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기억만을 가지고 떠나야 한다면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원더풀 라이프' 그 사이에서

by 변민욱
"그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를 시곗줄에 새겼다." (p.45)


최근 사후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 화제다. 천만을 훌쩍 넘긴 '신과 함께', 픽사와 디즈니가 공동제작한 '코코'가 그 중심에 있다. 이 영화들의 흥행을 보고 있자니 사후세계를 다룬 내 '인생영화'가 떠올랐다. 바로 최근 재개봉한 '원더풀 라이프'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천국에 가기 전 일주일 동안 '림보'라는 장소에 잠시 머무른다. 이곳에 도착한 사람은 직원에게 한 요청을 받는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을 하나만 골라달라'는 요청이다. 직원들은 짧은 순간을 영화로 그려낸다. 그들은 이 영화를 통해 삶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본다. 영화(映畫)는 영화(永畫)가 된다. 그 순간의 감정만을 가슴에 품고 다른 기억일랑 모두 잊고 천국을 향해 떠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향수 속에서 향기롭게 떠나지는 못한다. 삶에서 가장 아름답던 순간을 선택하지 못한 자들은 림보에 남아 일을 해야 한다. 영화 속에서 모치스키는 림보에 남아 기억의 태엽을 자꾸만 돌려본다. 하지만 흑백의 기억 속에서 눈부신 추억을 그는 찾지 못한다. 그의 기억에 색채와 명암을 더해준 사람은 교코다. 그녀의 기억 속에 그가 숨 쉰다는 것을 안 후에야 그는 림보를 떠난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 50년이 지나서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어. 정말 멋진 일이야."


이 장면 이전까지 영화는 줄곧 내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라면 어떤 추억을 꼽을 것인가.' 수많은 기억과 순간이 영화와 함께 머리 속에서 상영됐다. 하지만 모치스키는 질문을 하나 더 추가한다. '누군가의 추억 속에서 나는 존재할까'다. 약간의 시샘과 질투가 섞인 질문도 떠오른다. '내가 선택한 순간에 있는 사람들이 선택한 순간에 나는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 누군가 내가 아직도 삶을 신에 이르는 길이라 보는지, 사랑이 증대하는지 물어봤으면 좋겠다. 만일 내게 말할 힘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대답이 '그렇다'이면 나는 눈을 감겠다. 반대로 대답이 '아니오'이면 나는 위를 쳐다볼 것이다."라고 일기에 썼던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가 떠오른다.


"여러분." 그가 입을 뗐다. "이반 일리치가 사망했다는군요." (p.29) 소설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결말을 '스포일러 한 셈이다. 하지만 이로써 작가는 독자의 관심을 결말보다는 오로지 죽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집중시킨다. 또한 죽음에 이르면서 나타나는 고통과 비애를 세세히 그리면서도 비윤리적이라는 비난도 피한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비극이다. 젊은 날 그는 고등문관 시험에 통과하고 판사로 임용된다. 이후 남들이 인정하는 아내와 결혼하고 우여곡절이 없는 삶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성공가도를 달린다. 또한 그의 판사로서의 권력을 은연중 즐기기도 하지만 탐닉하거나 남용하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무결점 인생이다. 그래서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죽음에게 나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하는 것도 위선은 아니다.



'난 내가 조금씩 조금씩 산을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랬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산을 오르는 것이었지만, 실은 정확히 그만큼 식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지. 그래 이제 다 끝났어. 죽는 일만 남은 거야! (p.131)


삶의 비극은 위선자도 아니고 충실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과연 내가 잘 살았나'라는 의문을 갖게 되면서 시작된다. 사람은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는 인생은 쉽고, 기분 좋고 고상하게 흘러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인생은 정확하게 그가 생각한 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이 그를 잡아먹는다. 그는 사는 동안 아내와 소원해질수록 일에 더 편집증적으로 몰두했다. 그리고 이내 일의 재미가 그의 삶을 집어삼킨다. 가끔 느끼는 공허함은 고위층과의 사교와 카드놀이로 채웠다. 병에 걸린 일리치가 돌아봤을 때, 삶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동안 좋은 순간은 기억에서도 연신 뒷걸음만 쳤다.



이반 일리치는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자신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고 그와 함께 울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법원 동료인 셰베크가 찾아오자 그는 소리 내어 울거나 응석을 부리는 대신,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로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 습관대로 대법원이 내린 판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면서 그것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과 그 자신의 이 거짓이 이반 일리치 생애의 마지막 순간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p.111-112)


아내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도 그를 떠났다. 그가 죽자 동료들은 자신의 인사이동과 봉급 상승을, 아내는 정부 보조금을 기대하는 것도 잔혹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장례식의 풍경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단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가 끝까지 부정했지만 '당신의 삶은 잘못 흘러갔다.''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삶이었고 그 수단이 결국 당신의 눈을 멀게 했다. 그렇게 그는 판사였지만 아무런 변론도 제시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고받는다.


