절은 꽃이 피기도 전에 끝났다. 난쟁이들에겐 생계비는 고사하고 생존비조차 보장되지 않았다. 그렇게 생존비까지 아끼며 모은 돈을 그들은 고국으로 송금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돌아가지 못했다. 아니 많은 이들이 '코리아 드림'을 이루지 못하고 스러졌다. 작년 말 즈음 난장이들의 연이은 죽음이 사회문제로 거론될 뻔했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동료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언제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가. 기본적인 처우마저 보장받지 못한 체 동료가 허망하게 스러질 때가 아닌가. 하지만 난장이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거인과 키가 자란 난장이의 후손들은 가파르게 오르던 삼성전자의 주가와 비트코인에 한껏 도취돼 있었다. 난장이들의 죽음과 자살의 봉이 매년 상한가를 갱신하는 상승장 임을 몰랐다.
그렇게 한 해에도 수많은 난장이들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달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이 힘겹게 쏘아 올린 공이 아직 대기권을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의 지난해 월평균 소득은 '200만 원 이상~300만 원 미만'이 39만 4천 명(32.2%)으로 가장 많았다. '100만 이상~200만 원 미만'이 36만 5500명(29.8%), '소득 없음'(학생·주부 포함)이 28만 7천 명(23.4%)이었다. 월 소득 '300만 원 이상'인 외국인은 9만 6200명(7.9%)이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의 주거 형태는 전월세가 66만 1천 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서 무상지원(41만 7천 명), 자기 집(14만 6천 명) 순이었다. 월세로 사는 56만 명 가운데 한 달 월세액을 20만~30만 원이라고 설문한 이는 14만 6400명(26.1%), 30만~40만 원이라고 답한 이는 19만 명(34%)으로 집계되었다.
(출처: 2017년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
아버지의 키는 오십 센티미터밖에 안 되어 보였다. 작은 아버지가 아주 큰 수저를 끌어가고 있었다. 푸른 녹이 낀 놋수저를 아버지는 끌고 갔다. 머리 위에서는 해가 불볕을 내렸다. 아버지에게 그 놋수저는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불볕 속에서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지친 아버지는 키보다 큰 수저를 놓고 쉬었다. 쉬다가 그 수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아버지는 불볕을 받아 뜨거워진 놋수저 안에 누워 잠을 잤다. 나는 수저 끝을 들어 아버지를 흔들었다. 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은 놋수저 안에서 오므라들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中, p.196-197)
그들이 고장에서 수저를 만드는 동안 사회에선 수저 감평사들이 수저를 평가하고 다녔다. '윤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영희는 수저도 없어서 손으로 흙을 파먹는다'등이었다. 그들은 물고 태어난 수저를 놓고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다. 한국은 근대화 과정의 유전자학은 철저히 우생학을 따랐다. 그래서 거인은 더욱 거대해졌으며 난장이들은 더욱 작아졌다.
사회의 수저 논쟁을 들은 난장이는 의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수저는 물고 태어나는 돌잡이 용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등에이고 살아나가야 할 숙명의 무게에 가까웠다. 그렇게 사회에서 수저론이 들끓던 순간에도 그들은 공장에서 뜨겁게 달궈진 수저 속에서 여럿이 잠들었다. 그 수저 속에서 침묵하고 웅크린 그들은 딱 그만큼밖에 자라지 못했다.
당신은 좋은 이웃입니까? 이 질문은 동시대 난장이들과 함께 숨 쉬는 우리 모두를 피의자로 만들 수 있을 만큼이나 불편한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문을 삼갔었다. 질문하기도 전에 우리는 그들의 피부색을 따지고, 출신 국가의 경제적 수준을 따졌다. 피부색이 검을수록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낯빛도 함께 어두워졌다. 경제적 수준이 낮을수록 우리의 콧대는 올라갔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축제를 즐기기 전에 말이다.
언제쯤 우리는 난장이들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며 걸어갈 수 있을까. 짧은 문장으로 글을 마치며를 갈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