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고 '그럼에도 왜 그들은 사랑을 말하는가'

by 변민욱

좋은 드라마는 그 속에서 늘 현실이 과잉이거나 결핍되어 있다. 이 드라마는 감빵 수감자들의 이야기다. 제작진들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도 보여줬던 '각각의 인물에 대한 애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통해 우리가 범죄자와 교도소에 갖고 있는 기대를 조금씩 깨뜨리며 인간의 본질에 대해 재고하게 만든다. 우리는 통념적으로 범죄자들은 사회악이며 그들이 사는 교도소는 그런 자들의 집합소이니 더 이상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적 사고방식은 우리와 그들은 어쩌면 태생부터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차별적 사고의 소산이다. 죄에 대한 처벌은 받아야 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긍정은 위험하더라도 그들도 범죄자이기 이전에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닌가.



드라마 속 유 대위가 재심을 신청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오늘날 권력과 부에 의해 누구든 급작스럽게 삶의 방향이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뭉개지면서도 묵묵히 감내하고 또 대항하는 우리 모두의 삶의 표상이다. 마지막화까지 이어지는 염반장과 김제혁의 갈등 그리고 고박사와 회사와의 갈등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도소일지라도 자본의 바깥은 애석하게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서사 속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은 뻔하디 뻔한 결말이었지만 비관과 냉소를 잠시 덜어줄 통쾌함을 선사해주었다.



다음은 이들을 관리했던 교도관들의 이야기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선 보통 폭력적인 메커니즘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발동한다. 힘과 권력의 논리가 만연해지고 인간의 사랑과 애정 같은 이타적 유전자는 종적을 감춘다. 이런 시스템 하에 놓인 개인은 '인간다움'에 속하기보다는 이를 포기하더라도 힘을 표방하는 '주류'에 속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생존본능을 발휘한다. 그렇게 소수는 다수적인 게 되고 다수는 소수적인 게 된다. 단순히 교도소에 국한될 문제는 아니다. 학교폭력 와 같은 여러 사회문제가 위와 같은 플롯을 따른다.



그러나 이 교도소는 좀 다르다. 교도소장부터가 조금 다르다. 드라마 속 소장은 출세와 유명세에 눈이 먼 인물로도 보인다. 또 나 과장과의 대립 장면들을 보면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갔지 싶을 정도로 타인에게 의지하고 무능력한 인물이다. 하지만 승진은 고스톱으로 따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이런 나의 인식을 단박에 깨트리는 멘트가 있었다. "우리 교도소에는 나 과장 같은 인물도 필요하지만 팽 부장 같은 사람도 필요해"였다. 나 과장은 규정과 절차대로만 업무를 처리한다. 그 속에 재소자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시선은 없다. 이에 상반되는 팽 부장은 흔히 말하는 '츤데레'형 인물이다. 그는 재소자들을 믿지 못하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인간으로 보고 애정을 갖는 인물이다.



제작진들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부조리한 시스템조차 만들어가는 자들도 사람이고 막을 수 있는 자들도 결국 사람임을. 그래서 해결책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함을.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함을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오히려 사회와 격리된 '감빵'을 무대로 설정한 것은 아닐까. 응답하라에 이어 이번에도 역시 제작진들은 해결의 층위로 '사랑'을 패에서 낸다. 이미 뻔히 다 보이는 패처럼 보여도 이 패는 적절한 상황에서는 조커보다도 강력한 패가 된다.



마지막으로 김제 혁이다. 인간은 자주 세상의 부조리와 마주한다. 더욱이 이 부조리가 해결이 불가함을 느끼면 불안해한다. 이 상황에서 자신의 아킬레스건 같은 부위에 타자로부터 외상까지 입는다면 분노와 공포에 떤다. 그때 떠오르는 '왜 내 인생만 이렇게 X 같냐고'라는 의문은 참담하다. 이 경우 보통의 인간은 합리화의 프로세스를 진행한다. 일종의 현실과의 충돌에 의한 충격을 덜어줄 심리적 에어백인 셈이다. 그리곤 이를 필사적으로 신봉한다. 문제는 위와 같은 프로세스를 통해서는 도피는 가능할지 몰라도 절대 해결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마주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현실에서의 성공은 근면과 성실의 결실이 아니라 투기와 행운이 낳는 자식이다. 이런 속에 근면과 성실을 대표하는 인물은 지겹지만 매번 우리를 눈물짓게 하면서 위악과 위선에 찬 우리의 페르소나를 벗기는 역할을 한다. 불사조란 별명이 붙은 김제혁이 이 드라마에서 등판한 이유다. 연이은 재활 끝에 전성기를 맞은 그는 인생이 조금 날아오르는 듯싶었으나 기어이 다시 추락하고만 인물이다. 그러한 그의 인생에서 최선은 아름다운 단어이기보다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X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냉소에 찬 시청자들을 향해 전력투구를 해야 한다. 그럼 그는 어떻게 다시 날아올라야 하는가.


“여러분 피닉스는 또다시 날까요?”

“사랑이 있는 한 날 것입니다. 수령.”

최인훈 구운몽 中


최인훈의 '구운몽'에 그 답이 있다. 영원을 사는 그 불사조가 살아나는 힘은 사랑이다. 그의 부활은 여타 드라마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러브라인 속에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가 감빵과 사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뿌렸던 사랑에 의해서다. 드라마 속에서 러브라인의 색체를 굳이 짙게 가져가지 않은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2년 만에 마운드로 돌아온 그의 응원가는 'Bravo my life'다.



그렇게 '불행아'는 드라마 속에서나마 사랑들의 찬사를 받는다. 아마 많은 애청자 분들이 관중의 일부가 되어 응원가를 나지막이 따라 부르시지 않았을까. 그는 마지막화 복귀전에서 패배하지만 낙담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을 찾아간다. 야구가 인생의 전부였던 그에게 2년이란 공백기는 무의미해 보였지만 그 사이 야구를 비워내고 사람과 사랑을 체워넣은 '슬기로운 감방생활'이었다.



마지막화에서 급진적인 인물 소개와 퇴장은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쉬움은 뒤로 하고 드라마가 끝나고 한참을 흥얼거린 Bravo my life와 함께 들리지 않을 힘찬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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