'Memeto mori'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격언이다. 이는 사람이란 유한한 존재임을 나타난다. 이 소설이 죽음을 다룬 소설 중에서도 손꼽히는 이유는 죽음을 다루면서도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힘없는 청구인이 돼버린 이반 일리치에게 하인 게라심과 아들 바샤가 나타난다. 이들은 이반 일리치의 무관심하고 사랑이 결핍된 삶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듬어준다. 이를 통해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올바른 삶이란 어떤 삶이었는가를 일깨워준다. 이를 깨달은 그는 정작 죽음이 닥쳐오자 그 어느 때보다 평안히 죽음을 맞이하며 세상을 떠난다 이렇게 대문호 톨스토이는 죽음과 삶을 사랑으로 매개한다.


다시 원더풀 라이프로 돌아가 보자. 이반 일리치는 림보에서 과연 어떤 순간을 선택할까. 이 질문은 이반 일리치와 내 삶 그리고 대다수 현대인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아 서글픈 질문이 된다. 고등문관 시험에 통과했을 때일까. 혹은 판사에 임용되고 승승장구하던 시절일까. 그도 아니면 멋들어지게 꾸민 집을 손님에게 보여줄 때일까?


나와 당신은 그가 그 순간들을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안다. 그는 그런 순간보다는 죽음 직전에 아들과 혹은 하인 게라심과 공유한 따뜻한 순간을 선택할 듯하다. 이상하리만치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은 그 당시 내가 혹은 사회가 성공이라고 부르짖었던 성공의 순간과는 괴리가 있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괴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나는 환호와 박수 속에서 우울하고 외로웠으며 걱정 어린 시선과 비판 속에서 행복하고 소박하게 만족하면서 자랐다.


유명한 삼단논법처럼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죽음은 가장 명료하면서도 살아있는 인간에겐 영원히 아득한 진리다. 죽음과 사후세계를 다루는 소설은 거울의 역할을 한다. 당신과 나의 모습을 비추면서도 각기 다른 상(像)은 삶을 반추하게 한다. 이와 동시에 삶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삶만 돌아보지 말고 주위를 돌라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남들의 시선에서도 당신은 사랑이 증대되는 삶을 살았는가. 유한한 삶에서 언젠가 뒤돌아 보았을 때 사랑으로 아로새겨진 길을 되짚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글을 마치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를 시곗줄에 새겼다고 했다.


나는 시계를 좋아한다. 하루 입을 옷을 정하면서 그보다 많은 시간을 시계를 고르는 데 사용한다. 시계엔 내 가치관이 투영된다. 전자시계, 쿼츠, 오토매틱 시계 등으로 그날 느끼는 시간에 대한 질감을 표현한다. 특히나 오토매틱 시계는 초침이 물처럼 흐른다. 이를 위해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고 습도, 기울임, 충격 등 신경 쓸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시계를 키운다는 표현을 주변 사람들에게 했다. 시계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시간이 살아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단순한 관용구가 아닌 선조들의 뼈저린 충고가 녹아있는 생명성의 상기다. 그런 시계에게 나는 종종 저항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를 시곗줄에 새겼다고 했다.


이반 일리치는 그의 시계태엽을 어제로 돌려야 할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덜 그런 욕심이 없을 그 어디까지. 시간이 손익분기점을 섬뜩하게 넘어섰던 때는 언제일까. 그가 시곗줄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라고 새겨 넣었던 그 순간이 아닐까. 그때 그는 시간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원판 안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초침이 지구라는 구 안에 쳇바퀴도는 그의 인생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으레 그러하듯 그는 잊었다. 시간은 죽음을 향해 흘러갔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급류에 휩쓸려가기 때문에 그는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성공과 고위층의 인정을 위해 그는 사랑을 버리고 홀로 공성을 거듭했다. 그리고 죽음은 어느새 삶의 하류에 이르른 그에게 무의미한 공성을 관두라 하며 데려갔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를 시곗줄에 새겼다고 했다.


내 시계의 태엽은 언제로 돌려야 할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덜 그런 욕심이 없을 그 어디까지. 저번에 집을 정리하다 우연하게 초등학교 시절 썼던 일기장을 보았다. 다행히도 글은 조금은 나아졌다. 하지만 나는 그때보다 조금도 지혜로워지지 못했다. 삶의 속도에 매몰되어 주위 사람들은 보지 못했음을 요즈음 많이 깨닫는다. 새해 목표가 하나둘씩 무너져갈 즈음이다. 목표를 이루겠다는 다짐을 하기 이전에 그 목표들을 올바르게 설정했나 생각해 볼 수 있는 책과 영화 한 편을 추전 드리면서 이만 글을 줄인다.